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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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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칼의 의미!'
오늘 복음(마태10,34-11,1)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와 '버림과 따름'과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역설(paradox)로 다가왔습니다. 죽어야 부활한다는 역설, 참평화는 반드시 정화(회개)를 거쳐야 한다는 역설, 그래서 신앙은 신비라는 역설로 다가왔습니다. 미사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이 역설(신앙의 신비)을 고백합니다.
'칼의 의미'가 '정화의 의미인 회개의 의미'로, 부모와 자녀보다 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힘든 사랑의 의미'로, 그리고 이것이 또한 우리가 날마다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독서(이사1,10-17)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타락한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하더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이사1,13.15-17ㄱ)
고통과 시련 앞에서 기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차이는 '누가 빨리 그 고통을 예수님의 고통으로 연결짓는가?' 그래서 '누가 빨리 그 고통에서 일어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말처럼 쉽지는 않네요.
'칼의 의미를 지닌 십자가'는 늘 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나의 부족한 모습도 보게 되고, 이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십자가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고통과 시련이 나쁜 것만은 아니네요.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시편80,20)
이병우 루카 신부
김건태 신부님_참 평화
비신자들이 우리에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시러 오셨는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러 오셨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분은 평화를 가져다주시고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갈라진 형제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오셨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였음을 입증하는 복음서의 여러 본문을 인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읽는 복음 말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사도들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의 첫 말씀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이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은,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집안 식구가 서로서로 갈라서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예고입니다. 분열을 조장하시는 예수님, 하나 됨이 아니라 갈라서게 하시는 예수님, 어느 누가 이런 예수님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 누가 예수님의 입에서 이런 말씀이 흘러나오리라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분열이 아니라 평화를 주러 오신 분임을 굳게 믿고 있는 우리에게는 오늘 말씀의 자구가 아니라 그 의도에 집중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의 진정한 뜻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데 있지 않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말미암아 분열이 일어날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분명 예수님은 말씀과 행적으로 평화를 주러 오셨으나, 그 평화의 말씀과 행적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분열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자리하게 될 것임을 잘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대나 마태오 복음저자 시대나 지금이나, 어떤 이들에게 예수님은 평화의 장인으로 인식되는가 하면, 어떤 이들에게는 분열을 조장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세상 어디서나 오해와 단절과 다툼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며, 많은 경우 한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임을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정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의 이 가르침을 주시는 의도는, 그러한 오해와 편견과 속단에 굴하지 말고, 주어진 사명 곧 복음전파 사명에 충실하라는 데 있음을 새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모습임을 강조하고자 하십니다. 스승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러한 오해와 편견 속에서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고 선언하기에 이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파견될 제자들이 마음 한편에 새기고 살아야 할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주십니다.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오히려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주님 말씀 전파에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독려하십니다. 오늘 하루, 비록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 행위를 분열을 조장하는 일로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자리하게 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신앙 전달에 최선을 다하는, 보람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 선포가 가져오는 갈등과 참된 제자의 길을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 예수님의 평화는 단순한 세속적 평화가 아니다. 복음은 하느님과 인간, 빛과 어둠, 믿음과 불신 사이의 근본적 선택을 요청한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복음은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드러내므로 자연스레 갈등을 불러일으킨다.”(Moralia in Job, 18,4 요약) 즉,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함께 사는 가정, 사회, 공동체에서 진리 앞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낳는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이는 가족, 자기 자신, 세속적 안전보다 하느님 사랑을 우선하라는 가르침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관계의 척도이며, 그분 안에서의 관계만이 참된 사랑이다.”(Homiliae in Matthaeum, 60 요약) 즉, 제자의 삶은 자신의 습관과 욕망, 나아가 생명까지도 하느님 안에서 희생하는 삶이다. 이때 진정한 생명과 영광이 주어진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신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0-41절) 교회의 전통적 해석은 이 구절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상호 연결된 영적 책임으로 이해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작은 선행이라도 하느님을 위해 행하면, 그것은 하느님께 상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곧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36 요약)
작은 친절, 심지어 시원한 물 한 잔조차 하느님 앞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42절) 여기서 “시원한 물”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의미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상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 속 믿음의 가치에 따른 상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모든 관계를 바라보며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사랑과 자비도 복음 안에서 신앙의 증거가 되며, 하느님께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습관과 악습을 버리는 삶, 세상의 평가보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하는 삶이 참된 제자의 길이다.
세상의 갈등 속에서도 담대하게 하느님을 따르고, 가장 작은 행위 속에서도 믿음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삼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와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하느님께 합당한 삶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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