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일 (토)
(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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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默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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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7-31 ㅣ No.190906

이병우 신부님_<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7.31)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13,57)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오늘 복음(마태13,54-58)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13,54ㄷ.55ㄱ.56ㄴ)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ㄷ)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고향 나자렛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무시당함'을 전하고 있고,

오늘 독서(예레26,1-9)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무시당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타락한 유다 백성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유다의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예레미야 예언자를 붙잡아 놓고 이렇게 무시합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예레26,8ㄴ-9ㄱㄴ)

 

오늘은 예수회를 창설하신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회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널리 전하고 있는 수도회입니다.

오늘 주보축일을 맞이한 예수회 수도회 가족과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결정적 무시당함인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의 이겨냄인 '부활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우리네 삶의 자리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는 늘 크고 작은 무시들이 함께 합니다. 그 무시(십자가) 앞에서 쉽게 흥분하거나 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무시(못마땅해함)가 찾아올 때마다, 나보다 먼저 무시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그 십자가를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7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폭염중대경보가 내려질 만큼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강력한 태풍 돌핀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복음으로 돌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오늘도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옷'을 입고 화이팅 합시다!

 

"좋은 일과 궂은 일, 삶과 죽음, 가난과 부, 이 모두가 주님에게서 온다."(집회11,14)

 

(~ 집회11,3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김건태 신부님_이웃에 대한 새로운 시선

어제까지 우리는 마태오 복음 13장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 말씀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하는 말씀으로 끝맺음하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하는 언급으로 열립니다. 이 두 언급으로 미루어, 복음서 본문의 전개 과정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듦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그 범위를 조금씩 달리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 1620절까지를, 수난과 부활에 관한 일차 예고직전까지를 새로운 단계로 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해오셨듯이, 먼저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하고 놀라운 마음으로 자문하면서도,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라고 합니다. 왜 못마땅하게 여겼을지 궁금합니다. 가르치심에 지혜가 묻어나고 행동하심에 기적의 힘이 함께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말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입니다. 오히려 우리 마을 출신 가운데 한 사람이, 소문을 통해 들었던 대로, 그렇게 유명한 인사가 되어 우리 앞에 서서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고 자랑함이 당연한 모습이어야 할 텐데도 말입니다.

 

사제생활 가운데 많은 부분을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을 위해 애써온 터에, 다음과 같은 경험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새내기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사제로 서품되기까지 함께해오면서, 사목자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 형성과 영적 성장과 지적 수준 향상을 위해 도움을 주면서, 가끔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알던 신학생들이 훗날 보좌신부로 그리고 본당신부로 사목활동을 하면서, 유명 인사(?)로 평가되는 경우였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내가 알던 신학교에서의 그 신학생과 본당 또는 특수 사목 현장에서의 동일한 그 사제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였습니다.


신학생 때는 ‘아니었었는데….’ 하는 경우입니다. 못마땅하게 생각한 적은 없어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맞닥뜨릴 때마다, 두 가지 점에서 생각을 고쳐잡았습니다. 내가 신학생 때의 그 사제를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는 반성과 함께, 사제로 살아가면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지적으로 얼마나 더 노력했을까 하는 지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신부가 수원대신학교 출신임에 오히려 감사하고, 축하의 마음과 함께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성원했던 기억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사제양성자로 함께 일했던 모든 지도신부도 같은 생각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해온 그 예수님과, 소문으로 들은 예수님, 그리고 지금 앞에 서서 권위와 지혜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결국 부정적 판단을 내리기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안타까운 일이며,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하루, 특별히 오래전부터 가까이해온 사람들, 가족들을 비롯한 이웃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들에게서 좋은 점들을 찾아 인정하고 본받겠다는 다짐으로 더 좋은 인간관계를 쌓아나가는,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신다.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지만, 그 놀람은 찬미가 아니라, 시기와 불신으로 변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55절)라는 말은, 그분의 인성과 집안의 배경에만 매달려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한 불신앙의 상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57절)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운명이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음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거부당하신 것은 그분의 비천한 출신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비천했기 때문이다. 교만한 마음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익숙함은 경외를 마비시킨다.”(In Matthaeum homilia 47 요약)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익숙함의 위험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너무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익숙함은 때로 신비를 가린다.”(Sermo 69,3) 즉, 문제는 예수님의 출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시기와 편견으로 굳어 있었다는 것이다. 
 
교리서는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이 믿음을 요구한다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당신 안에서 다가왔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 기적은 또한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 없이는 기적이 드러나지 않는다.”(547-548항 참조) 계시 헌장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평범한 인간 언어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고 가르친다(11항 참조). 나자렛 사람들은 인간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신비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충고한다. “은총은 종종 작은 그릇에 담겨 우리 곁에 다가온다. 그러나 눈먼 이는 그 그릇을 무시하다가, 그 안의 보물을 잃는다.”(Sermo, Adventus Domini 전체 요약)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유혹을 겪는다. 사제나 수도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지? 가족이나 친구의 권고를 “네가 뭘 아느냐?”라고 무시하며, 그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능성을 닫아버리지는 않는지? 일상 속 평범한 사건들을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귀를 막고 있지는 않는지? 
 

예수님께서는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라고 요한 복음은 증언한다. 그러나 바로 이 거부를 통해 십자가의 길이 열렸고, 구원이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주님을 내 일상에서 알아보고 있는가? 아니면 익숙함과 편견 속에서 그분을 거부하고 있는가? 우리의 눈을 가린 시기와 편견을 버리고, 가장 가까운 이웃과 평범한 사건 속에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알아뵙는 믿음을 청해야 하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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