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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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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내 평화
한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인사말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어 자고 나면 사람이 죽어 나가던 시기 또는 정말 먹고 살기 힘들던 시기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또는 ‘진지 드셨습니까?’ 하는 인사말은, 수면 또는 음식 섭취 문제를 떠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그토록 절실하고 처절한 인사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문가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적극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지역은 중동 지역이라고 합니다. 유다인들의 인사말인 ‘샬롬’은 히브리어로 충만 상태 또는 인간이 모두 바라는 완전한 평화를 의미하며, 회교도들의 인사말인 ‘앗살람 알라이쿰’은 ‘당신에게 평화를’을 뜻합니다. 늘 불안한 지역이기에 ‘평화’에 대한 염원이 인사말로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하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향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새로운 양식의 인사말이 아니라, 당시의 인사말을 인용하시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시는 듯합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말씀하시니,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평화를 의미하는 ‘Pax Romana’나 ‘Pax Britanica’ 또는 ‘Pax Americana’와 같은, 그야말로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평화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이런 평화는 ‘꼼짝 마!’하는 표현을 점잖게 옮겨놓은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평화’라는 단어가 자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다시 말해서 평화는 행복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 행복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평화는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아와,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현존과 늘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입니다. 따라서 평화로운 사람, 곧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며,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는” 사람, 오히려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사람”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성부에 대한 성자의 순명의 관계로서 성부께서는 성자의 순명에 대한 응답으로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또 이 영광이 제자들에게는 생명의 원천이 되는 관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자는 성부께 돌아가심으로 영광의 길에 들어서시며, 이 길은 바로 제자들을 영광으로 이끄는 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다른 표현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그대로 따름으로 비로소 가능한 행복을 말합니다. 철저한 믿음과 성실한 따름에 기초한 평화의 삶, 행복의 삶에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떠한 삶 속에서도,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수난과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려는 용기와 희망을 내려놓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부활 신앙인답게 믿음으로 충만한 평화의 삶을 맘껏 누리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당신의 평화를 남겨 주신다. 이 평화는 단순한 전쟁의 부재나 갈등의 회피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오는 내적 평화이며,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받아들임에서 오는 평화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27절).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세상의 평화는 외적인 안정에 불과하지만, 주님의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평화이시며, 둘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시다.”(Enarrationes in Psalmos; 에페 2,14 의역)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는 평화이며, 원수였던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평화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28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구원이 열리기 때문이다. 성 치릴로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해 올라가신다.”(In Joannis Evangelium 의역) 곧, 주님의 떠나심은 결핍이 아니라, 더 큰 친교와 은총의 시작이다.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30절). 세상의 우두머리, 곧 사탄은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그분 안에서는 아무런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분은 무죄하신 분이시며,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신 분이시다. 성 이레네오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쥐고 있던 자를 묶으셨다.”(Adversus Haereses V 의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아버지께 대한 순종 안에서 이루어진 결정적인 승리였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의 유언은 평화이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에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를 반복하여 제자들에게 주셨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이며, 하느님 나라의 화해와 일치의 표징이다.”(2305, 764, 2819항 요약) 그리스도의 평화는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살아 있는 현실이며, 교회가 세상에서 증거해야 할 표지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평화의 길을 가르친다. 주님의 평화는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곧 참된 자유와 평화의 길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평화를 받아, 그 평화를 지키며, 세상에 평화를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ㄷ)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오늘 복음(요한14,27-31ㄱ)은 '평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평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
'평화'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선물이며,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전하신 첫 선물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19-29 참조)
'평화'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성령의 한 모습인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 하나'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5,22-23)
예수님께서 이런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 성당엘 다닌다"고. '세상이 주는 평화'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아지고, 더 인정 받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전쟁이 없고 폭력이 없는 상태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를 훨씬 뛰어넘는 평화'입니다. '더 가지지 못하고, 더 높아지지 못하고, 더 인정받지 못해도 무너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 안에 더 머물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의 상태인 '마음이 가난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환난이나 시련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평화를 원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평화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세상이 주는 평화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인가?
함께 성찰해 보는 오늘, 어린이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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