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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 토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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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론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회장, 삼정의 이재용 회장, 현대의 정의선 회장이 강남의 한 치킨집에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세 사람은 ‘치맥’을 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엔비디아의 ‘GPU’는 인공지능 시대의 ‘쌀’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삼성의 반도체는 인공지능 시대의 ‘밭’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현대의 자동차는 인공지능 시대의 ‘몸체’와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쌀과 밭과 몸이 만나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분야의 대표들이 한국을 찾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자체 플랫폼이 있는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은 네이버, 다음과 같은 검색엔진이 있습니다. 한국은 산업용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는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은 인공지능을 이용할 엔지니어들이 풍부한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은 인공지능에 필요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갖춘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분야의 대표들은 중국보다는 한국을 택한 것 같습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근대 물리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뉴턴은 3가지의 법칙으로 우주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근대 물리학은 뉴턴의 운동 법칙이라는 뿌리에서 줄기를 뻗었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주의 힘은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300년 동안 우주의 힘은 뉴턴의 법칙으로 설명하게 되었고,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의 질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뉴턴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미시 세계에서는 뉴턴의 법칙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새롭게 상대성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변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빛의 속도에서는 시간이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양자역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양자컴퓨터의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은 ‘예고편’을 만듭니다. 관객은 예고편을 보면서 본 편의 내용을 기대하게 됩니다. 드라마도 한 회가 끝날 즈음에 다음 회의 내용을 조금 알려줍니다. 그러면 시청자는 다음 회를 기다리게 됩니다. 요즘 우리는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마치 예고편과 같습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곧 다가올 절정을 알려주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이사야 예언서가 예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고통이 없습니다. 미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없습니다. 생과 사의 고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없습니다. 소유에서 존재의 삶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자아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 없습니다. 본래의 자아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요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과학혁명의 구조와는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는 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상관이 없습니다. 천동설과 지동설도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이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시간과 공간의 ‘틀’까지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의 신비에는 4가지의 힘이 있습니다. 천주존재, 상선벌악, 삼위일체, 강생구속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말씀으로 권한을 주셨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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