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0일 (목)
(녹)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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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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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9-09 ㅣ No.191777

김건태 신부님_행복과 불행 선언

 

오늘 복음 말씀은 행복과 불행을 주제로 합니다. 오늘 말씀 앞에 서 있다 보면, 아무래도 우리는 마태오 복음의 그 유명한 참 행복에 관한 말씀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마태 5,1-12). 그러나 이 두 본문을 비교해 보면, 문형과 내용에서 유사한 점 못지않게 다른 점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태오 복음보다 루카 복음의 내용이 간결하다는 점과 함께 불행이라는 주제가 덧붙여 있다는 점, 행복과 불행 선언의 대상이 루카 복음에는 이인칭 복수 너희, 마태오 복음에는 삼인칭 복수 그들로 적시되어 있다는 점 등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말씀하십니다. 제자들, 일반 군중과 구별되는, 열두 사도를 포함하여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선 사람들을 가리키며, 예수님은 이들이 좀 더 완전한 제자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가르치십니다.

먼저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미움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의 대상으로 소개됩니다. 마태오 복음이 개인적이며 영적인 차원에서 이 사람들을 불러세웠다면, 루카 복음은 공동체적이며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들을 언급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 등등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기댈 곳이 없는 사람 등을 가리킵니다. 루카 복음에만 등장하는 불행 선언의 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고 지금 칭송받아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그 대상입니다.

 

마태오 복음과 비교하여, 몇 가지 점을 더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행복 선언에서, 마태오 복음이든 루카 복음이든, 그 선언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며, 더구나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하는 문구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불행 선언은 문자 그대로의 불행 선언이라기보다는, 경계와 경고의 말씀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저주나 응벌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또는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루카 복음의 행복과 불행 선언은 분명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며, 영적이 아니라 물리적이며 현실적인 차원을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을 기초 삼아 세워질 교회 공동체와 이 공동체를 책임질 지도자들, 곧 사도들이 지금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어떠한 대책을 세우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일러주시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힘과 용기를 내어 달려 나갈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함을 일러주십니다. 불행 선언에서도 저주나 응벌보다는 경계와 경고에 힘이 실려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구원관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적입니다. 굳이 불가의 표현을 빌린다면, 소승적 구원과 대승적 구원을 아우르는 구원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 개개인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면서 아울러 인류 전체의 구원을 바라시며, 이를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분입니다.

 

 

나 자신은 물론 우리 모두 하늘에서 받을 큰 상으로서의 하느님의 구원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더 노력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들, 특히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봉사하는, 마음 넉넉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참 행복 선언의 말씀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20절). 세상은 부와 성공, 힘과 명예 속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정반대로 가난과 굶주림, 눈물과 박해 안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라고 초대하신다. 이 역설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복음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마음, 곧 영적인 가난을 뜻한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고, 세상 권세와 재물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24절)이라고 경고하신다. 이는 재물 그 자체가 나쁘다는 말씀이 아니라, 재물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할 때 영혼이 피폐해진다는 경고이다. 풍요 속에 살지만, 하느님을 잃어버린 삶은 결국 슬픔과 공허로 끝나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참 행복을 해설하면서,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모든 덕의 기초이며, 교만을 무너뜨리고 하느님께 길을 여는 시작이다.”(De sermone Domini in monte 참조)라고 가르쳤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기에, 하느님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교리서는 이렇게 정리한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라고 선언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그들이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음을 보여 주신다.”(2547항 참조) 사목 헌장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과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1항)라고 강조한다. 즉, 가난은 단순히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비워 드리는 적극적인 태도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인의 삶을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나는 과연 무엇을 첫 자리에 두고 살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아니면 재물과 세상의 성공인가? 나는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 곧 의탁과 겸손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안락함 속에 갇혀 무관심하게 살고 있는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이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참 행복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초대이다. 세상이 주는 행복은 일시적이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앞에서 마음을 비우고, 가난한 마음으로 그분을 모시며, 이웃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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