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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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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요한 20,1-9 “보고 믿었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신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놀라운 사건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날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이유는 완전한 죽음에 빠지셨던 그분이 그 죽음을 극복하고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도 그분을 굳게 믿고 따르면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죽으셨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번째로 그분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수의로 감쌌다는 것은 그의 안에서 타오르던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는 것을,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온전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지요. 두번째로 주님의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이 있습니다. 이 돌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를 상징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시신을 묻은 무덤을 큰 돌로 막아놓았다는 것은 그분께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셨으며 이 세상에서 그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과거의 추억’이 되어 주님과 함께 무덤에 묻혔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의’가, 그리고 ‘큰 돌’이 정말 주님께서 죽으셨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시신을 실제로 감쌌던 천이라고 알려진 ‘토리노 수의’는 그 진위 여부가 확실히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분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장소 역시 교회의 전승 안에서 맞다고 전해지니 그렇다고 믿을 뿐, 주님께서 실제로 그곳에 묻혀 계셨는지는 누구도 완벽하게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객관적 증거’를 찾는 일 자체가 사실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해보라며 그 증거를 요구합니다. 물론 ‘수의’나 ‘큰 돌’ 정도의 증거는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주간 첫날 아침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둡던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그분의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말씀대로 부활하시어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가셨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주님 죽음의 증거였던 ‘큰 돌’이 주님 부활의 증거로 뒤바뀌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반론을 제시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캄캄한 밤중에 몰래 그분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을 훔쳐간 게 아니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분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가 무덤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그분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따로 한곳에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빼돌리고자 했다면 사람들이 못알아보도록 시신을 더 꽁꽁 감쌌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 죽음의 증거였던 수의 역시 그분 부활의 증거로 전환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증거’를 찾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에는 반드시 그 사건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반박 불가능한 100% 객관적인 증거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하신 게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수의와 수건이 남아 있어서 주님이 부활하신 게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들이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증거에서 출발하려 하지 말고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무덤에서 본 것은 돌이나 천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반대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되살아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그에게는 자기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표징’이 된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믿음은 증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그분 사랑의 섭리를 알아보게 만듭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고서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인 것이지요.
주님의 부활을 가리키는 ‘파스카’는 ‘건너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기념하는 것으로 그칠 게 아니라 직접 ‘건너가야’ 합니다. 증거를 보고서야 믿는 믿음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사랑에 조건을 걸고 대가를 요구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마음에서, 내가 먼저, 조건 없이, 제한 없이, 끝까지 사랑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음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본능에 따라 ‘생존’하는 ‘동물적 삶’에서, 우리 모두를 생각하며 하느님 뜻에 따라 ‘현존’하는 ‘하느님 자녀의 삶’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세상 것들에 목숨을 걸고 집착하는 ‘땅의 사람’에서, 하늘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하늘의 사람’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부활이 나와 별 상관 없고 아무 감흥도 없는 ‘이벤트’가 아니라, 나를 참된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주는 ‘삶의 일부’가 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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