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3일 (일)
(백)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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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 죽음의 두려움 없애는 법: 더 큰 생명 안에 머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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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5-02 ㅣ No.189408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일입니다. 부활 시기라 부활을 말해야 하는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3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님이 이제 곧 떠나신다니, 그들에게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을 것입니다. 이는 부활이 곧 나의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주님 부활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그건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내 존재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기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낍니다. 반대로 말하면 두렵지 않으려면 '알면' 됩니다. 그렇다면 아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세상과 생명을 관통하는 '법칙'을 발견하면 됩니다. 우리가 처음 가보는 낯선 다리를 건널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다리가 무너질까 봐 벌벌 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수많은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너다니는 것을 보았고, 설계자가 부실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깨닫게 된 '법칙'에서 옵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은 안전하다'는 원리를 경험했기에 처음 건너는 다리라도 두려움 없이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처음 가보는 길 위에서 두려움을 없애려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세워놓으신 '관계의 법칙'을 깨달아야 합니다. 첫 번째 법칙: 모든 생명은 더 큰 생명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사과 하나를 보며 "맛있다"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사과는 '땅'이라는 거대한 생명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죽은 흙덩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영양분 없는 모래밭에서는 사과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땅은 수많은 미생물과 생명체가 태어나고 죽으며 형성된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그렇다면 땅의 그 생명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태양입니다. 태양이 빛을 보내 광합성을 하게 하고, 태양이 비를 만들어 내려주어 땅을 적셨기에 비로소 땅은 비옥해질 수 있었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땅이 죽고, 땅이 죽으면 사과는 맺히지 않습니다. 결국 사과 하나를 베어 문다는 것은, 사과 속에 들어있는 태양의 빛살과 땅의 영양분을 내 몸으로 흡수하여 에너지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사과 안에 태양과 땅이 이미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9)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생명의 연쇄 고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태양과 땅에 전적으로 속해 그 생명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우주의 근원인 아버지를 소유한 것입니다. 출처를 알면 죽음은 더 이상 고립된 소멸이 아닙니다. (출처: 리처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 탯줄의 법칙: 어머니의 품에 머무는 유일한 방식 태중의 아기를 보십시오. 아기가 엄마라는 더 큰 생명 안에 존재합니다. 아기가 엄마에게서 양식을 공급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마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아빠가 벌어오는 양식을 공급받아 아기에게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엄마는 아기를 위해 아빠라는 근원에 철저히 속해야 하고, 아기는 엄마라는 통로에 철저히 머물러야 합니다. 이 '머무름'에는 반드시 '법칙'이 있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자궁이 싫다며 탯줄을 이빨로 물어뜯거나, 배고프다고 엄마의 가슴을 물어뜯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엄마 품에 머물 자격을 잃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계명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분의 품 안에서 튕겨 나가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안전벨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법칙)을 완벽히 지키심으로써 그분 안에 머무셨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의 모든 생명이 아드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 나라의 법을 지켜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안전과 연금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 사시게 되고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복지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습니다. (출처: 에리카 라카르트, 『태내 기억』) 수명의 법칙: 하느님께서 살과 피를 주신 진짜 이유 여기서 우리는 소름 돋는 두 번째 법칙을 마주합니다. "나보다 더 큰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나에게 얼만큼을 주느냐가 나의 생존 기간을 결정한다"는 법칙입니다. 사과는 땅보다 훨씬 수명이 짧습니다. 그 이유는 땅으로부터 자신의 형체를 유지할 아주 일부분의 에너지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수천 개의 알을 낳지만, 대부분 일찍 죽는 이유는 어미가 그 많은 새끼에게 자기 생명력을 똑같이 나누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끼들의 평균 수명은 부모의 발치에도 못 미칩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부모는 자녀 하나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와 전 재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칩니다. 부모가 자신의 생명을 통째로 자녀에게 이양할 때, 자녀의 수명은 부모의 수명과 맞먹게 됩니다. 부모가 가진 만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고, 그분의 '살과 피'를 통째로 내어주셨다는 것은 무슨 표징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수명을 우리에게 그대로 수혈하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이 영원하시니, 그분의 살과 피를 먹은 우리도 그분만큼 오래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이유는 우리가 먹은 양식의 '수명'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가톨릭교회교리서』 1213-1274항 참조) 정체성의 신비: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믿어야 사랑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위대한 선물을 받고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내가 '누구'인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는 존재는 짖고 싶어 하고, 사람이라 믿는 존재는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칙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만 믿으면, 그 사랑은 불가능한 고역이 됩니다. 하지만 내가 성체를 통해 하느님의 유전자를 수혈받은 '진짜 하느님'임을 믿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하느님인데, 고작 이 정도 자존심 때문에 미워하는 게 격에 맞는 일인가?"라는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만큼의 사랑을 하고 싶은 '거룩한 욕구'가 터져 나옵니다. 그 정체성이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살게 하고, 그분 안에 영원히 머물 자격을 확정 짓습니다. 그분처럼 사랑할 수 없다면 그분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이 유일한 법칙이기 때문입니다.(출처: 성 아타나시오, 『말씀의 강생』) 진짜 죽음의 정의: 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뽑히는 것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죽음을 다시 정의합시다. 사과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변화일 뿐입니다. 진짜 죽음은 '뿌리가 뽑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는 이와의 연결이 끊기는 것이 유일한 죽음입니다. 「사례 1: 영화 '그래비티' (Gravity, 2013) - 생명줄을 놓친 자의 공포」 영화 '그래비티'에서 우주 비행사 라이언 스톤(Sandra Bullock 분) 박사는 지상에서 어린 딸을 사고로 잃고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걸어 다니는 시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거부한 채 고독의 진공 속에 자신을 가두고 살았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죽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우주선 밖에서 작업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파편의 습격으로 우주선과 자신을 잇던 '생명줄(Tether)'이 끊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산소는 떨어져 가고, 통신은 두절되었습니다.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 홀로 던져진 그녀는 우주 전체를 소유한 듯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주 미아였습니다. 이때 베테랑 비행사 맷 코왈스키(George Clooney 분)가 나타납니다. 맷은 끊어진 라이언의 생명줄을 대신하여 자신을 그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더 큰 생명의 원천인 '지구'로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을 묶고 있던 연결 고리를 스스로 해체하며 우주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맷 코왈스키의 희생을 통해 라이언은 깨닫습니다. 죽음은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생명의 원천에서 뽑혀 나가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녀가 다시 살기로 결심하고 구조선의 해치를 열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더 큰 생명'인 지구의 인력과 연결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생명줄을 놓치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순간, 우리는 화려한 우주복을 입었어도 영적 질식 상태에 빠집니다. 연결됨이 생명이고, 단절됨이 죽음입니다. (출처: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 '그래비티' 2013) 결론: 마음의 평화는 생명을 주시는 분 안에 머물 때 옵니다 살려면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 안에만 머물면 됩니다. 그러면 그분만큼 삽니다. 그분이 안 보일 때도 있는데 이는 그분이 더 큰 생명을 얻으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리를 마련하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라." 이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사과가 땅에 속하고 땅이 태양에 속하듯,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분께 속하고 그분이 지니신 영원한 생명을 그대로 상속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속함을 믿고 주저 없이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버지에게 속해있음을 믿고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영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수명을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마치 태아에게 탯줄이 끊기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는 '출산'과 같습니다. 뿌리가 박혀 있는 나무에게 겨울(죽음)은 휴식일 뿐이듯, 주님께 정박한 우리에게 죽음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축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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