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9일 (수)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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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신부(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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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4-28 ㅣ No.189332

PS : 이병우 신부님은 매일 아침 5시 15분에 카톡으로 오늘 묵상을 보내 주십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카톡_"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신앙의 신비!'

 

오늘 복음(요한10,22-30)은 '유다인들이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씀'입니다.

 

그토록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온 유다인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10,24) 

 

유다인들은 왜 메시아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을까? 그들이 찾고 있던 메시아, 그들이 만들어 놓고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강하고 힘있는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탄생에서부터 초라한 메시아였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죄 중에 있는 이들에게로 향해 있는 메시아, 마침내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메시아였습니다.

 

당신을 배척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10,25-26)

 

그런데 참으로 아니러니하게도 그 배척이, 그 십자가 죽음이 예수님의 부활로 이어졌고, 그 십자가와 부활로 복음(구원)이 온 세상으로 전해지는 신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죽음으로 시작된 교회의 박해가 오히려 복음(구원)이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퍼져 나가는 신비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메시아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런 메시아를 잘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으로 하느님과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두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유다인들처럼 배척하는 믿음은 아닌지?

한번 성찰해 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조욱현 신부님-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 곧 양 떼와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신다. 또한, 마지막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30절)라는 놀라운 선언을 통해, 당신의 신적 권능과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신다.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참된 양 떼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즉, 믿음은 단순히 지적 동의가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행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양이라면,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28절). 여기서 ‘손’은 권능을 뜻한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를 해석하며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손은 같은 권능이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듯이, 아들의 손에서도 빼앗을 수 없다.”(Oratio contra Arianos III,25) 이처럼 양 떼는 아버지와 아들의 보호 안에 있으며, 그분들의 권능 안에서 멸망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의 절정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30절)라는 말씀이다. 성 치릴로는 이 선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 하나이신데, 단일한 위격이 아니라, 단일한 본성 때문이다. 아들은 본성의 일치를 통해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In Ioannem Commentarius VII,10) 아버지와 아들은 위격으로 구별되지만, 본성으로 하나이시다. 그리고 그 일치 안에서 성령께서 사랑의 유대로 함께 하시어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난다.

 

삼위일체의 일치는 곧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여러 지체로 이루어졌지만,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1코린 12,12 참조) 교리서도 “교회의 일치는 삼위일체의 일치에서 유래한다.”(813항)라고 한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사랑으로 하나 될 때 교회의 참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양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감으로써 이 일치의 공동체 안에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들이다. 주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간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또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30절)라는 선언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며,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오늘 하루도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아버지와 나는 하나

 

오늘 말씀에는 ‘성전 봉헌 축제’라는 축제 하나가 언급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은 두 번 건축됩니다. 하나는 기원전 10세기 중반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첫 번째 성전이나, 이 성전은 기원전 6세기 초엽 바빌론 제국에 의해 파괴됩니다. 상당 기간의 바빌론 유배생활을 마치고 귀환해서 6세기 말엽 즈루빠벨 시대에 두 번째 성전이 건축되나(흔히 ‘제2 예루살렘 성전’이라 불림), 이 성전 역시 예수님 시대를 지나 서기 70년경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됩니다. 이후 성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두 번에 걸쳐 건축되었기에, 그때마다 이를 기념하는 성전 봉헌 축제가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나, 일시적인 축제였습니다(2역대 7장: 에즈 6장 참조). 그러나 오늘 언급되는 축제는 매년 지내오던 연례 축제로서, ‘제2 예루살렘 성전’이 기원전 2세기 중반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기원전 175-164)에 의해 침해된 적이 있었는데, 유다 마카베오 형제들이 맞서 싸워 승리하고 성전을 정화한 다음 봉헌식을 올린 데서 비롯된 축제이며(1마카 4,36-61), 지금도 유다교에서는 ‘하누카’라는 이름으로 키슬레우스달(11-12월) 25일부터 8일 동안 환희의 축제로, 등불을 밝히는 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본디 하느님의 거처는 하늘이지만,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하여 한시적인 지상의 거처로 택하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솔로몬과 즈루빠벨 시대에, 그리고 유다 마카베오 시대에 성전 건축과 관리에 그토록 정성을 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외적 건물로서의 성전과 견줄 수 없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와 계심에도,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해온 유다인들이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청하나, 예수님은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하고 답하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 표징을 통하여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 보이셨지만, 믿음이 없으니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과 표징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임을 거부하기에 급급할 뿐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고 무슨 표징이 더 필요한지 모를 일입니다: “너희가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의 양들이 아니기에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앎’과 ‘따름’은 사랑의 법칙과 여정에서 기본적이며 결정적인 요소이며, 이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로 확인됩니다.

 

유다인들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청했지만, 이에 대한 궁극적 대답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로 확정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과 하나이심은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곧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하는 말씀 속에서도 다시금 확인됩니다. ‘내 손’이 바로 ‘내 아버지의 손’으로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불러주신 사랑의 목소리 덕분에 그분의 양들이 된 사람들이며, 언제나 그 목소리만을 알아듣고 따르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들려올 수 있는 주님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며, 신중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이 날을 꾸며나가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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