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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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사랑을 실천해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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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4-30 ㅣ No.18936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행복의 설계도를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남의 발을 씻어준다고 정말 다 행복해질까요? 어떤 이들은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속으로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나'라며 분노를 삭입니다. 비굴하게 노예처럼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오늘은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가 먼저 '스승이요 주님'이라는 자존감을 회복해야만 발을 씻어줄 때 행복할 수 있는지 그 심오한 영적 원리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행복의 정의: 행복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자존감'의 수치입니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거나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1978년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Philip Brickman)과 그의 연구팀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수백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과,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사람들의 행복도를 장기 추적한 것입니다. 당첨 직후에는 하늘을 날 것 같았고, 사고 직후에는 지옥 같았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과 3개월에서 1년이 지나자, 두 집단의 행복도는 사고 이전의 '기본 수치'로 돌아왔습니다. 이를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 부릅니다. 결국 행복은 외적 사건이 아니라, 내 안의 변하지 않는 '자존감'의 수치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100억이 생겨도 곧 불행해지지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평화를 누립니다. (출처: Brickman et al., 『Lottery Winners and Accident Victims: Is Happiness Relative?』)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유와 명예를 긁어모으려 할까요?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들 내면에 자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텅 빈 사람은 외부의 것으로 자신을 포장해야만 비로소 존재감을 느낍니다. 내가 무언가를 움켜쥐려 할 때, 내 잠재의식은 이미 "나는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부족한 존재다"라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셈입니다. 부족하다고 믿으니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주적인 배경'을 가졌음을 압니다. 주님이 나에게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는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박수에 목매지 않습니다. 이미 최고로 높으니, 기꺼이 낮아져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왕의 여유'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 쉰들러가 울며 "차를 팔았더라면 더 구했을 텐데"라고 한 고백이 사실인지 궁금해합니다. 역사적 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실화에 근거한 진실입니다. 쉰들러는 전쟁 초기 자존감이 낮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돈과 여자, 독일 나치 당원이라는 화려한 명예로 자신의 빈 영혼을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다인들의 비참한 '발'을 닦아주기 시작하며(구출 사역), 돈보다 귀한 '생명의 가치'에 눈을 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실제로 파산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 '레오폴드 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쉰들러는 말년에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공장주로 돈을 긁어모을 때는 매일 밤 불안과 허무에 시달렸네. 하지만 1,100명의 목숨을 위해 내 전 재산을 탕진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가치, 즉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느꼈네. 그때가 내 생애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지." 누군가를 높여주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세상의 종이 아니라 '다 가진 자(Haver)'가 된 것입니다. 다 가진 자가 되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헬퍼스 하이(Helper's High)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주는 자가 더 행복한 이유는, 주는 행위 자체가 '나는 남에게 줄 것이 넘치도록 많은 위대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자신에게 확증해주기 때문입니다. (출처: 토마스 케닐리, 『쉰들러의 방주』; 미츠코 자크, 『오스카 쉰들러의 생애』) 17세기 콜롬비아의 성 베드로 클라베르 신부님은 자존감 전수의 승리를 보여준 성인입니다. 그는 짐승처럼 실려 온 노예들을 씻기며 단순히 봉사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신부님의 전기 작가 앙헬 발투스는 신부님이 가장 행복해했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전염병에 걸려 배설물 속에 누워있던 노예 한 명이 신부님의 손길을 받고 "아, 나도 하느님의 아들이군요!"라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릴 때, 클라베르 신부님은 그 노예의 썩어가는 발을 부여잡고 통곡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주님! 제가 지금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이 형제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저도 제가 누구인지 알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생명을 전하는 행복한 노예입니다!" 이 인용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신부님이 누린 행복은 단순히 착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아니었습니다. 타인에게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심어주어 그를 부활시킬 때, 그를 살려낸 자신 또한 하느님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신적 행복'에 동기화된 것입니다. 상대를 하느님으로 대접할 때, 나 자신이 하느님임이 비로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출처: 앙헬 발투스, 『성 베드로 클라베르의 생애』) 오늘 주님께서 우리 발을 씻어주시는 이유는 "너는 닦여야 할 죄인이 아니라, 내가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할 고귀한 하느님이다"라고 선언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며 여러분의 자존감을 하느님 수준으로 업데이트하십시오. 내가 비굴한 상태에서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봉사를 통해 상대의 인정을 얻어내려는 비참한 '구걸'일 뿐입니다. 그런 세족례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진짜 행복은 내가 먼저 '다 가진 자'임을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당신의 아드님까지 내어주셨는데 내가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이미 하늘나라의 상속자인 '다 가진 자'가 되어, 내 곁의 형제도 '다 가진 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누리는 행복은 지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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