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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 수원 교구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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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참 증인 스테파노
우리 가톨릭 전례는, 성탄 축일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한 최초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제자들을 선교로 파견하기에 앞서 내리신 말씀으로서, 사람들이 보여줄 적대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적대자들 가운데 우선은 유다교 지도자들이며, 다음으로 세상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건네진 요구 사항은 말씀이 아니라 증언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과 다른 민족에게 증언할 것이다.” 입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선교해야 할 것임이 전제됩니다. 주님은 설교할 내용을 미리 걱정할,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하십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는 성령께서 그때그때 일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말 잔치보다는 힘 있는 증언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교회는 믿음 깊고 실천력 있는 수많은 신앙인을 통하여, 가난하고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을 통하여 탄생했고, 또 복음도 그렇게 전파되어 왔습니다.
하느님 모독죄로 유다 최고 의회 또는 법정에 선 스테파노는,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일러 주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감동적인 설교, 성경에서 가장 긴 설교 말씀 가운데 하나를 남깁니다(사도 7장).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모세,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는 가운데, 그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심을 역설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무조건적 선택과 자비의 세계에서 놓여 있었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성령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왔으며, 이러한 삶이 결국, 메시아를 예고한 예언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질타합니다. 물론 이 설교 말씀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붙였지만, 이미 전개된 구원의 역사까지 접어버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스테파노의 뒤를 이어, “박해자들이 겉옷을 벗어 발 앞에 둔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부활하신 주님의 섭리로 일정한 과정을 거친 다음, 더욱 넓고 힘차게 역사를 펼쳐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음을 믿어 고백하는 신앙인들로서, 이 신비를 힘 있게 증언하며 믿어 고백한 대로 살아간 스테파노를 기념합니다. 스테파노와 같은 굳은 믿음, 실천하는 자세로 주님 오심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마음껏 나누고 전파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오늘 우리는 성탄의 기쁨을 막 경험한 직후, 교회가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고 있음을 묵상한다. 교회가 성탄 다음 날을 스테파노 축일로 지킨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이는 아기 예수의 탄생의 신비와, 그분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증인의 삶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곧 순교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1. 성령 충만한 증인, 스테파노 사도행전은 스테파노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사도 6,5)이라 증언한다. 그는 사도들을 도와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힘 있게 증거하였다. 그가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사도 7,55)고 증언한 것은, 그의 순교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일치, 하늘나라의 완성된 삶으로 들어감을 보여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스테파노의 순교를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스테파노는 돌을 맞으면서도 천상의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땅의 고통보다 하늘의 영광이 더 크고 선명하게 비쳤기 때문이다.”(Hom. in Act. Apost. XV,3) 그의 눈은 세상 사람들의 분노와 폭력이 아니라,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고정되어 있었다.
2. 원수를 용서하는 사랑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 7,60)라고 기도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루카 23,34.46).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스테파노는 무릎을 꿇고 죽었으나, 사랑으로 서 있었다. 그가 무릎을 꿇은 것은 육체였지만, 용서하는 사랑은 하늘에서 일어선 것이었다.”(Sermo 316,1) 순교는 단순히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원수를 향한 사랑과 용서의 완성된 증거이다.
3. 성령의 말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예고하시며 말씀하신다. “너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성령이시다.”(20절) 스테파노의 담대함과 사랑은 바로 이 성령께서 주신 은총이다. 인간의 본성만으로는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힘은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꾸고,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킨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순교자는 자기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한다. 피 흘림은 육신의 것이지만, 믿음을 지탱하는 힘은 하늘에서 온다.”(Epistula ad Martyres et Confessores 10,4)
4. 오늘 우리의 부르심 스테파노의 삶과 죽음은 오늘의 우리에게 깊은 메시지를 준다. 신앙은 단지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세상에서의 박해, 오해, 조롱, 거부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자리이다. 성탄의 기쁨은 현실을 외면하는 달콤한 순간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내고, 그분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맺음말 스테파노는 성탄의 빛을 가장 먼저 자기 생명으로 비춘 증인이었다. 그가 보여준 용서와 사랑은 곧 아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연결된다. 오늘 우리도 기도하자. “주님, 성 스테파노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여, 세상 속에서 담대히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끝까지 주님의 뜻에 충실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전삼용 신부님_관상은 과학입니다
찬미 예수님! 어제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흰색 제의를 입고 축제를 벌였는데, 하루 만에 붉은색 제의를 입고 장례식을 치르는 기분입니다. 교회는 성탄 바로 다음 날, 가장 처참하게 돌에 맞아 죽은 스테파노의 순교를 기념합니다. 이것은 성탄의 완성이 낭만이 아니라, 생명을 바치는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꽤 일리가 있습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한번은 참모가 내각 각료로 아주 유능한 인재를 추천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은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얼굴이 마음에 안 드네." 참모가 황당해하며 "아니, 얼굴은 타고나는 것인데 본인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자, 링컨은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네. 뱃속에서 나올 때는 부모 탓이지만,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네. 그 사람이 평생 마음에 무엇을 품고 살았는지가 얼굴 근육 하나하나에 다 기록되기 때문이지."
