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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신부님 [ 연중 제23주일 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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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가해] 마태 18,15-20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한편으로는 제일 좋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일 힘들고 어렵기도 한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입니다. 좋을 때에는 세상 든든한 내 편이지만, 관계가 틀어지면 잠깐 같이 있는 것도 가시방석 위에 앉아있는 것처럼 힘들지요. 그렇게 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생각없이 내뱉은 한 마디 말에 온종일 마음이 심란하고 괴롭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은 해주겠지’라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질 땐 모든 인간관계가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를 주저앉히는 것도 사람이고, 다시 일으켜 주는 것도 사람이지요. 온 세상이 나에게 등 돌린 것 같을 때 ‘난 끝까지 네 편이야. 나는 널 믿어’라고 말해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됩니다. 좋은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을 함께 나누고 공감할 누군가가 있어야 내가 느낀 그 행복이 비로소 완성되는 느낌이 듭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이처럼 꼭 필요하고 또 중요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화해’를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하여 갈등상황이 발생하면 먼저 그와 단 둘이 따로 만나 잘 알아듣도록 타일러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타이를 때에는 상대방의 마음을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마음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주눅들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곡해해서 듣기도 하고 그로 인해 쉽게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비난하기 전에 먼저 이해를, 단죄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배척하기 전에 먼저 포용을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내가 그로부터 비난과 원망을 듣게 되더라도 서운해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혹시 내가 잘못하거나 부족한 점은 없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결과 나의 실수나 잘못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도 지녀야 하지요. 이런 화해의 과정이 잘 이루어지면 나는 그를 다시 ‘형제’로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런 노력을 했다는 것 자체로 충분히 의미있습니다. 그런 노력이 다른 사람과 더 좋은 관계를 맺게 해주는 자양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차적인 화해의 시도가 실패하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내 편’을 들어줄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가서 그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함께 가야할 사람은 ‘증인’, 말 그대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제3자’의 입장에서 그와 나 사이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그는 ‘욱’하는 주관적 감정에 휘둘렸을 땐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상황을 비로소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잘못한 부분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할 지 그 길이 보이지요. 한편 나 또한 제3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그가 잘못하는 과정에서 혹시 내가 ‘원인제공’을 한 부분은 없었는지, 화가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준 부분은 없었는지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제3자의 중재와 노력이 있으면, 그와 나 둘이서 얘기할 때에는 ‘평행선’만 그리며 도저히 답이 안나오던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게 되지요.
이 정도 선에서 문제가 원만하게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교회 공동체에 공적인 중재를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 말을 잘 안 듣는 고집 센 사람이라도 본당 사제나 수도자가 진지하게 말하면 적어도 듣는 시늉이라도 할 테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해도 듣지 않고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를 ‘이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를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소외시키고 배척하여 ‘이방인’으로 만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슴은 좀 아프지만 그로 하여금 공동체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게 만들라는 일종의 ‘극약처방’이지요. 이런 상황이 되면 그 사람은 교회라는 사랑의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마음아픈 일인지를 느끼며, ‘나만 옳다’ 여기는 독선의 마음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겁니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그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화해하여 다시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잃은 양 한 마리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과 한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절차들이 나 하나만 조용히 참고 넘어가면 끝날 일을 괜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려 일을 크게 만들고, 그에게 나에 대한 앙심만 품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거리를 만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굳이 이렇게까지 하라고 하시는 것은 그와 나 두 사람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는 ‘형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남남’이라면 관계가 어찌되든 상관 없지만, 형제 사이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그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그리고 그 사람을 나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도 너무나 슬픈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소중한 형제와의 관계를 쉽게 놓아버리지 말고 어떻게든 그와 화해하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화해의 필요성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뭐 하나 내세우거나 자랑할 거리 없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 같아도 내가 땅에서 풀어주고 탕감해주는 작은 행동 하나가 ‘하늘’에까지, 즉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 참된 행복을 누릴지 말지를 결정하는 ‘중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내가 내리는 결정 하나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가 그토록 중요한 권한을 지니고 있으니만큼, 기왕이면 미움과 원망으로 상대방을 죄에 매어두는 결정을 하기보다, 용서와 화해로 상대방을 죄에서 풀어주는 결정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곧 미움과 원망, 그리고 죄책감에 묶여있는 나를 풀어주는 결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나에게 선택할 ‘권한’이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 꼭 해야할 ‘의무’인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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