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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하느님 눈을 바라보는 사람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의 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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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을 직접 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얼굴 모습이 어떤지를 아무도 잘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꼭 보고 확인을 해야만 본 게 되는 걸로 인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 예를 드는 것은 적적하지 못해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묵상글에 제목을 올릴 때 사용한 하느님의 눈 할 때 하느님의 눈은 우리의 얼굴에 눈썹 밑에 있는 눈처럼 하느님의 얼굴에 있는 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눈보다 은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은 육체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이건 하느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를 하시는가 하는 가장 뛰어난 존재의 형식과 특성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최상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아니 계신 곳이 없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논리로 본다면 이건 하느님이 한 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모습이 복제된 수많은 하느님이 각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셔야 바로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게 설득력 있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근데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 인간의 눈과 의식 속에 있는 한계 안에서는 맞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눈으로 생각하고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소부재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을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눈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과 같은 그런 눈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상상은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눈이라는 것의 기능은 보는 시각의 기능이 가장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신다고 할 때 그때 바라보시는 눈은 무소부재로 수도 없이 존재하는 하느님의 영이 계시는 곳에서 존재하는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은유법을 배울 때 처음으로 그 개념을 배운 시가 바로 "내 마음은 호수" 할 때 바로 그 호수입니다. 수학적으로는 내 마음과 호수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바로 표현의 방식입니다. 오늘 묵상글에서 언급하는 하느님의 눈도 바로 이런 개념으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이해를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시인은, 내 마음은 호수라고 할 때, 이때 호수는 실제 첫번째 의미는 실제 호수를 상징합니다. 그냥 단순히 자연물인 호수만을 상징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호수는 넓습니다.
즉, 내 마음은 넓다는 것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호수는 맑습니다. 즉, 내 마음은 맑다는 의미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호수 하나를 통해 은유적으로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눈도 이런 개념입니다. 인간의 눈은 보는 기능밖에 없지만 하느님의 눈은 다를 수 있습니다. 들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궤변이냐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궤변이라고 만약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은 영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주 어려운 개념인데 사실입니다.
신학적인 해석을 동원하지 않아도 방금 내 마음은 호수 할 때 호수의 특성을 두 개의 개념으로 나누어서 표현한 것처럼 말입니다. 잔잔한 호수라고 할 때 그땐 시각으로 표현했지만 그 시각 속에는 소리 청각의 느낌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런 하느님의 눈을 의식한다고 할 때 이런 사람은 그 순간만큼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 하느님이 마치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한국처럼 그렇게 떨어져 있어도 말입니다. 인간의 의식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하느님은 바로 인간의 시공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런 사실을 잘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죄라는 유혹에 쉽게 잘 빠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죄에 빠질 환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젖은 종이가 불에 탈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의 눈을 바라보는 사람과 하느님의 눈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은 우리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의식하듯이 하느님께서도 역시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의식하는 그 시간만큼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개념 하나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하느님 체험' 이 표현 이것 저는 아주 쉽게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걸 아주 특별한 사람만 체험하는 신비에 가까운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오늘 올리는 이 묵상글을 잘 이해하시면 특별한 사람만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쉽습니다. 바로 자신이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렇게만 하면 어디에서나 하느님과 항상 동행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초청하는 새로운 방식이 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의 눈을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만 찾으려면 어려울 수 있고 또 잘 못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이 어디에 가장 많이 계시는 줄 혹시 아시는지요?
바로 우리의 이웃과 형제자매 속에 계십니다. 특히나 소외된 이웃과 어렵고 곤궁에 처한 형제들 속에 계십니다. 지금 이 현세에서 그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눈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나중에 우리의 영혼이 가게 되는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뵌다고 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에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미국에 간다고 미국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냐고 하는 질문을 던지면 바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결국 현세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을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나중에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최상의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 유일한 최고의 방법은 내가 이 세상에서 바로 그런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결국 하느님을 나중에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성모님 품에 안길 수 있을 겁니다.
이 묵상글은 단순히 한두 페이지가 되겠지만 제가 그동안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작품인 삼위일체 그 어려운 책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책을 공부하면서 아주 쬐끔 정말 쥐꼬리도 안 되는 그런 얄팍한 지식을 동원해서 한 묵상입니다. 그러니 약간 4차원 같은 소리처럼 들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몇번 천천히 읽어보시면 무슨 느낌인지 그 정도는 와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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