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9일 (월)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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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일 가해, 교황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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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nelia2] 쪽지 캡슐

2026-06-28 ㅣ No.190330

[연중 제13주일 가해, 교황주일] 마태 10,37-42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사무엘기 상권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충성을 다했음에도 질투심에 눈이 멀어 자신을 여러 차례 죽이려 든 사울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그의 목숨을 자기 손에 맡겨주셨는데도, 그를 죽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 조금 잘라냄으로써 그를 해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지요.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은 사울이 부족하고 약한 인간일지언정, 자신을 미워하고 박해할지언정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어 뽑으신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다윗이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가 그분께서 뽑으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 겁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그분께서 자기 손에 맡겨주신 이들도 하느님을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의 인품, 조건, 능력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와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특별한 사람이라면 그를 사랑할 이유는 충분한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강조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온전히 하나된 모습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하느님처럼 섬기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먼저 제1독서인 열왕기 상권을 보면 ‘수넴’이라는 고을에 살던 한 여인이 엘리사 예언자를 자기 집에 귀한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따뜻하게 환대합니다. 그녀가 엘리사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아부를 한 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그분을 위하는 일 자체를 큰 기쁨과 영광으로 여겼기에 기꺼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 그녀의 순수한 믿음과 사랑이 하느님 마음에 가 닿았고, 그분으로부터 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께 내어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보상으로 돌려주시는 분이지요. 그녀가 나그네 처지였던 엘리사를 맞아들여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한 것은 그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운 일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자식 없이 쓸쓸하게 살던 그녀에게 ‘생명’이라는 귀한 선물을 내려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서는 큰 온도차가 느껴집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은 일반적인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애착하는 ‘가족’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며, 인간을 향한 사랑에 소홀해 지더라도 당신을 향한 사랑에 전념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들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 위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가치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내 가족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건 사랑의 정도나 우선순위의 문제지만, 내 가족을 하느님 ‘위에’ 두고 사랑하는 건 하느님이 계셔야 할 내 마음 속 자리를 다른 이가 대신 차지하는 ‘우상숭배’의 문제가 되지요. 게다가 이 문장에서 ‘사랑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필레오’라는 동사는 ‘누군가에게 매력과 호감을 느끼고 애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말씀은 사람을 향한 애착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 뿐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 자체도 파괴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지요. 누군가에게 집착할 때 우리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 질투, 실망, 미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은 그와 내가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족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은 가족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관계를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집착하는 것은 그 사람을 믿지 못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다면,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함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게 될 겁니다. 믿음을 통해 나의 사랑이 보다 높은 차원으로 고양되는 것이지요.

 

그런 높은 차원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다른 이를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일 때 조건을 따지거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지요. 즉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고, 서로의 고유한 부분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받아들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데코마이’는 ‘환영하다, 인정하다, 인내하고 참아주다’라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이고 사랑하려면 그를 환대하고 그와 나의 ‘다름’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그와 나의 ‘다름’이 나를 불편하고 아프게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인내하고 참아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참 사랑을 실천한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크고 귀한 보상을 내려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분께서 내리시는 보상은 세월이 흐르면 낡고 사라질 재물 따위가 아니지요. 사랑으로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이면 무려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신다고 하십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모든 것을 충만하게 누리는 거룩하고 복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나는 주님께, 그분을 품고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입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그저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불의의 사고나 재난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기 위해서라면, 부와 명예 같은 대가를 얻기 위해서라면 나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불의와 폭력으로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다치는데도 그저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건 고사하고,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작은 양보와 희생조차 하지 않으려 든다면 나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과 관심으로 눈을 크게 뜨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시는 거룩한 이가 누구인지 적극적으로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사막에서의 시원한 물 한 잔’처럼 소박하면서도 정성스러운 ‘사랑의 선물’을 건네야겠습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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