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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왜 죄 많은 곳에 은총이 많이 내린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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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07:11 ㅣ No.187455

 

오늘 생활묵상 주제는 사실 개신교 때부터 들은 설교이고 또한 개신교 찬송가에도 '내 영혼이 은총을 입어'로 라는 가사도 있습니다. 개종 후엔 안 불러 다 잊어버렸습니다. 리듬 가락은 머리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게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제가 대단하단 말이 아니고 음악이라는 속성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가사는 생각나지 않아도 그 리듬은 잊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왜 그런지를 신앙 안에서 묵상한 게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것도 한번 공유하겠습니다. 또한 죄와 은총 이 두 화두는 이성적으로 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이해가 가는 듯하다가 또 조금만 지나면 어떻게 죄가 풍성한데 은총이 그런 곳에 내릴 수 있지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되곤 합니다. 그건 왜 그럴 것 같습니까? 

 

이게 "산수나 수학적으로나 1 더하기 1은 2다"처럼 완전히 어느 곳이나 어느 시간이나 구애없이 또한 시공을 초월해서도 그렇고 변함없는 진실인 것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눈으로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벗어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리 표현하면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사실 고백을 하자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왜 그게 현실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이제는 알아냈다고 하긴 좀 그렇지만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단 하나, 살면서 실제 그와 같은 경험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아주 예민하고 면밀하게 분석하며 생활하는 와중에 그게 실제 그렇구나 하고 체감을 할 때 그때 비로소 왜 죄 많은 곳에 은총이 내리는가 하는 그 의문이 풀리게 되는 것이라고 저는 설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넓은 시각에서 보면 이 또한 은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어떻게 죄가 은총이 되냐고 하는 1차원적인 시각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영역인 것이죠. 왜냐하면 역으로 그럼 죄를 많이 지을수록 좋다는 말도 이치에 합당한 말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면 그럴 수 있는데 이 논리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 때문에 사실 죄와 은총의 관계가 아무리 이론과 신학 기타 등등 성경의 말씀으로 설명을 해도 쉽게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게 사실인 것입니다. 이제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이 말이 정말 맞다라는 걸 체험으로 알게 됐습니다. 

 

이 체험은 사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나름 정확하게 이론적으로 알고 어떤 죄를 지었을 때 단순히 이게 왜 죄가 되는지 그 이유를 자신이 터득한 교회의 가르침의 바탕 위에 스스로 양심의 거울로 비추어봤을 때 분명 이성적으로 이때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에 더 나아가 이게 단순히 저지를 수도 있지 하며 그냥 죄에 머물러 있고 아무런 회개나 성찰을 하지 않는 상태의 죄라면 그건 그냥 은총과는 상관없는 죄로만 남게 될 수 있고 이런 죄에서는 은총이 내릴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전제가 성립한다면 역으로 다음 전제도 성립할 겁니다. 죄 많은 곳에 은총이 많이 내린다고 할 때 그때 죄는 다시 반복을 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정확히 알고 그 가르침에 자신이 한 행위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양심의 거울로 비추어 성찰해 인식을 하게 될 때만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좀 더 부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죄 때문에 그냥 죄를 지었구나 하고 죄책감 같은 그런 인식으론 부족하고 그게 예수님이나 하느님 아니면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고 하는 마음이 절절했을 땐 상황이 달라진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절절한 마음이 마음속에서 솟구칠 때 그때 은총이 내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내린다고 표현하면 마치 비가 내리듯이 뭔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알 수 있는데 그렇게 당연히 이미 언어 속에 그런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가 되는 건 당연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조금 아닌 것 같다는 묵상도 해봅니다. 어느 일부분은 맞는데 전적으로는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조금 표현하기도 힘든 부분이긴 합니다만 최선을 다해 저의 생각을 표현해보겠습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이나 예수님께서 "여기 있다" 하고 던져주시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일부러 은총을 주시기 위해 그런 환경을 만드신 게 아니라 죄라는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도 그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스스로 구렁텅이를 탈출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붙들고 가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리며 그때 죄에 빠져 하느님과 예수님,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는 마음을 헤아려드릴 때 마치 더러운 진흙 같은 곳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은총은 그렇게 주어진다고 이해를 하면 좋을 듯합니다. 뭔가 내려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마치 이심전심으로 마음으로 동화되는 것처럼 마음으로 이미 전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아주 따뜻한 이야기나 감동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의 마음속에 따뜻한 느낌이나 감정이 생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을 인용해 표현한다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시는 걸 듣고 난 후에 그들 마음속에 뭔가 뭉클한 걸 느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느낌인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느낌이 하느님으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성모님으로부터 왔다고 인식되면 그게 하나의 은총과 은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왜 죄와 은총은 함께 가는지 조금은 이해가 더 잘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런 걸 짧게 표현했지만 그동안 온갖 시련 속에서 수많은 고뇌를 하며 생각한 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씀드려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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