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일 (토)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 묵상

스크랩 인쇄

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10:15 ㅣ No.189398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 안에 머물기

 

오늘 복음 말씀은, 제자들에게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밝히신 다음,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신 어제의 말씀에 이어,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이미 그분을 뵌 것이다.” 하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예수님의 간략하면서도 명료한 말씀이 있었음에도 열두 제자 가운데 필립보가 나섭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필립보의 이 질문은,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직접 뵙기를 원했던 구약시대의 모세와 엘리야의 호기로운 요구를 상기시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하느님의 음성이 흘러나온 ‘불과 미풍’이라는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답을 들은 바 있었으나, 진정한 답은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취했을 때와, 성부께서 당신의 아들을 영광으로 빛나게 하신 ‘거룩한 변모의 순간’에 –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한 순간이었습니다!(마르 9,4 등 참조) - 비로소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늘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두 귀로 듣고 행적을 두 눈으로 목격한 필립보 이상으로, 우리도 내밀한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받아들이는 데 부족함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저러한 교회 서적이나 정보를 통해서, 때로는 성경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님을 외적으로만 받아들인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단계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서 멈추는 데에 있습니다.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첫 단계로 삼아, 내면화 과정이 진행되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단순한 지식 획득 차원이 아니라, 관계 형성이나 체험으로 넘어가야 하는 모든 종류의 대상처럼 말입니다. 흔히 내면화의 단계는 마음속 깊이 자리한 애착, 접촉을 갈망하는 욕구, 순간적인 열정으로 귀착될 수 있으나, 더 나가야 합니다. 신앙의 단계이며, 성령께서 이끄시는 단계입니다. 성자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 속으로 들어서게 하는 유일한 힘이며 통로인 성령의 인도로 비로소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성부와 성자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증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이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안에 있다’ 하는 표현은 결국 완전한 일치를 대변해주는 표현입니다. ‘안에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비워야만 합니다. 그 크신 하느님을 이 작은 마음에 모시기 위해서는 온갖 쓸데없는 것들을 비우고 털어버려야 하며, 그 크신 하느님 안에 내가 있기 위해서는 몸집을 최대한 줄이고 낮추려는 자세가 절실합니다. 쉬운 작업은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사랑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든 인간 상호간의 관계든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인간 상호간의 안에 있기’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기’ 과정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성부의 뜻에 따라,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고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오늘 하루 조금 더 비우고 낮추고 내려놓는 자세로 먼저 형제들 안에 머물고, 끝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일치를 드러내시는 장면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며 불안해했고, 필립보는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8절)라고 청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호히 대답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절). 예수님은 단순한 하느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완전한 모습이시다. 바오로 사도도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라고 선포한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곧 아들을 보는 것이며, 아들을 본다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계시자이시다.”(Adversus Haereses IV,6,6). 즉,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10절).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면서도 구별된 위격으로서, 사랑의 관계, 곧 성령 안에서 하나를 이루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 신비를 묵상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사랑하시고, 그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 사랑 안에서 세 위격은 하나이시다.”(De Trinitate XV,17,27). 이 사랑의 일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 구원 안에서 체험되는 신비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12절). 성 치릴로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온 세상을 복음화하고, 많은 이들을 새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In Ioannis Evangelium, lib. 10). 즉, 주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일은 더 큰 차원에서 계속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으로”라는 조건이다. 예수님과 일치된 마음, 아버지의 뜻에 맞는 청원만이 이루어진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합치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In Ioannem Hom. 76,2).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삶을 따를 때, 우리는 이미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와 일치하는 삶 안에 들어간다. 주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알고,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참된 영광을 드리는 우리가 되자.

 

이병우 신부님_"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9ㄷ)

 

'신앙을 지켜낸 이들에게 감사를!'

 

오늘 복음(요한14,7-14)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14,7)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 필립보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말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14,9)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두루 갖추신 분, 곧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다.' 라는 이 중요한 교리가 교회 안에 자리잡기까지는 큰 여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니케아 공의회(325년)라는 여정이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가 걸어간 여정입니다.

 

'공의회는 전 세계 모든 주교들의 모임'입니다.

첫 번째 공의회가 바로 서기 325년에 개최되었던 니케아 공의회인데,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던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한 공의회입니다. 그리고 '아타나시오 성인'은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는데, 큰 노력을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무너지면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가 무너집니다.

 

지금 우리 신앙의 모습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런 물음 안에 머물러 봅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다.' 라는 이 근본 교리가 부정되고 있지는 않은지? 십자가와 부활이신 예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오시고, 그분을 먹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아직도 부활하지 못하는 나는 아닌지?

 

이병우 루카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5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