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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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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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06:09 ㅣ No.189375

어릴 때의 일입니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다가 다투게 되었습니다. 덩치가 큰 친구는 제 목을 잡았고, 체구가 작았던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았습니다. 서로 놓으라고 울면서 버티다가 결국 힘이 빠져 손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습니다. 어렸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붙잡고 있으면 고통이 계속되고, 손을 놓으면 평화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목을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이란의 정권을 교체한다고 했습니다. 이란의 미사일 공격 능력을 없앤다고 했습니다. 작년과 달리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즉각적으로 반격했습니다. 미국이 이란의 군사시설을 공격하면, 이란은 미국의 군사 기지를 공격합니다. 미국이 이란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면, 이란은 주변국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하면 이란은 이스라엘의 핵 시설을 공격합니다.

 

어린 시절 저와 친구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금세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은 어찌 그런 이치를 모르고 서로서로 파국으로 몰아가는 행위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단순히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의 에너지인 석유 공급이 무너지면 세계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역사의 시계를 돌려보면 지금의 갈등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란은 미국과 매우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의 산업과 정유 시설은 미국과 서방의 도움으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2015년에는 핵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갈등을 넘어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열렸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와 불신이 쌓이면서 그 관계는 다시 긴장과 대립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란의 전신인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해 주었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키루스를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에스더는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자기 민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 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은 에스더의 청을 받아들여 유다인을 살리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성서 안에서 페르시아, 곧 오늘의 이란은 이스라엘을 살린 나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이유를 인간의 마음 안에서 찾으십니다. 교황님은 사제들과 신앙인들이 빠질 수 있는 세 가지 유혹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영적 세속성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추구하는 유혹입니다. 희생 없이 승리만을 원할 때 우리는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둘째는 숫자에 의존하는 실용주의입니다. 사람을 숫자로 환산하는 유혹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전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가야파의 논리가 오늘도 반복됩니다. 셋째는 기능주의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효율과 계획을 앞세우는 유혹입니다. 기도보다 전략이 앞서고, 믿음보다 계산이 앞설 때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놓치게 됩니다. 이 유혹에 대해 본회퍼 목사님도 깊이 경고했습니다. 목사님은 값싼 은혜를 이야기하며, 십자가 없는 은혜, 회개 없는 용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신앙은 참된 은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마저도 자기 편의대로 바꾸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 모든 유혹의 결과는 하나입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에 갇혀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안의 유혹 때문입니다. 이제 신앙 안에서 다시 배워야 합니다. 욕심을 놓고, 미움을 놓고, 자기 확신을 내려놓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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