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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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말씀을 예언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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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4-29 ㅣ No.189347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요한 12,48-49)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의 결론을 선포하시며 아주 서늘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심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하신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단죄하는 잣대가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설계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주신 '영원한 설계도'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쓰는 1m의 자가 진짜 1m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프랑스 파리 근교에는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만든 '국제 미터 원기'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는 이 '원기'와 대조하여 자신의 정확성을 검증받습니다. 만약 이 원기가 사라진다면, 세상의 모든 길이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 '원기'가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쓰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천 년 동안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하느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영적 원기'이자 '완벽한 설계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잘생기셨거나 말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의 모든 말과 행적이 하느님이 미리 주신 설계도(구약)와 단 0.001mm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말하지 않고 '설계자의 명령'만을 집행하러 오신 분입니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성당은 지붕이 없는 채로 수십 년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설계도는 거대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그 큰 돔을 올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건축가가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때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설계자들의 '원래 의도'를 완벽히 이해했고, 아무도 믿지 못할 새로운 공법(말씀)을 제시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이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인부들이 그의 '말'에 따라 벽돌을 쌓아 올렸을 때, 설계도에만 존재하던 그 불가능한 돔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인부들이 그를 신뢰한 이유는 브루넬레스키가 설계도의 모든 수치를 자신의 몸처럼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구약이라는 거대한 설계도를 들고 오셔서, 그것을 실제로 우리 삶 속에 '성전'으로 완공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분의 말이 설계도와 일치하는 것을 본 자는 그분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기사'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처: 로스 킹, 『브루넬레스키의 돔』)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심판은 '건축 현장'의 원리입니다. 설계자(성부)가 그림을 그렸고, 건축기사(예수님)가 그 설계도대로 "이 벽돌은 여기에 놓으라"고 명령(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부가 "나는 내 마음대로 다른 곳에 놓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합시다.  기사가 그 인부를 미워해서 내쫓는 게 아닙니다. 설계도와 맞지 않게 놓인 벽돌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고, 건물 전체를 망치기 때문에 기사가 내뱉은 그 '명령'이 그 인부를 '부적격자'로 자동 분류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너를 심판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곧 우주의 설계도인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거부한 자는 스스로 '비존재'와 '파멸'의 길을 선택한 꼴이 됨을 의미합니다. 2세기 최고의 철학자였던 성 유스티노는 진리를 찾아 모든 학파를 전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서 한 노인을 만납니다. 노인은 유스티노에게 철학책을 덮고 '예언자들의 기록(구약)'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유스티노는 구약의 설계도를 꼼꼼히 뜯어보았습니다. 특히 그를 전율케 한 것은 수백 년 전의 예언들이 예수라는 인물의 '물리적인 수난 기록'과 소수점 아래 숫자까지 일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인간이 수백 년 뒤의 죽음의 시각, 방식, 심지어 입고 있던 옷의 처분까지 맞출 수 있단 말인가!'라며 경악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설계도가 가리키는 이 기사만이 유일한 진리다!" 유스티노는 설계도의 완벽한 성취를 보았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기사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에게 심판은 기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 자기만의 좁은 철학(가짜 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성 유스티노,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 유스티노가 그토록 놀랐던 구체적인 설계의 성취는 바로 ‘메시아의 옷’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옷을 벗기고 새로 입히는 공정’이었습니다. ① 에덴의 가죽옷과 무화과 잎의 파기 (창세 3,21):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스스로 ‘무화과 잎’(자아의 가짜 자존감)으로 자신을 가렸을 때, 하느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죄인의 수치를 덮기 위해 죄 없는 생명이 피를 흘리고 가죽(옷)을 내놓아야 한다는 최초의 설계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당신의 가죽과도 같은 옷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② 에사우의 옷과 빌려 입은 의로움 (창세 27,15-27): 야곱은 형 에사우의 옷을 입고 아버지 이사악에게 나아가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야곱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가 입은 ‘옷의 향기’를 맡고 축복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짜 장자’이신 예수님의 옷(본성)을 입어야만 하느님 아버지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정교한 예표였습니다. ③ 요셉의 무지개 옷과 구덩이의 수난 (창세 37,23-24):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 요셉은 형들에 의해 ‘긴 소매 옷(무지개 옷)’이 벗겨지고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 옷을 뺏기고 죽음의 구덩이(무덤)에 들어갔다가 온 민족을 살리는 통치자로 부활할 것이라는 밑그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처럼 당신의 아름다운 옷을 뺏기셨고, 그 대가로 형제인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④ 시편의 옷 제비뽑기와 이사야의 고난 (시편 22,19; 이사 53,5):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겉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천 년 뒤 십자가 아래에서 로마 병사들에 의해 사진처럼 현상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옷이 벗겨진 채 모욕당할 것을 설계도에 기록했습니다. ⑤ 그리스도의 옷 벗기심과 우리의 ‘그리스도 입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겨지신 이유는, 당신의 ‘의로움의 옷’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수치스럽게 벗겨지심으로써, 우리에게 신성의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라고 명령했고, 갈라티아서 3장 27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합해지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설계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의 파견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설계도를 몸소 이행하신 분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설계 원리 밖으로 걸어 나가는 ‘자기 심판’의 길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이기에 아버지의 설계도만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라는 존재를 하느님의 설계도 규격에 맞춰 깎아내는 과정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다룬 태생 소경이 "Ego Eimi(나는 나다)"라고 고백했듯, 우리가 설계도대로 완공될 때 우리 또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많은 성서신학자들이 성령을 알레고리적으로, 예언적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면 구원이 없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감시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올가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장 나지 않도록, 우리가 우주의 미아가 되지 않도록 보내주신 '생존 매뉴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는 안다." (요한 12,50). 우리가 오늘 주님의 말씀과 동기화되어 살아간다면, 마지막 날 우리를 찾아올 그 말씀은 무서운 판사가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기분 좋은 '패스포트(Passport)'가 될 것입니다. 설계도와 기사의 완벽한 일치, 그 진리 안에서 구원이라는 건물을 완성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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