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6일 (월)
(백)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자유게시판

징그럽게도 질긴 인연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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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9-07-14 ㅣ No.137695

큰비만 오면 나는 공연히 겁이 난다.

내 이름자에 물河자가 있어 그런지 몰라도 물하고 나하고는 인연이 참말로 질긴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곳이 경북 안동군 임하면(臨河面)이라 하여 할아버지께서 泰자 항렬자에 임하의 河자를 따서 내 이름을 지으셨다는데 정작 내가 태어난 집은 오래 전에 임하댐공사로 수몰지구가 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고,

4살 때부터 내 어릴 때 추억들이 몽땅 담겨져 있는 영주시 한절마을, 고색창연한 묵은기와집은 6.25 동란 중에도 끄떡없이 잘 견뎌냈건만 1961년 7월 하룻밤새 무려 230밀리 폭포비가 쏟아져 영주읍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서천 제방이 붕괴되는 바람에 황토물이 들어와 물속에 잠기는 큰 피해를 입고 그 후 수로변경공사로 인해 역시 수몰지구가 되는 바람에 그집 또한 이제는 흔적이 없다.

 

그날 새벽, 사람들이 “나와 보소! 나와 보소! 천방 둑 터지니더!” 하며 외치는, 비명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한달음에 달려 산위로 올라가 서천을 바라보니 S자로 굽이쳐서 돌아가는 강줄기가 바다처럼 넓고 서천제방이 마치 황토물 위에 흐느적거리며 둥둥 떠 있는 명주 치마끈처럼 가늘고 힘이 없어 보였다.

얼핏 보아서는 그 시뻘건 황토물이 금방이라도 치마끈 같은 제방을 삼키거나 해쳐버리고 제방보다 훨씬 저지대인 우리 마을 쪽으로 황토물을 쏟아부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빗줄기는 이미 약해졌고, 우리마을이 생긴 이후 단 한 번도 제방 둑이 터진 일은 없었으니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황토물이 제방을 넘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시뻘건 황톳물이 아니었다. 마치 용광로에서 부글부글 끓는 시뻘건 쇳물이 용기를 넘치면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고, 새빨간 불꽃이 나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덤비는 것도 같아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연이어서 “툭!‘하는 소리가, 마치 밥을 오지게 먹어 헝겊허리띠가 끊어지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먼지가 풀썩 치솟아 오르더니 우리 마을 쪽 제방이 터지는 것이었다.

“아니! 저런! 저런! 아이고!” 등 뒤에 서 있던 동네어른들의 놀라는 소리에 다시 보니까 읍내 쪽 제방도 동시에 터지는 것이었다.

비는 일단 멎어가는 상태였지만 상류에서 내려오는 황토물 기세가 등등해서 더욱더 거칠어 아무래도 큰일이날 것 같다는 어른들 걱정을 들었던 직후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이번에는 황톳물 위로 둥둥 떠내려 오던 초가지붕과 큰 나무들이 읍내와 우리마을을 잇는 콘크리트 다리에 걸치면서 6.25때 수십 대의 탱크가 지나가도 끄떡없던 콘크리트 다리가 우두두둑 소리를 내며 비스듬히 누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

 

그 모든 것이 1~2분 사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임에도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겁에 질려 도망치듯 산을 뛰어내려왔다.

“천방 터졌니더!, 천방 터졌니더!” 소리를 지르며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터진 부분이 더욱 넓어져서 마을사람들이 누구나 눈으로 현장을 볼 수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아침이 오고 있었고, 물은 파도처럼 급하게 밀고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동안, 다 자란 벼들이 있는 마을 앞 드넓은 벌의 논들을 다 채우고 나서, 문전옥답이라고 하는 우리 집 앞 논까지 채운 후에 우리 집 마당으로 마치 눈치를 보듯 하며 야금야금 물이 기어올라왔다.

그때까지 약 두 시간 동안 이부자리며, 쌀, 옷가지 그리고 우선 사용할 그릇 등을 챙겨 보따리를 싸 두었다가 물이 마당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나서 산언덕에 있는 정자로 날랐다. 정자에는 이미 우리 집보다 위치가 낮은 집들이 가져온 이삿짐으로 가득했다.

책이 물에 젖으면 종이가 달라붙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내 책과 형님이 보던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같은 책도 보따리에 싸서 날랐다.

무르팍이 물에 잠기고 심지어 물이 허리에까지 찰 때까지 누나와 고모, 어머니와 할머니 나까지, 온 식구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지고 짐을 날랐지만 하얀 모시적삼 차림의 할아버지께서는 왜들 난리냐고, 물이 절대로 집안까지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사랑마루에 앉아계신 채로 연신 곰방대만 물고 계셨다.

