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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24일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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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당신이 누구요?”
얼마나 이해력이 떨어졌으면,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기에 이를 수 있었을까 자못 궁금합니다. 실은 이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열고 닫음의 문제일 것입니다. 복음저자 요한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질문을 이 자리에 삽입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완고한 마음이 한 인간을 어디까지 휘어버리게 할 수 있는지 드러내려는 의도가 역력합니다. 한편, 이 질문 속에서 우리는 예언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놓으실 것이라는 예언을 봅니다. 마치 대사제 가야파와(요한 18,14) 총독 빌라도가(요한 19,22) 그렇게 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완고한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성경에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넘어,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삶, 곧 영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것이 육체적 죽음이든 영적 죽음이든, 이러한 죽음을 생명으로 이끌 능력을 지니고 계시지만,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임을 믿어 고백함이 전제됩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위’가 아니라 ‘아래’의 삶, 곧 ‘세상’에 속한 삶을 고집할 때, 참 생명에 이른다는 것은 요원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그러니 그들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참되게 받아들이는 삶만이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벗어나게 해주지만, 마음을 닫아버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그분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길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성자이신 예수님을 믿어 그분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 곁으로 다가서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그들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결국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의 모든 질문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 안으로 규합됩니다: “당신이 누구요?” 예수님은 궁극적인 이 질문에 지금까지 말씀과 행적으로 분명하게 답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마음의 문을 열어 당신을 알아보고 믿을 수 있도록 최후의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십자가에 들어 올려짐, 십자가상 죽음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며, 그것이 바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성부의 뜻임을 밝히십니다. 말씀 하나, 행적 하나, 어느 것이나 성부의 뜻을 따르는, ‘그분 마음에 드는 일’임을 선포하십니다. 이처럼 믿음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이며,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따르신 분임을 알아듣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당신이 누구요?”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한 희생제물로 바쳐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 성부로부터 파견되신 분입니다. 그러하기에 십자가상 희생은, 아니 ‘십자가’는 세상과 인류 구원의 표지, 세상과 인류 사랑의 징표입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시작한 오늘 하루, 우리의 말과 행동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구원의 표징이 되고 사랑의 징표가 되는, 그럼으로써 “당신이 누구요?”라는 질문에 구체적이며 적극적으로 응답해 나가는, 거룩하고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24절)라고 유다인들에게 단호히 말씀하신다. 주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이는 결국 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이다. 그러나 이 경고는 단순히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예수님을 진정한 구세주로 받아들일 기회가 주어져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찾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25절)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25절)라고 대답하시며, 당신이 바로 “한 처음에 계셨던 말씀”(요한 1,1)이심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그들은 그분을 찾았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찾지 않았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38,2)라고 말한다. 주님을 올바른 마음으로 찾지 않는다면, 결국 진리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28절)라고 하신다. 여기서 “들어 올림”은 바로 십자가를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말씀을 해설하며, “바로 십자가 위에서 그의 신적 위엄이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Homiliae in Ioannem 52,1)라고 했다. 사람들에게는 치욕처럼 보였던 십자가가, 사실은 예수님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29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성자와 성부의 깊은 일치를 드러내는 말씀이다. 성 이레네오도 이를 가리켜 말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Adversus Haereses IV,14,1)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단순한 협력 관계가 아니라, 존재와 뜻의 완전한 일치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유다인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진다. 우리는 언제나 순간순간, 예수님을 맞이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교리서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완전한 자유의 행위를 드러내셨다.”(616항)라고 한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이시므로,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심판하게 된다.”(678항)라고 한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에는 패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른 방식으로 찾고 믿을 때, 우리는 죄 안에서 죽지 않고, 그분과 함께 생명에 이르게 된다. 이 사순 시기 동안 우리 각자가 순간순간 다가오시는 주님께 올바른 응답을 드리며, 십자가 안에서 드러난 그분의 참된 신원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청하여야 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ㄴ) '너를 단죄해서는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요한8,1-11)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요한8,4)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시다가,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ㄴ) 예수님께서는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 그들은 왜 떠나갔을까? 왜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을까?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것은 그들의 죄를 쓰지 않았을까? 그래서 죄가 많은 나이든 자들부터 떠나가지 않았을까? 어느 어머님은 말합니다. "사는 게 죄여!" 살면서 더 나아지고,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자리에서 더 예수님을 닮아져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자조 섞인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1.3) 죄인이 죄인을 심판할 수 없고, 단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고,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삶의 자리에서 너를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맙시다! 그리고 죄짓지 맙시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8,11ㄴ)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1.23-24).”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6.28-29).”
1) 이 말씀은,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는 간다.”는, “나는 이제 곧 간다.”이고, 지상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심판의 날이 닥치면 그제야 나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겠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는 동안 회개하지 않고 살다가, 심판 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2)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라는 말씀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회개하지 않으면서 죄 속에서 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라는 말씀과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는, 회개하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에 관하여 더 이야기해야 한다면, 너희의 죄를 심판하는 말밖에 없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많다.’ 라는 말은, 사람들의 죄가 크고, 또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인간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준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믿고,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라는 뜻이고,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3)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리다.” 라는 말은, 원래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나타내는 말인데, 여기서는 십자가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다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보면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 말이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아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곧바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았다면 믿어야 하고, 믿는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과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 깨달음은 쓸모가 없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 대한 보충 설명인데, 십자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이 아니라. 즉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일은 곧 인간 구원이고, 당신의 말씀은 ‘구원의 진리’ 라고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4) 여기서 예수님 말씀들의 핵심 가르침은 “늦기 전에 회개해서 구원받아라.”입니다. 신앙생활은 구원받기 위한 생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곧 회개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회개가 없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창하고 장엄한 전례도, 회개가 없다면 허례허식이 됩니다. 정말로 엄숙한 모습으로 십자가 경배를 한다고 해도, 회개가 없다면 다 헛일이 되고, 시간낭비가 될 뿐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회개하라는 가르침이고 표징입니다. 십자가는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제대로 회개해야만 십자가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부활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은총은 곧 ‘부활의 은총’입니다. 회개는 하지 않고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과 십자가만 보다가 부활을 잊어버리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사순 제5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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