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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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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1.22)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20,38ㄴ)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위하여!'
오늘 복음(루카20,27-40)은 '부활 논쟁'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수혼법'을 내세워 부활 논쟁을 걸어옵니다. '수혼법'은 '형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그 혈통을 잇게 해 주는 법'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일곱 형제가 모두 한 부인과 결혼했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면 부활할 때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결혼은 이승에서만 속할 뿐, 부활 이후의 삶에서는 존속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되는 삶은 이승의 연장이 아니고,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로써 하느님의 능력으로 창조되는 온전히 새로운 세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루카20,35)이라는 말씀을 통해, 부활(영원한 생명)이 모든 이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20,38)
그렇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신 뜻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고, 영원히 살아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음악의 주보 성인'이시며,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을 지니신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충실하게 따라갔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부활에 참여하고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따라갑시다!'
전삼용 신부님_이런 사람과는 혼인 시키면 절대 안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대작 『죄와 벌』에서 우리는 인류 문학사상 가장 기이하고도 거룩한 커플을 만납니다. 한 명은 오만함에 빠져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찍어 죽인 살인자 라스콜니코프이고, 다른 한 명은 가난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파는 창녀 소냐입니다. 어느 날 밤, 촛불이 가물거리는 소냐의 누추한 방에서 살인자는 창녀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청합니다. 소냐가 떨리는 입술로 읽어 내려간 구절은 요한 복음 11장, '라자로의 부활'이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소냐의 목소리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에 이르렀을 때, 라스콜니코프의 영혼을 짓누르던 죽음의 껍질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촛불은 꺼져가고 있었지만 두 죄인의 가슴 속에는 부활의 불씨가 옮겨붙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소설의 진짜 결말인 '에필로그'는 그들이 시베리아 유형지로 떠난 후를 그립니다. 어느 이른 아침, 강가에 앉아 있는 라스콜니코프 곁으로 소냐가 다가와 조용히 손을 내밉니다.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들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었다. 한 사람의 심장은 다른 사람의 심장을 위하여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 그들에게는 7년이라는 세월이 마치 7일같이 느껴졌다." 보십시오. 살인자와 창녀라는 꼬리표,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과거, 이 모든 '죽음의 흔적'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육체적으로 탐하거나 소유하려는 남녀가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어주는 '완전한 친교', 즉 부활한 존재들의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살다 죽었다면,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누구의 것)가 됩니까?" 이 질문은 철저히 '죽음'을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갉아먹는 세상에서는 '소유'만이 살길처럼 보입니다. 내 핏줄을 남겨야 하기에 자식에 집착하고, 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배우자를 독점하려 합니다. 이것이 세속과 육신의 욕망이 만드는 '지상의 혼인'입니다. 지상의 혼인은 거룩하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때로는 서로를 옥죄는 소유의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다."(루카 20,36) 죽음이 사라진 곳, 부활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내 것'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멈춘 그 자리에서 비로소 '천국의 혼인'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배타적인 소유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투명하게 만나는 '친교(Communio)'입니다.
이 '천국의 관계'가 얼마나 뜨겁고 아름다운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미 이 땅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규칙을 넘어선 사랑의 폭풍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 베네딕토 성인과 그의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해 보십시오. 1년에 단 한 번 만나던 어느 날, 해가 저물자 베네딕토 성인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누이여, 이제 가야겠소. 수도원 규칙상 밤에는 밖에서 머물 수 없소." 하지만 죽음을 예감했던 스콜라스티카는 오빠를 붙잡았습니다. "오빠, 제발 오늘 밤은 가지 마세요. 밤새도록 천상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해요." 오빠가 완강히 거절하자, 그녀는 식탁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져, 베네딕토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오빠가 "누이여,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길!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라고 묻자, 그녀는 평화롭게 웃으며 답했습니다. "오빠는 제 청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습니다. 자, 나가실 수 있으면 나가보세요."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이 장면을 두고 "사랑할 줄 아는 이가 더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날 밤, 두 남매 사이에는 남녀의 정욕이나 율법의 경직됨은 없었습니다. 오직 두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엮이는 거룩한 친교만이 폭풍우처럼 몰아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넘어선 천국의 관계입니다.
