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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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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1-41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은 천주교의 기본교리이자, 사회에서 ‘정의’의 개념을 구성하는 기본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얼핏보기에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이 문장을 역으로 뒤집으면 현재의 상황을 죄에 속박하는 ‘족쇄’가 되지요. 지금 내가 고통과 시련을 겪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자기성찰’의 과정에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고통과 시련을 온전히 받아들여도 그것을 이겨내기가 힘든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매여 있으면 마음 속에 ‘억울함’이 생기고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어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얻을 곳마저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이를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 나머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현재 겪는 고통이 과거에 저지른 죄 때문에 받는 벌이라는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을 바로잡으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유다인들의 심판 논리에 따르면 지금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담을 수 없는 과거에 있기에 내 앞에 끝없는 절망만 남게 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내가 겪는 고통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니, 나를 위한 그분의 선한 뜻과 계획이 무엇일지를 기대하며, 구원에 대한 희망 속에서 지금 이 시간을 기쁘게 보낼 수 있게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처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섭리대로 되기를 희망하며, 그분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내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를 하느님의 선한 뜻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로 만들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이’를 특별한 방식으로 치유하신 것이 그를 그런 특별한 소명에로 초대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 다른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모습은 그의 경우처럼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분의 손길이 닿은 것 만으로, 어떤 사람은 그분의 한 마디 말씀만으로,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 스친 것만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건강해졌지요. 하지만 오늘은 치유의 과정이 여간 복잡하지 않습니다. 땅바닥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흙을 개어 진흙으로 만드십니다. 그 진흙을 그의 눈에 바르시고는, 그 상태로 ‘실로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연못을 찾아가 그 물로 눈에 묻은 진흙을 씻어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몰랐던 그가 군말없이 그분께서 시키신대로 따랐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순명의 결과 앞을 보게 되어 자기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실로암’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파견된 이’라는 뜻이라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에 순명하여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된 그 사람을 당신을 증거하는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신 겁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믿음이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 그는 자신이 입은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뜬 것을 함께 기뻐해주기는 커녕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소란을 피웁니다. 바리사이들은 그에게 정말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본 것이 맞느냐고 의심하고,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눈을 떴느냐고 따집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짓을 했느냐고 캐묻고,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한 것은 율법을 거스르는 큰 죄인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동조를 강요합니다. 심지어 그의 부모는 그런 종교 지도자들의 압박에 부담을 느껴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담대하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며, ‘예’할 것은 ‘예’라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솔직하게 답변하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에게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 주님을 만나뵙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자리잡게 됩니다.
다행히 그의 바람은 곧 이루어집니다. 자신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거룩하신 분이라고 증언했다는 이유로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쫓겨난 그 자리에서 그토록 뵙고자 했던 그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예수님이야 말로 세상을 구원하실 주님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고백하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심으로써,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는’ 심판을 완성하십니다. 태생적 장애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주님의 참모습을 알아보는 영적 눈을 뜨게 된 그와,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뻔히 보이는 엄연한 진실에 눈감아 버린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이 극명한 차이를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보고싶은 대로만 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보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러려니’하고 살아간다면‘눈 뜬 장님’이 되고 말지요. 그러니 믿음 안에서 삶과 세상을 항상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꼭 봐야할 중요한 것을 올바르게 식별하는 눈을,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현존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을 뜨게 해 주시기를 기도 중에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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