나중에 보니 그런 말씀을 하신 할아버지께서도 예전에 읽으셨던 한서(漢書)와 문집을 책장에서 꺼내 다락방에 벼루상자 같은 것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가급적 높은 데로 올려놓으신 것을 봐서는 최악의 경우를 미리 대비하신 것 같았다.

 

물이 마당에 들어오니 옥수수대궁이며 지푸라기와 천 조각, 심지어 통시(변소)에 있던 변 덩어리까지 둥둥 떠다녀서 만약에 물이 방안에까지 들어차면 참으로 큰일이다 싶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분뇨가 섞인 황톳물은 안마당을 지나 안채 마루로 올라섰고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할아버지께서 앉아계셨던 사랑채마루까지 잠긴 상태로 봐서는 지붕에서 약 1미터 정도만 남긴 채 물이 차올라서 좀 더 떨어져서 바라보면 마치 지붕만 물에 떠 보이는 것 같았다.

다행히 우리 집은 지대가 약간 높아서 그 정도였지 마을의 다른 집들은 여러 채가 이미 완전히 물에 잠겨서 보이지 않았고, 일부는 초가지붕의 꼭대기부분인 용마름나래만 보일 뿐이어서 마치 지붕만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이 마을에서 빠져나간 것은 이틀 후에 황톳물 색깔이 약간 맑아지면서부터였다.

물이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급히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바닷가에 썰물 나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느린 속도로 차츰차츰 집에서 물러나고 마당에서 물러나고, 마당 끝 채전에서 물러나고, 마을 앞 논에서 물러나 시야에서 물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것은 3일이 지난 후였다.

물이 빠진 후 마을에 내려가 보니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하얀 석회 칠을 했던 벽은 벽체 흙이 물을 먹고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다 발라 먹은 생선가시처럼 앙상한 수수깡만 기둥에 붙어 남아 있었다.

온돌방의 구들돌은 방고래까지 무너져 곤죽이 된 바닥에 제멋대로 처박혀있었고 안채와 사랑채 마루는 몸체 전체가 덜렁 들려올려져 천정의 상량 대들보 가까이 올라붙고....변 냄새가 여기저기에서 나고 그야말로 난장판, 며칠 전 우리식구가 살았던 집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한 것이 우리 집은 4대째 내려오는 100년 묵은 기와집이라 기둥과 대들보가 굵고 튼튼해서 몸체는 곧추 바로 서 있었지만 동네 다른 초가집들은 물이 빠져나가면서 집들이 대부분 무너지거나 또는 기우등 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위험했다.

초가지붕이 물을 흠뻑 먹어 몇배로 무거워진 무게를 벽체가 떨어져 나간 기둥으로는 감당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이 빠져 나간 후 마을 앞 논은 모두 벼 한포기 보이지 않는 평평한 모래사장이 되어 있었다. 서천에 쌓였던 모래흙이 마을 쪽으로 휩쓸려 들어와 파란 벼들이 가득했던 논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누구네 논이라는 표시의 논둑경계조차도 보이지 않게끔 평평하게 모래흙으로 덮어버린 것이었다.

비가 멎고 구름마저 걷힌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달이 휘영청 밝자 그 달이 왜 그리 매정스러워 보이던지...

하지만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수심에 빠져있는 것도 아랑곳 없이 며칠 전만 해도 저네 논이었던 평평한 모래밭으로 몰려나와 밤이 늦도록 깔깔거리며 뛰놀았다. 

 

우리 마을 60호 중에 약 50호가 집을 잃었다. 그때부터는 수해 이재민, 대학생인 나는 2학기 등록금을 면제 받았다.

담요와 C 레이숀, 비누 같은 생필품이 배급되었고 밤이 되면 식구들이 여러 집으로 분산되어 잠을 자기도 했다.

다행히 시골인심이라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마을에서 제일 좋은 집에 사랑방을 차지하시고 위문인사차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으셨다.

밤만 되면 집집마다 동네청년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나무기둥을 밧줄에 묶어 여럿이서 잡고서 “앵쿠샤! 앵쿠샤!” 하면서 자기네가 살던 집 기둥을 치는 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처럼 들려 왔다.

집이 위험해서 무너뜨리는 집도 있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집은 반파라고 하여 수리비만 보상한다는 말에 한 푼이라도 보상비를 더 타내려는 욕심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동네청년들 술값만 보태주었을 뿐 한 푼도 득을 더 보지는 못했다.

딴 곳에 대토(代土)를 해주고 새 집을 지어 줄 테니 모두들 마을을 떠나라는 혁명정부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내 어린 추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마을을 떠나야만 했고 1년 뒤 나의 옛집은 수로변경경사로 인해 영원히 물길 속에 잠기고 말았다.

