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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18일 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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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생명의 말씀
어제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안식일 법을 어긴다고 고발하면서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아버지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당신도 일하고 계심을, 안식일에도 일하고 계심을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이 신념에 찬 말씀이 유다인들을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느님이 자신의 아버지이기나 한 듯, 어떻게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들을 더욱 분노케 한 요인은, 예수님이 아버지와 당신은 협업 관계에 있음을 천명하며, 아들인 당신을 공경하지 않는 행위는 바로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행위라는 사실을 덧붙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생명을 줄 능력이 있는 말씀임을 선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유다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언자들이 힘주어 전했던 하느님의 말씀과 차원이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심으로써 그 조건을 온전하게 그리고 촘촘하게 알고 계신 우리의 형제요 벗이요 스승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토록 철저하게 우리 가슴에 와닿고, 우리의 이성과 지성과 영성 안에서 놀라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모든 복음적 계획을 담고 있고,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품행을 제시하는 산상설교에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요 벗이요 스승이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봅니다. 간음한 여인과 죄 많은 막달레나와 키 작은 자캐오와 배반한 베드로와 회개한 우도에게 건네진 용서와 자비 선언에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요 벗이요 스승이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봅니다. 여러 가지 비유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하느님께 직접 인도하는 빛나는 가르침에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요 벗이요 스승이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활의 영광을 향한 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처럼 당신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는, 고통스럽지만 용기를 주는 경고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요 벗이요 스승이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뜻을 맞추어 ‘일하시는 분’,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 뜻에 따라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말씀과 행적으로 가르치셨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상과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어 실천에 옮기고, 그분의 행적에 따라 행동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투신할 때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실천하는 참 신앙인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찾아 우리의 형제요 벗이요 스승을 뵙고 배우는, 그래서 생명의 말씀을 체득하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요한 5,17-30: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와의 친밀한 일치를 드러내시는 장면이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17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단순한 인간적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직접 참여하는 일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이 보고 그대로 행하신다(19절)고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진리가 드러난다. 첫째, 예수님은 종처럼 단독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사랑의 친교 안에서 순명하는 아들이라는 점이며, 둘째,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을 주는 권능을 아들도 공유하시며, 이는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똑같이 하신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못한 분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아버지와 동등하다.”(Orationes contra Arianos II,18)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21절) 죽은 이를 살리는 권능은 오직 하느님께만 속한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도 이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 이는 단지 라자로와 같은 육체적 부활에 국한되지 않고,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분은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Adversus Haereses IV,5,2)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심판자로서 오신다. 그러나 그 심판은 두려움의 심판이 아니라, 믿는 이에게 이미 주어지는 구원이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이미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24절)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이며, 불신은 이미 스스로 심판을 받은 것이다.”(De Spiritu Sancto I,17) 예수님께서는 끝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30절)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히 일치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듯, 우리 또한 성령 안에서 그분의 뜻에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생명과 심판의 주님이시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일 때, 이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며, 받은 생명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ㄹ) '예수님을 닮자!' 오늘 복음(요한5,17-30)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중에서 마음에 더 다가오는 말씀들을 이렇게 적어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5,17)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5,19)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5,21)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5,24)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5,25)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씌운 죄명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율법 파괴죄'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하느님과 자신을 대등하게 여겼다는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안으로 파견된 분이십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주시기 위함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뜻에 충실했을 뿐이고, 그 뜻을 사람들에게 알렸을 뿐인데,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무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가 낳은 결과입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이제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분명한 길이자 표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너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살기 위해서, 이제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부르심에 응답했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는 것'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지금이 바로 그때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24-30).”
1) 이 말씀들을 간단하게 줄이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은 곧 아버지 하느님의 심판이고, 예수님께서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것은 곧 아버지 하느님께서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
2)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이라 해도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다.”(“하느님이신 분이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작업을 마치시고 나서 ‘이렛날에’ 쉬셨는데(창세 2,2), 그것은 창조 작업에 대해서이고, 이 세상을, 또 인간들을 보살피는 일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하신다는 것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기본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만일에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의 사랑이 중단되면? 그 순간 우주 전체가 망할 것입니다. 바로 그처럼 ‘예수님의 사랑’도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멈추시면, 인간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향한 길을 잃는 것은, 멸망을 향해 간다는 뜻입니다.
3) 24절의 “내 말을 듣고”는, “나의 가르침을 새겨듣고, 들은 대로 실천하고”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표현으로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인데, 뜻으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사람.> 여기서 ‘듣다.’ 라는 말과 ‘믿는다.’ 라는 말에는 모두 ‘실천하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니고, 믿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종말의 날에 멸망당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입니다. 이 말씀에서 ‘심판’은 ‘멸망’을 뜻합니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된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그때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어떤 이유로 신앙생활을 중단한다면, 그래서 그 ‘완성’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이미 얻은 생명도 잃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4) 25절의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라는 말씀에서 ‘죽은 이들’은 ‘죽어야 할 운명 속에 있는 이들(모든 사람)’이고,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살아날 때가 온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는,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때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그날이 오면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종말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믿고, 지금 회개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과 가르침들을 믿고 실천하면서 살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다 보면 지칠 때도 있고, 지루할 때도 있고, 유혹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고, 의욕을 잃는 등... 큰 위기를 누구나 겪게 되는데,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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