2025년 11월 21일 (금)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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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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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1-19 ㅣ No.186386

김건태 신부님_잘하였다착한 종아!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 곧 마지막 길에 들어서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후의 날 도래에 앞서는 유예 기간을 예고하십니다. 교회의 기간에 해당하는 이 시간은 제자들에게 시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모든 이가 알고 있던 사건, 당신의 탄생 시점에 전개되었던 사건을 예로 비유 말씀을 건네십니다. 이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유다와 사마리아 임금으로 공적인 임명을 받기 위하여 로마를 방문했을 때, 적대자들이 이를 가로막을 목적으로 오십여 명의 유다인들을 로마로 파견하자, (결과적으로 ‘임금’이라는 칭호는 받지 못하나, ‘분봉왕’ 또는 ‘제후’가 되어) 돌아와서 복수극을 펼쳤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예로, 이제 예수님이 당신의 왕권을 부정하려 안간힘을 쓰는 유다 지도자들의 반대 앞에 서십니다.

 

당신의 부재 기간 동안, 예수님은 종들에게 당신의 ‘재산’을 맡기십니다. 미나(Mina)는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서,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로마 화폐 데나리온의 절반 정도의 가치였습니다(참고로, 예수님 시대에는 세 가지 화폐가 통용되었습니다. 세금 납부 등 공적인 생활과 관련해서는 로마의 화폐 콰드란스/데나리온/탈렌트, 상거래 등 일상생활에서는 그리스의 화폐 렙톤/스타테르/미나/드라크마, 종교 생활에서는 유다의 화폐 세켈 등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십일조나 헌금은 세켈로만 헌납해야 했기에, 예루살렘 성전 주위에 ‘환전상’이 들어서 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종들은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든 충실함과 항구함을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부재중인 것처럼 보일 때도, 다시 말해서 불안하고 초조한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한 미나가 작은 가치의 화폐를 말하고 있는 만큼, 작은 일에도 정성을 보여야 하는 의무가 부여됩니다. 예수님의 ‘재산’은 사람들의 눈에 아주 작은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종들에게 계산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종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했는지보다는, 당신이 맡기신 미나가, 곧 하느님의 말씀이 어떤 성과를 보였는지에 관심을 쏟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종들의 열정과 능력에 따라 열매를 맺었으며, 작은 일에도 성실한 종들의 모습은 인정되고 보상됩니다. 다만 한 사람, 안전에만 급급한 나머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종, 이 종은 그 탓을 주인에게 돌리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주인님은 냉혹한 분이어서…,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랑하는 율법을 간직만 할 뿐,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삶으로 율법을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최후의 판관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은 마냥 두려움에 싸여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말씀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며 살피는 기다림이어야 함을 배우고 새깁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우리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맡겨 주신 말씀이 많은 결실을 낼 수 있도록 기도하며 힘쓰는, 활기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9,11-28: 열 미나의 비유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과 책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미나”, 곧 은총과 재능, 시간과 소명이라는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우리가 받은 은총을 봉인해 두는지, 아니면 열매를 맺도록 투자하는지가 구원의 열쇠가 된다. 
 
예수님은 먼 나라로 왕권을 받으러 가는 귀족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수난과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을 예고하신다. 그 사이 제자들은 주인에게 받은 미나를 잘 활용해야 한다. 열 미나를 남긴 종은 충실성을 인정받아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는다. 다섯 미나를 남긴 종도 칭찬받는다. 그러나 한 미나를 수건에 싸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는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총을 낭비하거나 묻어 두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매 맺기를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작은 것에 충실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큰 기쁨에 참여할 수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비유를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은 우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형제들을 위해 열매 맺으라고 주어진 것이다. 은총을 가만히 묻어 두는 것은 은총을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다.”(Homiliae in Matthaeum, 78)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땅에 씨앗을 묻어 두고 물도 주지 않아 열매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Commentarium in Lucam, 39) 즉, 은총은 ‘소유’가 아니라 ‘사명’이다. 
 
사목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은총과 달란트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소명을 성실히 수행하며, 사회와 교회 안에서 봉사해야 한다.”(34항) 또한 교리서는 말한다. “각 그리스도인은 받은 은사를 공동선에 이바지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성장과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함이다.”(1937항 참조) 
 

우리는 각자 다른 시간, 재능, 재물, 관계라는 미나를 받았다. 그것을 단순히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봉사로 열매 맺어야 한다. 우리가 작게라도 하느님을 위해 충실히 행한다면, 주님은 그것을 크게 축복하신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는 네게 맡겨진 미나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각자 받은 은총을 통해 이웃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며, 하느님 나라 확장하기를 원하신다. “주님, 제가 받은 은총을 봉인하지 않고, 열매 맺는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작은 일에 충실하여 큰 기쁨에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전삼용 신부님_사랑 앞에선 방관도 불순종이다  