링컨의 말처럼, 얼굴은 그저 피부가 아닙니다. 영혼의 이력서이자, 내 마음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생중계하는 '모니터'입니다. 탐욕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탐욕스러운 주름이 잡히고, 사랑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온화한 미소가 번집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스테파노를 죽이려고 둘러싼 의회 의원들은 '격분'하여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땅의 돌멩이'와 '미움'에 고정되어 있었기에, 그 얼굴은 악마처럼 일그러져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똑같은 현장에 있었던 스테파노의 얼굴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 6,15)
도대체 어떻게 날아오는 돌무더기 앞에서 천사의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요? 스테파노가 강철 멘탈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그의 시선이 땅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사도 7,55)
그때 스테파노가 본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보통 신경(Credo)에서는 예수님이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왜 스테파노의 눈에는 '서 계신' 것으로 보였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녀가 배에서 떨어져 허우적대고 있는데, 점잖게 앉아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벌떡 일어나서 뛰어들 준비를 하거나, 밧줄을 던지며 "조금만 버텨라, 내가 여기 있다!"라고 소리치지 않겠습니까?
스테파노는 자신을 응원하고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신 스승님의 안타까운 사랑을 본 것입니다. 그 사랑의 눈빛을 마주 보는 순간, 날아오는 돌멩이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심리학에서도 이와 똑같은 원리를 증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엘리너 깁슨의 '시각 벼랑(Visual Cliff)' 실험입니다. 아기 앞에 낭떠러지처럼 보이는 투명한 유리 판을 설치해 둡니다. 아기는 건너편으로 가고 싶지만, 발밑이 낭떠러지처럼 보여 공포를 느낍니다. 이때 아기는 본능적으로 건너편에 있는 엄마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만약 엄마가 '공포'나 '불안'의 표정을 지으면,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며 뒤로 물러납니다. 하지만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미소'를 지으면, 아기는 그 낭떠러지를 씩씩하게 기어서 건너갑니다.
아기에게 세상(벼랑)은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엄마의 얼굴(모니터)에 비친 감정이 곧 아기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스테파노가 죽음의 벼랑 앞에서도 평화로웠던 건, 그가 바라본 예수님의 얼굴이 자신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그 어떤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이라는 벼랑 끝에 몰릴수록 주님의 미소를 더 선명하게 보기에 그 평화는 더욱 커집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을 기억하십니까? 탈주자가 생겨 그 벌로 10명이 굶어 죽어야 하는 지하 감방. 그곳은 비명과 저주가 가득한 생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콜베 신부님이 들어가자 그곳은 기도와 찬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성당으로 변했습니다. 2주 뒤 시신을 수습하러 들어간 사람은 콜베 신부님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굶어 죽은 시신인데도 너무나 평온하고 빛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죄수들은 '굶주림'과 '나치'를 보았기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콜베 신부님은 감방 벽 너머의 '하느님 나라'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보고 있었기에 천사의 얼굴이 출력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을 보고 하느님을 믿을지 말지 결정합니다. 찌푸리고, 화내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방해입니다. 우리의 표정이 곧 복음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도 스테파노처럼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억지로 거울 보고 웃는 연습을 한다고 될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웃는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의 어린 시절 일화가 우리에게 그 답을 줍니다. 어린 시절 데레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약도 소용없었고, 데레사는 극심한 우울과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날 데레사는 침대 곁에 있는 성모상을 간절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모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환하게 빛나며 어린 데레사를 향해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인 것입니다.
훗날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모님의 그 황홀한 미소가 내 영혼 깊숙이 들어오자마자,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두 뺨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데레사가 '작은 꽃'처럼 예쁜 얼굴의 성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병상에서 성모님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떤 하느님의 얼굴을 상상합니까? 혹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나를 노려보거나, 벌을 주려고 벼르는 무서운 얼굴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책감은 우리 눈을 가려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보게 만듭니다. 두려운 얼굴을 보면 우리 얼굴도 두려움으로 어두워집니다.
