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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수원 교구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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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1.31)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4,41ㄴ)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
오늘 복음(마르4,35-41)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탄 배 안으로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들이치자, 물이 거의 배에 가득 차게 됩니다. 제자들이 베게를 베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다급히 깨우며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8ㄴ)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4,39)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집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4,40)
거센 돌풍인 풍랑은 세상이고,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풍랑을 잠재우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정말로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고통과 시련은 더 큰 성숙과 부활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을 때, 당장은 아무 이득이 없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좀 지나고 나서 보면, "아~ 그 고통과 시련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내가 이렇게 서 있구나." 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고자 그 많은 고통과 시련의 십자가를 짊어지셔야만 했고, 그 십자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 뜻에 순명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ㄴ)
(~ 1마카6,54)
조욱현신부님_오늘 복음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풍랑’과 그 속에서 함께 계시는 주님을 묵상하도록 이끌어 준다. 예수님께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하실 때, 그것은 단순히 지리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호수의 건너편은 “세상의 현세적 불안에서 저 하느님 나라의 평화로 건너감”이라고 해석한다(Serm. 75,1).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현재의 불안과 한계를 넘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배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 위에서 아무 힘없이 죽으신 주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떠나 계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며 더 큰 신뢰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께서 주무시는 것은 당신이 무력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두려움 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드러내시려는 것”(Homilia in Matthaeum 28,1)이라고 한다. 우리 교회 역시 역사의 바다 위에서 종종 풍랑을 만난다. 외부의 박해, 내부의 분열, 개인의 고통과 신앙의 위기, 그러나 배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한 말씀에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진다. 이는 단순한 자연의 기적이 아니라, 그분이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계시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연을 다스릴 뿐 아니라, 인간 마음의 풍랑도 가라앉힌다.”(Comm. in Matth. 11,6). 우리의 내적 불안과 두려움 역시 주님의 말씀 한마디 앞에서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제자들의 두려움과 믿음의 부족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의 믿음은 어디 있느냐?”(루카 8,25 병행구). 교리서도 가르친다. “시련 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현존과 권능을 확신한다.”(671항 참조).
우리의 삶은 호수 위를 항해하는 작은 배와 같다. 때로는 가족의 아픔, 사회의 불의, 개인의 상처가 풍랑처럼 덮쳐온다. 그러나 주님은 고물에 계시다. 비록 ‘주무시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나 함께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풍랑 없는 인생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너의 마음 안에 풍랑이 일고, 네 안에서 예수님이 주무신다면, 예수님을 깨워라. 곧 믿음을 일깨워라.”(Serm. 63,1). 우리의 인생은 풍랑을 피할 수 없는 항해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자. 배 안에 주님이 계시다. 믿음을 일깨우고 그분께 온전히 맡길 때,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김건태 신부님_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오늘 복음 속의 풍랑 이야기는,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두 가지 측면에서 읽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징적인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서술적인 측면입니다.
먼저, 거센 돌풍으로 뒤흔들리고 있는 호수는 하느님을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불순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강과 호수 또는 바다를 이루는 물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원천이고 생명을 유지하는 절대적인 힘이지만, 동시에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움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호수나 바다의 물은 계속 출렁거림으로써 인간을 불안감에 떨게 하며, 거센 바람 등으로 그 출렁거림이 정도를 더할수록 불안감 또한 비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호수를 잠잠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분은 우주적이며 자연적인 세력을 다스리는 능력만이 아니라, 특히 불순종의 세력, 악의 세력을 지배할 능력이 있는 분임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다가옵니다.
바로 이 예수님에 대하여 바리사이들은 물론 제자들도 많은 질문을 쏟아낸 바 있습니다: ‘이분이 누구신데, 죄를 용서하시는가?’, ‘이분이 누구신데, 병을 낫게 하시는가?’, ‘이분이 누구신데, 만군의 주님께 적대적인 세력, 곧 악마 등 불순종의 세력을 제압하시는가?’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의 적대감을 가라앉히고 치유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어 고백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다음, 이 이야기는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서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감은 우리의 인생, 특히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묘사해줍니다. 예수님은 군중과 함께하시며 가르치시느라 지치신 상태이며, 따라서 쉼의 시간이 필요했기에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때 거센 돌풍이 배를 뒤흔들어 제자들을 불안감에 떨게 합니다. 사실 돌풍의 정도가 정확하게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주무시고 계셨다.’ 하는 언급에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심한 바람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도 외부에서 불어오는 이러저러한 바람도 문제이지만,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내부에서 불어대는 바람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그것이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든 내부에서 솟구친 것이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같은 배 안에 계시다는 믿음만 확고하다면 다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련만, 너무나 자주 잊거나, 또는 예수님의 그 잠을 부재 또는 무관심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답지 않은 해석 또는 판단이 문제입니다.
한편, 사실 오늘의 이 이야기는 당신의 사람들, 곧 사도들을 위한 가르침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배 안에는 현실적으로 예수님과 사도들만이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잊고 싶고 지우고 싶었던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가 바로 사도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들이 주님의 뒤를 이어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전파해 나가면서 내외적인 두려움이 불어닥칠 때마다, 이 이야기를 기억하며 더욱 힘과 용기를 냈을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크고 작은 내외적인 위기 앞에서 때로 갸우뚱하거나 깊은 고민에 빠져드는 것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바로 신앙생활이며, 신앙 성숙을 위한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그렇게 간절하게, 그렇게 소리 높여 청해도 아무런 응답을 내려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주님께, 그래도 주님은 분명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청을 당신의 뜻대로 꼭 들어주시는 분임을 믿어 고백하며, 변함없는 마음으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다져나가는, 뜻깊은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믿는 대로 사는 것.>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5-41)”
1) 이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것을 직접 보았다.” 라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여기서 ‘바람과 호수’는 ‘자연계’를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만물’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낸 시간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는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계속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라고 물었던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요한 20,28).
그리고 그 ‘깨달음’은 ‘믿음과 헌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는
사람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맡겨 드리는 사람입니다.
2) 오늘날의 사람들이 교회를 점점 더 멀리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항상 혼나기만 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구체적인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어야 한다는 것만, 또는 믿음만 강조하면서,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는 강론과 설교가 실제로 너무 많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기만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어떻게 해야 믿음을 키울 수 있는지를 알려 주지는
않으면서 믿음만 강조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잘못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고 꾸짖으려면
해결 방법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말하지 않고 무턱대고 믿으라는 말만 하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혼내기만 하면, 혼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교회를 멀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로와 힘을 받고 싶어서 교회를 찾았는데,
교회가 위로와 격려를 하기는커녕 꾸짖고 혼내기만 한다?
혼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칭찬하는 말씀도 많이 하셨습니다.
-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 <어떤 가나안 여자>
-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 <어떤 백인대장>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
-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 <어떤 가난한 과부>
칭찬받은 사람들의 믿음과 삶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믿는 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려고 노력하면서, 믿는 대로 사는
것이 곧 믿음을 더욱 강하고 굳건하게 키우는 방법입니다.>
4)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 느끼는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겪어 본 사람만 압니다.
실제로 그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믿음으로 무서움을 극복하고 물리쳐야 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함부로 말해도 안 됩니다.
제자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무서워한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잘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살리기로 정하셨다면, 나는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살아날 것이고, 내 목숨을 거두시기로
정하셨다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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