  
찬미 예수님!
1944년 겨울,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지옥이었습니다.
나치와 헝가리 화살십자당원들이 유대인들을 매일 밤 다뉴브강으로 끌고 가 총살하던, 그야말로 '죽음'이 왕 노릇 하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조르조 페를라스카'라는 이탈리아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공로로 '스페인 보호증명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안전하게 스위스로 도망칠 수 있는 '편도 티켓'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남을 완벽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차역으로 가던 중, 유대인 아이들이 화물칸에 실려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 사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이 그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안전한 생존'을 버리고 '거룩한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 이미 대사가 도망가고 텅 비어버린 스페인 대사관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스페인 영사 대리'라고 선언하는,
목숨을 건 '거짓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무 권한이 없었지만, 마치 자신이 모든 권한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미나'(보호증명서 한 장)를 가지고 위대한 '장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스페인 대사관 명의로 '안전 가옥' 8채를 확보하고, 수천 장의 가짜 보호증명서를 발행했습니다.
심지어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나치 최고 장교 앞에서도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스페인 영사, 호르헤 페를라스카요! 이들은 스페인의 보호 아래 있소!"
그는 기차역으로 달려가 이미 아우슈비츠로 떠나려던 기차 문을 열고 사람들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나' 하나로 5,2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귀족이 종들에게 똑같이 '한 미나'씩을 맡기고 왕의 자리를 받으러 떠납니다.
두 종은 그 한 미나를 가지고 "가서 장사하여" 열 미나와 다섯 미나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왕'으로 믿었기에, 그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거룩한 모험'을 감수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종은 그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루카 19,20-21)라고 변명합니다.
그의 죄는 장사를 하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또 다른 부류가 나옵니다.
바로 "우리는 저자가 우리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루카 19,14)라고 외친 시민들입니다.
이 둘은 다른 죄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정확히 같은 죄입니다. 
 
주인을 '무서운 분'으로 오해하여 두려움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이나, 주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대놓고 반역한' 시민이나, 그 본질은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학교에 가라"는 뜻을 주었을 때, "싫어요!"라고 대들며 밖으로 나가는 자녀나,
"네..." 하고 대답만 하고 방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자녀나,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불순종은 똑같습니다.
하느님, 곧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나의 '왕'이시라면, 내 눈앞에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상황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분의 왕권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1964년 뉴욕,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아파트 앞에서 30분 넘게 살해당했습니다.
최소 38명의 이웃이 창문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거나 비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나설 필요가 없어서',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38명의 방관자들은 세 번째 종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이라는 수건에 '인간의 도리'라는 미나를 싸서 숨겼습니다. 
 
우리는 매일 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전한 방관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거룩한 모험'을 감수하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구약의 에스테르를 보십시오.
그녀는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궁전 안에서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하만이 유다 민족을 몰살하려 할 때, 모르도카이는 그녀에게 "그대가 이럴 때에 침묵을 지키면...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 집안은 멸망할 것이오"(에스 4,14)라고 경고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에스테르는 '안전한 생존'을 버리고,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나아가는 '거룩한 모험'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나'(왕비의 지위)를 가지고 '장사'하기로 결심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제가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에스 4,16)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리는 죄책감. 어쩌면 이 죄책감이야말로 우리를 잠에서 깨우는 '천사'의 목소리일지 모릅니다.
2014년,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구출하라'는 '미나'(직분)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남기고 가장 먼저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미나'를 수건에 싸 들고 구명정에 올랐고, 수백 명의 생명은 바다에 잠겼습니다. 
 
이와 정반대의 선택을 한 선장이 있습니다. 1985년 11월, '전재용 선장'은 남중국해에서
원목을 싣고 항해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망망대해에서 작은 어선에 타고 있던 96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국제법상 그들을 구조하는 것은 선장의 '재량'이었습니다.
회사의 규정은 '그냥 지나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연료도 시간도 돈도 낭비되고, 혹시라도 전염병이나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선장이 져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칠 모든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굶주림과 공포에 질려 손을 흔드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리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항로를 돌려 96명 전원을 구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나'(선장의 권한)를 가지고 가장 위대한 '장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나의 안전, 나의 이익, 나의 규정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수건이 아닙니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불순종이다.
신앙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모험'을 매일 떠나게 하는 나침반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한 미나'는 무엇입니까? 장사는 모험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 어떤 '장사'를 하고 있습니까? 

 

 

이병우 신부님_<연중 제33주간 수요일>(11.19)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루카19,23) 
 
'봉사자의 자세!' 
 
오늘 복음(루카19,11ㄴ-28)은 '미나의 비유'입니다. 
 
미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이지만, 이는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하는 은총(선물)이라는 것,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총)을 잘 활용해서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받은 것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루카19,24)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봉사자의 자세'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는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봉사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건설의 봉사자들, 교구장 주교의 명을 받아 파견된 본당 사목자를 도와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의 봉사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봉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기쁨과 성실과 겸손'입니다. 능력과 잘남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봉사는 하느님의 힘(성령의 힘)으로 해야 하고, 또한 함께 하는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의 뒤를 이을 봉사자(임금)로 다윗을 뽑으실 때, 다윗은 이사이의 아들 중에서 막내였고, 양을 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처럼 눈에 들어오는 대로 겉모습(능력)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셨습니다.
많은 예언자들과 열두 사도들의 경우처럼, 주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이들, 부족한 이들을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때가 때이다 보니 봉사자로의 부르심을 받는 이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 부르심에 성모님처럼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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