하지만 스테파노처럼, 그리고 어린 데레사처럼 죄가 없는 순수한 마음, 혹은 용서받은 자녀의 마음으로 눈을 들면, 우리는 우리를 향해 활짝 웃고 계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오늘 하루, 내 영혼의 거울을 닦으십시오. 고해성사로 죄의 얼룩을 지우고, 미사 안에서 나를 보며 기뻐하시는 주님의 미소를 자주 바라보십시오.
아기가 엄마의 미소를 보며 웃는 법을 배우듯, 우리도 주님의 미소를 자주 볼 때 비로소 세상이 감당 못 할 평온하고 행복한 천사의 얼굴을 갖게 될 것입니다. 관상은 과학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계시는 그분의 미소를 바라보십시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10,20)
'하나인 성탄과 죽음!'
오늘 복음(마태10,17-22)은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열두 사도들에게 '박해를 각오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성탄대축일을 잘 보내셨습니까? 어제 합천성당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2명의 자매님(베로니카, 아나스타시아)과 3명의 형제님(요셉, 보니파시오, 스테파노)이 6개월의 교리를 마치고,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답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주님성탄대축일 다음 날인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의 죽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탄의 큰 기쁨을 나누는 날에 죽음과 순교를 기억합니다. 박해와 순교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주님의 성탄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 우리의 이제와 영원한 구원을 위해 죽으러 오셨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볼 때 성탄과 죽음, 그리고 죽음과 부활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역설이고 신비입니다. 이 신비가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 신비를 통해서 우리도 나의 악습을 끊어내는 죽음의 삶을 살고, 너를 위해 죽는 내어줌의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죽어야 나도 살 수 있고, 너도 살릴 수 있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했고,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고, 예수님처럼 죽어갔습니다.(오늘 독서 참조)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7,59)
'순교의 본질'은 '지금 여기에서 주님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성령의 선물'로 받게 되고, 이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갑니다. 이 성령께서 고난과 박해를 이겨내게 하고, 죽음까지도 이겨내게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됨의 선물'인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에 나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합시다!
(~ 토빗14,4)
송영진 신부님_
<‘스테파노’라는 밀알 하나에서 ‘바오로 사도’라는 열매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그때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사도 6,8-10).”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스테파노에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54-60).”
1) 스테파노 순교자는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 라는 점에서,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순교자이면서,
동시에 ‘승천 후의 예수님’을 증언한 ‘첫 증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순교자입니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하느님 오른쪽에’ 계신다는 증언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스테파노 순교자를 마중 나오셨다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오른쪽’은 ‘하느님과 동등한 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신다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도신경에는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로
표현되어 있는데, 스테파노는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앉아 계신 것과 서 계신 것은, 뜻으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구분한다면, 앉아 계시던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스테파노를 맞이하신 것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셨다고 증언한 것은,
“신앙생활은 결코 헛고생이 아니다.” 라고
증언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를 예고하실 때,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19).”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것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 일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빼앗겼다고,
또는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순교자들은 육신의 목숨을
바쳐서 ‘진짜 목숨’을(영원한 생명을) 얻은 분들입니다.
그러니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은 것입니다.
<순교는,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것을 얻는 봉헌입니다.>
2) 스테파노의 순교 이야기에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언급되어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한 12,24).
모든 순교가 다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이지만,
특히 스테파노의 순교는 그것을 더 잘 나타냅니다.
스테파노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신앙을 증언한 일과
숨을 거두기 전에 박해자들을 용서한 일 등은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영혼에
하나의 밀알로 심어졌을 것입니다.
<‘사울’은 박해자들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해자들이 겉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이,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박해자들의 우두머리였던 사울이 회개하고,
‘바오로 사도’로 변화된 일은,
스테파노가 심은 밀알 하나가 열매를 맺은 일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일이긴 합니다.
그래도 사울은 스테파노의 증언과 순교에서, 사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분명히 큰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3) 스테파노의 순교와 그 순교 후에 일어난 박해는,
‘하느님의 섭리’의 놀라운 작용을 잘 보여 줍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1ㄴㄷ.4).”
박해를 피해 흩어진 신자들은, 달아나서 숨은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복음이 점점 더 멀리 퍼져 나가게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박해자들은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없어지기는커녕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박해가 오히려 온 세상에 복음이 널리 선포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확실히
‘하느님의 섭리’입니다(로마 8,28).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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