5.16 군사혁명이 있고나서 처음 맞은 전북 남원과 경북 영주의 폭우피해를 시찰하러 나온 혁명정부 수뇌부에서 군 공병대대를 투입하여 영주시의 수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수로변경공사를 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S자로 굽어져서 영주시를 관통하는 서천(西川)이 상류에서 흘러내려와 퇴적된 모래 때문에 하상(河床)이 높아져 계속 수해를 입을 것이므로 높아진 하상을 새로운 시가지로 하고, 지대가 낮은 지역인 우리 마을 쪽의 큰 산을 끊고 물길을 마을 쪽으로 돌려서 낙차를 만드는,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대적은 토목공사를 벌렸던 것이다..


한번만 만나도 지겨운 수해를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후인 1971년에 다시 이번에는 서울의 신용산 철도관사에 살 때 또 만났으니.....물하고 나하고는 인연이 징하게도 질긴 것 아닌가.

당시만 해도 한강은 중지도 서쪽, 그러니까 노량진 쪽에만 물이 가득 흘렀고 용산 쪽은 샛강이라고 하여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물이 없는 백사장이었다. 띄엄띄엄 땅콩이나 고구마를 심은 밭들이 있었고 여기저기 미루나무 밑에는 아베크족들이 데이트를 즐기곤 했다.

샛강에서도 약간 높은 지대인 동부이촌동 쪽에는 80여호의 판잣집들이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 71년 그때가 한창 판잣집을 철거 중에 있을 때였던 것 같은데 그 무렵 연일 계속되는 장마에 한강물이 불어나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하수도가 역류 현상을 일으키는 바람에 삼각지에서부터 용산우체국을 지나 신용산까지 물이 차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한항공에 다닐 때였는데 아침에 통근버스를 타려고 집에서 나오니까 동네 길은 무르팍까지 물이 차올랐고, 차가 다니는 도로에 나오니 물이 허리까지 차서 차량통행이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한번 수해를 입은 경험이 있어 남보다 먼저 이삿짐을 싸서 차에 싣고 지금의 전자상가, 원효로 쪽으로 빠져 나가 친척집으로 피난을 했지만 다행히 집 마당까지만 물이 들어오고 빠져나가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집 자리도 이제는 20층 빌딩이 들어서서 내가 살던 옛집은 흔적조차 없다.


그로부터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인 1984년 9월 4일에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장안동 집에서 또 한 번의 수해를 겪었다. 정말로 물하고는 징그럽게도 질긴 악연이다.

그날은 날짜까지도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 전날 내가 5년간 인도네시아 근무를 끝내고 본사발령을 받아 귀국을 했기 때문이다.

귀국을 한다니까 회사에서 본사로 전하라는 공금과 직원들이 가족들에게 전해 달라고 맡긴 돈 등 무려 3만5천불의 현찰을 내가 가져왔으니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갖다 주려고 대문을 나서려니까 마당에 물이 가득했다.

폭우로 쏟아진 빗물을 장안동빗물펌프장에서 모터를 돌려 지금의 동부간선도로가 지나는 중랑천으로 뽑아 올리는데 모터 몇 개가 갑자기 고장이 나서 위쪽에서 내려오는 빗물과 생활하수를 우리 동네의 배수관이 감당을 못해 역류현상을 일으킨 것이었다.

밤에 잠을 자는 동안 반지하창고는 이미 침수가 되어 19공탄 수백 장이 곤죽이 되었고 그 당시로는 큰맘 먹고 이사물품으로 사 보낸 신형 도시바 세탁기가 영 못 쓰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어쩌랴, 바지를 벗어 가방과 신과 함께 머리에 이고 수영복을 찾아 입고 동네를 빠져 나가 택시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했다.

잊지못할 것은 그 당시 뭔 일인지는 몰라도 북한 김일성이가 쌀과 옥양목을 보내주었는데 쌀은 냄새가 나 떡을 해서 이웃과 나눠 먹고 조선00공화국이라고 찍힌 옥양목은 한 1년 이불호창으로 쓰다가 버린 것 같다.


비가 참 많이 온다.

지나고 보면 그 당시는 야속하고 지겨웠던 일도 세월이 흐른 후에는 옛말을 하듯 추억이 된다.

모쪼록 비 피해를 입는 이들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혹시 이 비에 수해를 입어 힘든 분들이 계시더라도 살다보면 이런 일도 겪느니 생각하시고 다시 일어나 열심히 복구하고 재건하여 세월이 지난 후 옛 이야기 하듯 추억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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