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3일 (금)
(홍) 주님 수난 성금요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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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4월 1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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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4-01 ㅣ No.188830

김건태 신부님_스승님저는 아니겠지요?”

 

어제는 요한복음을 통해 유다의 배반 사건을 목격했다면오늘은 마태오복음을 통해 사건을 들여다봅니다유다의 배반이 어느 정도 계획된 사건이었다는 사실이 수석 사제들과의 흥정(?)을 통해 밝혀집니다몸값으로 합의한 은돈 서른 닢율법에 따르면(탈출 21,32), 어떤 집의 소가 이웃집 종을 받아 죽게 했을 경우 배상해야 했던 금액을 말합니다그러니까 예수님은 이웃집 가축에게 희생이 돼도 은돈 서른 닢이면 아무런 사회적 문제도 일으키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한 현실을 말해줍니다그저 한낱 희생양이 될 것임이 예고되는 순간입니다.

 

성경특히 복음서를 읽다 보면 읽기에 고통스러운 구절들이 많지는 않지만분명히 있으며어제와 오늘 복음 말씀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유다가 한 일을 다시 더듬어보아도 불편함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유다가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그의 행동은 천박하고 야비한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분노할 일은 아닙니다너무 빨리 분노해버리면 우리에게 남는 메시지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비록 유다의 처신이 비열하게 보인다 하더라도인간의 마음 안에 어떠한 것까지 담을 수 있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모든 사람의 마음처럼 악과 죄가 스며들지 말라는 법이 없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곰곰이 살피면서 유다의 행동을 다시 읽어보아야 합니다.

 

유다의 배반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배반 사건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펼쳐졌는지를 보는 일입니다유다가 평소에 배반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면공개적으로 예수님을 거슬러 행동했다면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면오히려 그의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도 있었겠지만전혀 그러한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한편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행동 또한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듭니다예수님은 누가 당신을 배반할지그가 어떤 음모를 꾸밀지 이미 알고 계셨다는 점입니다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우리는 유다에게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을 것이고만찬 장소에 아예 들어오지 못 하게 하거나출입문 가까이에 자리하도록 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처신하십니다당신을 배반할 자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당신과 빵을 나눌 기회를 주십니다마치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유다 스스로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리기” 위하여 출입문 가까이에 자리합니다유다는 결국 회개의 기회를 거부하고 맙니다주님의 강력한 사랑의 눈빛을 스스로 저버리고 압니다베드로처럼 회개하여 주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어둠의 자식으로 전락해 버립니다회개 여부가 유다의 운명을 좌우한 것입니다.

 

다른 동료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님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여쭙는데유다만 스승님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습니다죄인을 포함한 모든 이를 사랑으로 보듬으시는 주님’ 자리에율법을 가르치고 준수를 종용하는 스승님이 앉아 있습니다주님을 배반하는 아무리 큰 죄악이라도 참회하면 용서해 주시는 자비로운 주님’ 자리에율법에 따르면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가르치는 엄격한 랍비가 앉아 있습니다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잘했건 잘못했건 늘 주님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무엇 하나 주님께 내드릴 것 없는 부족함 많은 인생이라 하더라도주님께 돌아가겠다는 의지만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며내일부터 시작되는 성삼일에 들어서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불행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 여정에서 어두운 순간 중 하나를 보여 준다바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스카리옷 유다가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기는 이야기이다유다는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15)라고 묻는다한순간그는 스승을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두고 “유다는 진리를 팔았지만자신을 더 값싸게 팔아넘겼다.(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62,1)라고 말한다그의 마음은 탐욕과 사탄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다결국유다는 돈을 얻었으나자유와 생명은 잃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개”의 집에서 파스카 만찬을 준비하라고 하신다(26,1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그 집은 주님을 맞이하는 믿음의 집이었기에 영광스럽게 되었다.(Homiliae in Matthaeum 80,1)라고 했다우리 각자의 마음이 바로 “아무개”의 집이 되어야 한다주님께서 들어오셔서 성찬을 나누실 수 있도록우리의 내적 방을 깨끗이 준비하는 것이 성주간의 중요한 과제다.