타오르되 소멸하지 않는 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일화는 또 어떻습니까?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포르치운쿨라) 숲속에서 클라라와 소박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성인이 성령에 취해 하느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물동이를 들고 달려왔습니다. 성당과 숲 전체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불은 없었습니다. 오직 두 성인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에 잠겨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본 것은 물질을 태워 없애는 파괴적인 불이 아니라, 두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될 때 뿜어내는 성령의 불꽃이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서로를 소유하려다 태워버리지만, 부활의 사랑은 서로를 살리며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왜 부활을 믿어야 합니까?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사랑은 결국 무덤에서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잊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우리는 희망을 가집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소유의 껍질을 벗고 '진정한 만남'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예고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완전히 내어주며 하나 되시듯, 우리도 이 교회 안에서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깊은 영적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람, 저 사람은 남"이라고 가르는 세상의 배타적인 벽을 허무십시오. 라스콜니코프와 소냐가 죄의 사슬을 끊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했듯, 베네딕토와 스콜라스티카가 밤새도록 천국의 기쁨을 나누었듯, 우리도 서로에게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곁에 있는 이를 바라보십시오. 그는 내가 소유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장차 부활하여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할, 영원히 빛나는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20,27-40: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부정하며 예수님께 도발적인 질문을 한다.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그들은 인간의 이해와 세상의 관점으로 부활을 판단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하느님 나라의 본질을 말씀하신다. 오늘은 우리가 부활의 진정한 의미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을 묵상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하신다(35절). 부활한 자들은 죽음을 다시 경험하지 않으며, 천사들과 같이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된 삶을 살게 된다(36절). 부활의 목적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완전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는 말씀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도 하느님 안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다. 부활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며,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지금부터 경험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지금, 이 순간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부활은 단순한 육체의 재생이 아니라, 하느님과 영혼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부활한 사람은 더 이상 인간적 필요에 매이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집중한다.”(De Civitate Dei, XXII, 30)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강조한다. “부활은 우리를 하느님의 영광과 사랑에 참여하게 한다. 현재의 삶에서 하느님과 친밀하게 살지 않는다면, 부활의 기쁨 또한 온전히 누릴 수 없다.”(Homiliae in Lucam, 78)
복음은 단순히 먼 미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묻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현재 체험하며 살고 있는가? 세상의 욕심과 근심에 매이지 않고, 부활의 생명으로 하루를 살아가는가? 우리의 행동과 관계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는가?
구체적 실천으로는,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선택하기; 죽음과 세속적인 필요에 매이지 않고, 영적 가치와 사랑을 우선하기; 기도와 성사 생활을 통해 현재부터 부활의 생명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천국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 속에서 지금, 이 순간부터 살아가라.”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며, 지금부터 그 생명을 살아갈 책임이 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을 부활의 생명으로 채우고, 세상의 소유와 욕심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한다.
“주님, 우리를 당신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 있는 자녀로 세우소서. 부활의 생명을 오늘의 삶 속에서 체험하게 하시고, 모든 행동과 마음을 당신께 돌리게 하소서.” 아멘.
김건태 신부님_산 이들의 하느님
[루카 20,27-40]
대사제들,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등을 포함한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음에 몰아넣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에 대한 백성의 신뢰도를 떨어뜨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시니,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일련의 까다로운 질문들을 퍼붓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답변으로 말미암아 청중들이 갈라서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엷어지거나 사라지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사제계급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두가이들이 나섭니다. 이들은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특권계급이었으며, 일반 서민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던 분파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친(親)로마적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천사들의 존재나 영적인 세계, 사후의 부활을 거부했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했기에, 다니엘서가 싹틔우기 시작한 부활에 대한 모든 개념과 희망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줄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이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회개가 절박하다고 가르치고 계시나, 죽음과 함께 인간은 영원히 사라지는 존재라면 이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에 대한 개념과 희망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침몰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은 하시지만, 인간의 천박한 지혜 차원이 아니라, 고고한 수준으로 끌어올려 답하십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이 명기하고 있는, 이름하여 수혼제(嫂婚制: Leviratus법)를 근거로 질문을 제기하나(신명 25,5-10 참조), 이 법은 한 집안의 대를 잇도록, 또는 과부가 된 여인의 생존을 위해서 제정된 법이었으며, 더구나 원하지 않을 때는 절차를 밟아 저버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인간세계를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기에, 하느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법이라는 사실을 숙지해야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는 의도에서 억지로 엮어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 제상에 참여하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하는 이 한마디로 예수님의 답변은 충분했습니다. 부활 이후의 삶은, 사두가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상 생활의 연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사두가이들이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인용하여, 모세가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상기시키시며, 따라서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는 결정적이며 위대한 가르침을 남기십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는 예찬이 가능하고, “사람들이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는 고백이 가능하도록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당신 사명 수행의 마지막 여정인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가르침을 토해내십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 이 가운데 사람들이 목격하거나 체험해 본 적이 없는 부활이라는 주제가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는 가르침 앞에 섭니다. 이승에서도 살아 계신 하느님을 받들고, 저승에서도 살아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늘 주님의 뜻을 살피고 실천하는 삶, 늘 주님께 돌아서는 회개의 삶이 절실합니다.
오늘 하루, 살아 계신 하느님을 받들고 살며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기분 좋은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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