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7일 (월)
(백)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전삼용 신부님_ 왜 어떤 이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스크랩 인쇄

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4-26 ㅣ No.18930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 10,27)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일, 착한 목자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에서 아주 곤혹스러운 질문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왜 어떤 이들은 그토록 간절한 주님의 목소리를 죽어도 알아듣지 못할까? 왜 그들은 주님이 가시는 길을 생명이 아닌 죽음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등을 돌릴까?' 하는 점입니다.

오늘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행복'이라고 정의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라고 믿고 있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앞서 가고 양들은 그 뒤를 따릅니다. 그런데 양이 목자를 따르려면 전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가 나를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데려갈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만약 양이 보기에 목자가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거나 사자의 아가리 속으로 끌고 간다고 생각한다면, 그 양은 결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방향은 명확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자아를 죽이고,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의 죽음'의 자리로 우리를 앞서 가십니다. 하지만 자아를 섬기고 자기 주먹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소리는 생명의 노래가 아니라 장송곡으로 들립니다.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수녀님들과 어머니께 "너는 커서 꼭 사제가 되어야 한다"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주님의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 귀에 그 소리는 절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당시 저에게 '결혼하지 못하는 삶'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알콩달콩 사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고 믿고 있던 저에게,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의 삶은 지옥과 같았습니다. 행복의 정의가 '육체의 만족'에 고정되어 있으니, 주님의 목소리는 저를 불행하게 만들려는 악마의 유혹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다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L'Evangelo come mi è stato rivelato』(내게 계시된 대로의 복음)를 읽게 된 것입니다. 그 책 안에서 저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겪는 수많은 고생과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세상적으로는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그들의 영혼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 아닌,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행복임을 말입니다. 십자가가 고통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라는 행복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비로소 사제로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목자의 음성이 들립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부자 청년' (마르 10,17-22 참조)의 사례를 보십시오. 그는 계명을 다 지켰고 영원한 생명을 갈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슬픈 표정으로 떠나갔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행복을 '소유'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손해'로 보이는 한, 주님은 절대로 그에게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편 주해』)

 

그런데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기 시작했다가도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그럴까? 그것은 '내가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주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양들을 이끄시는 방향은 '나의 완전한 죽음'과 '내 안에서 주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 위를 걸을 수 있고,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는 존재, 곧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중간에 반드시 무너집니다.

저도 사제가 되기로 한 이후에도 수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안 돼!’라고 했다면 저는 주님을 따름이 거기서 멈췄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적어도 대죄는 짓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비결은 딱 하나였습니다. 바로 '내가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이다'라는 정체성을 믿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인데 이 하찮은 죄 하나를 왜 못 이기지?'라고 스스로를 대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기가 자신이 언젠가 뛸 수 있는 '인간'임을 믿기에 계속 넘어지면서도 일어나는 것처럼, 저도 제가 하느님임을 믿으니 죄와 싸울 용기가 생겼습니다.

성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큰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요한 21,17)라고 답하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자신이 비록 나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수 있는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보다 주님이 주신 하느님 자녀의 신분을 더 크게 믿었기에 끝까지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끝까지 주님의 양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어야만 합니다. 

전 세계 천재들의 모임인 '멘사(Mensa)'의 회장을 지낸 빅터 세르브리아코프의 이야기는 정체성의 힘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열등생"이라는 평가를 받고 15세에 퇴학당했습니다. 그는 이후 17년 동안 자신을 '바보'라고 믿으며 육체노동자로 떠돌았습니다.

그러다 32세가 되던 해, IQ가 161이라는 검사 결과를 받았습니다. 그는 전율했습니다. '아, 나는 바보가 아니라 천재였구나!' 그 순간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포기했던 모든 일에 '나는 천재니까 할 수 있어'라고 덤벼들었습니다. 정체성이 바뀌면 능력도 따라옵니다. 우리가 "나는 죄인인 인간일 뿐이야"라고 믿으면 평생 죄에 패배하겠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가진 하느님이다"라고 믿으면 죄를 이기고 주님의 목소리를 끝까지 따르는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출처: Victor Serebriakoff, 『IQ: A Smart History』)

이를 위해 예수님은 먼저 작업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인 9장에는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눈을 뜨게 된 그에게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아주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이나 원문을 보면 그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라고 말하는데, 이것의 헬라어 직역은 "Ego Eimi", 즉 하느님의 고유한 성호인 "나는 있는 나다" (요한 9,9 참조)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의 시력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가 '내가 바로 하느님이다'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바리사이들의 그 모진 박해를 뚫고 주님의 양이 되어 끝까지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진흙을 우리 눈에 바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넣어주십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고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더 이상 죄의 노예인 인간이 아니라, 나다(I am)!"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십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를 우상으로 섬기던지, 아니면 믿음이 부족하던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너라. 십자가가 바로 최고의 행복이다!" 이 믿음으로 무장하여, 착한 목자를 끝까지 따르는 복된 양들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50 1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