 

예수님은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고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다끝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마저도 사랑으로 대하시며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인간의 몫으로 남겨두신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X,112)라고 말한다혼란 속에서도 유다에게는 빛으로 돌아올 시간이 주어졌다그러나 그는 그 시간을 어둠으로 덮어 버렸다제자들은 두려움 속에 자신을 성찰한다“주님저는 아니겠지요?(22). 참된 제자는 자기 안의 연약함을 직시하는 사람이다그러나 유다는 달랐다그는 “스승님”(23)이라고 부르며예수님을 단순한 인간 스승으로만 여겼다성 예로니모는 “그리스도를 주님이 아니라단순한 스승으로만 고백하는 이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없다.(Commentarii in Matthaeum IV, 26, 25)라고 말한다.

 

유다의 불행은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주는 경고이다탐욕은 신앙을 팔아넘기고교만은 그리스도를 스승으로만 여기게 하며절망은 회개의 길을 닫게 만든다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저는 아니겠지요?(22)라고 물으며희망을 붙잡았다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회개하지 않은 죄인에게는 심판이 있으나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자비가 있다.(Enarrationes in Psalmos 32, 8). 유다는 주님을 판 뒤 절망 속에 어둠으로 사라졌다그러나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주님께 돌아와 빛 속에 섰다성주간을 지내는 우리도 탐욕과 두려움 속에 무너질 수 있지만언제든지 회개하여 주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우리 각자의 마음이 “아무개”의 집처럼 주님을 모시는 성체의 집이 되기를 청하자.

 

이병우 신부님_"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26,24)


'탐욕을 치우는 행복!'


오늘 복음(마태26,14-25)은 '유다의 배신을 전하는 말씀'과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때가 다 되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기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26,15) 유다는 그렇게 은돈 서른 닢을 받고 박해자들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그런 유다 이스카리옷을 두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신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26,24)


탐욕에 눈먼 유다!

돈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 유다!

그래서 참으로 불행한 유다!


우리 안에도 이런 유다의 모습은 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참행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불행을 안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또 하나의 유다, 또 하나의 배신자가 되지 말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꺼질 줄 모르는 탐욕을 내려놓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행복한 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가진 것을 이웃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그것도 되돌아올 것이 없어 보이는 가장 작은 이웃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삶을 살다가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50,5-6)


이것이 바로 탐욕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오늘도 탐욕을 내려놓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행복이 됩시다!

 


송영진 신부님_<“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14-25).>

1)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그때

이미 유다의 배반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요한 6,70).”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버렸을 때(요한 6,66),

배반자 유다의 마음도 예수님에게서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몸은 남아 있었지만 마음이 떠났으니, 그것은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마음이 떠난 것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빵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요한 6,15),

아마도 유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임금이신 예수님 옆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희망.

그런 희망을 품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시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실망’이 배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믿음도 잃게 됩니다.

2) 사제들이 ‘배반의 대가’로 유다에게 준 ‘은돈 서른 닢’은,

아마도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지명수배령’을

내릴 때(요한 11,57) 내걸었던 ‘현상금’이었을 것입니다.

‘은돈 서른 닢’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든지

당시의 기준으로 보든지 간에 별로 큰돈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넘기기로 약속할 때,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고, 사제들이 그에게 준 돈은

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표시가 되었을 것입니다.

3)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사도들의 말은,

“저는 아닙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 혹시 그게 저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 말 앞에 있는 ‘몹시 근심하며’ 라는 말은,

‘몹시 슬퍼하며’ 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에 배반자가 있다는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면서 “혹시 내가 배반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 이상한 점은, “사도들은 왜

유다의 배반을 모르고 있었을까?” 라는 점입니다.

배반자 유다만 따로 떨어져 있었는지, 아니면 유다가

속마음을 철저하게 숨겼는지...

어떻든 사도들이 유다의 배반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때까지는 아직 제대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유다의 말은,

다른 사도들의 말을 흉내 낸 것이고,

“저는 아닙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유다만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렸음을 나타냅니다.

4)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사도로 뽑으셨는지,

그가 배반자가 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뽑으셨는지,

배반자가 되더라도 회개할 것이라고 믿으셔서

뽑으셨는지, 우리는 자세한 상황을 모릅니다.

그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또 유다가 배반한 이유도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반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멸망할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예고된 사람은

유다가 유일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유다도 회개했다면 멸망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면서도 회개는 하지 않았고,

자살함으로써(마태 27,3-5) 스스로 멸망을 향해서 갔습니다.

<사도들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순교자들만큼이나 배교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자만하지도 말고,

계속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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