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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 외 3분 신부님 묵상글_2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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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에파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방인 지역인 페니키아의 “티로 지역을 떠나(어제 복음 참조) 시돈을 거쳐 (요르단 건너편)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로 돌아오셨다.” 하고 그분의 선교 여정을 소개하며 열립니다. 이 여정 소개는 예수님의 정확한 방문 장소를 적시해 준다기보다는, (오늘의) 치유 이야기와 (내일의) 빵의 기적 이야기가 갈릴래아 호수 동쪽, 곧 이교도들의 땅에서 펼쳐진 일임을 알리는 구실을 합니다.
이방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한 것”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어느 정도 퍼져 있었고, 또한 어디에나 이러한 선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들이 볼 수 있는 그 자리를 떠나,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복음서 여러 곳에서 확인했습니다. 이는 분명 당신이 구원 능력을 소유하고 계신 메시아임이 밝혀지는 것을 아직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며, 아울러 초월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기적 그 자체에만 집중된 시선, 조심성 없이 호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자칫 이러한 시선이 몸이 불편한 치유 대상자의 인권을 손상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예수님은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이 표현이 당대의 소위 치유 능력자들의 몸짓이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제쳐 두고,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특별히 치유 대상자의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고 계신 예수님을 봅니다. 귀가 막혀 듣지 못하고 혀가 묶여 말을 더듬는 그 서러운 마음마저 치유하고 계신 겁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에파타”(예수님 시대의 언어인 아람어로서, “열려라!”를 의미)라는 말씀으로 막히고 묶인 데에서 이 사람을 풀어주십니다. 곧 해방시켜 주십니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하는 사람들의 환호는 메시아를 예고했던 예언자들, 그 가운데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성취로 이끕니다(이사 35장 참조). 이처럼 예수님은 말씀 하나하나로, 몸짓 하나하나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밝혀나가시나, 이를 알아보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에파타’가 절실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귀가 멀쩡하여 듣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여도, 정작 우리가 듣고 실천에 옮겨야 할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 인색하다면, 진정 ‘에파타’ 은총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혀가 풀려 있어 말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여도, 우리의 입에서 해서는 안 될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정말 ‘에파타’ 은총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아무리 우리의 눈이 밝아서 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여도, 이웃을 나와 동등한 인격의 소유자로 보지 못한다면, 나아가 나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결단코 ‘에파타’ 은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에파타’ 은총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혀를 선사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신앙인다운 모습을 뽐내는, 자랑스러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7,31-37: “에파타, 열려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신 사건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침으로 그의 혀를 만지신 뒤,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제대로 말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 복음 사건을 특별히 세례 성사와 연결해 왔다. 실제로 세례 예식에는 에파타 예식이 있다. 사제가 세례받는 이의 귀와 입을 만지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입술이 되라.”고 기도한다. 이는 곧 믿음의 귀가 열리고, 복음을 전하는 입술이 열리기를 청하는 은총의 표지이다. 교리서도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1235항) 한다.
예수님께서 귀와 혀를 만지신 것은 단순히 병의 원인을 치유하는 차원을 넘어, 영적인 차원을 드러낸다. 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통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믿음은 듣는 데서 시작된다.”(fides ex auditu, 로마 10,17 해설)고 하며, 귀가 닫힌 이들은 곧 믿음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말한다. 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귀가 막히면 혀도 열릴 수 없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참된 증언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에파타”는 단지 한 개인의 치유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초대이다. 닫힌 귀를 열어 말씀을 듣게 하시고, 묶인 혀를 풀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은총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손길은 귀와 혀만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여는 손길이었다.”(Hom. in Matth. 52) 우리의 마음이 세상 걱정과 두려움으로 닫혀 있을 때,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에파타, 열려라! 내가 너의 마음을 열어 내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이렇게 고백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사람들을 듣게 하고, 말 못 하는 사람들을 말하게 하시는구나.”(37절) 오늘 우리도 같은 찬미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다. 나는 말씀을 잘 듣기 위해 귀를 열고 있는가? 내 혀는 주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세우는 말에 쓰이고 있는가, 아니면 험담과 불평으로 묶여있는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에파타”를 다시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각자에게도 선포되는 말씀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귀와 입술,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신다. “에파타! 열려라! 내 사랑과 복음에 네 마음을 열어라. 그리고 세상을 향해 그 기쁜 소식을 전하라.”
우리의 삶이 주님의 은총 안에서 열리고, 우리의 말과 행실이 다른 이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전할 수 있기를 청하여야 하겠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7,37)
'에파타 예식!'
오늘 복음(마르7,31-37)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당신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유아세례식 때 집전 사제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습 그대로 아기의 귀를 만지고 입술에 손을 대면서 주님께서 아기의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시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하게 해 달라는 '에파타 예식'을 거행합니다.
지난 연중 제5주일(2.8)에 함안성당 교중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우리농을 알리기 위한 본당 방문을 시작했습니다.
거룩한 선율에 맞추어 장엄하게 미사를 집전하시는 본당 신부님과 성가대와 함께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는 본당 신자들과 베트남 이주민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도 성가를 참 좋아하고 즐겨 부르고, 잘(?) 부르기도 하는데, 참으로 미사 전체가 감동이었습니다. 주례사제는 선율에 따라 가볍게 춤을 추시면서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이날에 예비신자들을 받아들이는 예식이 있었는데, 주례사제의 말에 따라 인도자들이 예비신자들의 이마와 귀와 입술과 가슴과 어깨와 다른 지체에 십자표를 긋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에파타 예식, 곧 열려라 예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에파타 예식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제대로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에파타 예식 그 자체'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고, 거룩한 미사에 참례합니다.
'우리의 참행복'은 사람답게, 신자답게, 사제와 수도자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에파타에 있습니다. ㅎㅎ
(~ 1마카9,31)
송영진 신부님-<“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1-3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창조 때의 좋았던 상태로 복구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 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이 세상을, 천지창조 때의 상태로
원상복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한 말입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5-6).”
이사야서의 예언을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적용한 것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증언한 것과 같습니다.
2) 요한복음 9장에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1-3)”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고통과 불행의 원인에 대한 말씀은
아니고,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드러내려고 그 사람을
눈멀게 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고통과 불행에서도 하느님의
일이(하느님의 섭리와 자비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사람의 고통과 불행을
그 사람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물론 자기 죄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정말로 억울하게 고통과 불행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에 이 세상이 고장 나고,
이 세상에 고통과 불행이 생겼다는 설명을 들으면,
누구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사실 ‘원죄론’은 인간 세상 현실의 원인을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일 뿐이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일 뿐이며, 우리 인생도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목적지’로 데리고 가려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3) “귀가 열리고”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로,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있게 되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신체장애’에 관한 말이 아니라,
‘말씀이신 분의 강생’에 관한 말이 됩니다.
어쩌다가 인간 세상이 이렇게 고장 났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원죄론은 아직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그런데 원인을 알아낸다고 해서
인간의 힘만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분만이 고장 난 세상과 고장 난 인생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안식일에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일을 했다고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제대로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자비를 간청하는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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