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일)
(백)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자유게시판

이웃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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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4-04-25 ㅣ No.231309

하느님이 낸(창조하신) 모든 이들, 그 이웃들을, 이웃을 나(와 너,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살 것인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부터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할 삶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복음서를 통해 전해진 예수의 삶에는 그런 우리 모두를 위한 가르침과 삶의 모범이 있다
신이며 사람인 존재의 모범은 다소 어려운(따르고 본받기가) 구석들도 많지만 그 신앙의 완성자를 보지 않고서는 사람의 완전함도, 삶의 완성도 이 지상에 있을 리 만무하니 어쨌든 우리 삶의 본과 사표를, 우리를 위한 가르침과 계명을 둥한시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인 우리들은 어부였고 세리였고 열혈당원이었던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실제 우리의 모습들을(예수와 참으로 비교되는) 자주 발견하고 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과 일반적인 삶의 범주에서 우리의 모든 일들을 기획?하고 계획한다
우리가 밤새워 기도라도 할라치면 우리는 그 철야기도를 준비?(일과적으로, 체력적으로, 일상의 사이클에 맞춰, 낮에 너무 피곤하게 굴지 않고 일도 쉬는 등)하고 나서 그 기도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이 고을, 저 마을, 동네방네 다니며(물론 걸어서 도보로 말이다) 그 힘든 복음 선포와 전파, 선을 행하고 치유와 기적을 행하는 여정과 일정을 모두 다 소화하고 나서 또! 그렇게 밤새워 기도를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힘든 일정을 따라 다니느라 녹초가 되어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퍼져 버리는데 말이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들임을 누구도 자기 삶과 행실로 부정할 수는 없다
나(와 너, 우리)는 그런 사람들인 이웃들을, 이웃을 대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에게도 대하고 만나고, 그리고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그러나 예수를 극구(삼 세번은 보통 확증적인 결론으로 본다) 부인한 베드로, 예수를 팔아 먹은 가리옷 유다, 모두 도망간 제자들, 예수의 장례를 치러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준 시몬,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 예수를 그렇게 잡아죽이려고 했던 유다 지도층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예수를 죽이라고 동조한 유다인들, 예수가 고쳐주고 치유해준 눈 먼이들, 귀 먹은 이들, 지체장애자들, 나환자들, 죽었지만 다시 살려낸 이들, 라자로, 마르타와 마리아, 창녀였던 막달라 머리아, 백인대장, 부자청년, 예루살렘의 여인들, 사마리아 여자, 죄인들 등 거의 모든 이들을 말이다
그 중에는 우리가 꺼리고 다소 힘들게 여기는 악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가리옷 유다인데,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과 유다가 무슨 짓을 할 지를 다 알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의식과 감정을 억누르고 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 또한 인간적 심정으로 고뇌하고 토로했다는 기록을 보면 사람으로서의 그 힘든 상황을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때론 극적이기도 하고 그 모든 성격과 욕망에서의 갈등들로부터 사건이 벌어지는 그 과정과 와중에서도 자신의 입장과 사명을 참으로 되새기고 그 모든 것을 대하고 함께했던 예수를 보면 과연 사람이기만 한 것인가가 생각될 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예수가 가리옷 유다를 참으로 불쌍히 여기는, 왜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 극악함에 정체 모를 연민과 측은함을 발동시키는 작가들의 상상과 성격화로부터 꾸며진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막연하고 대책없는 캐릭터들과 같이 그렇게 그런 심정이 발동이라도 되었다면 예수는 자신의 모든 입장과 사명, 그 대의명분을 저버리고 가리옷 유다를 인간적으로 어떻게 한 번 구해 보고자 하는 그 만행을 저지르고 무슨 액션을 취하지 않았을까
나는 예수가 모든 이와 모든 일에 단호하리만치, 칼 같은 성격은 아니라고 본다
예수는 죽은 라자로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으며 그렇게 라자로를 다시 살릴 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면 가리옷 유다에게는 담담히 '가서 네 할 일이나 하라'고 말한 것은 유다는 사랑하지 않아서인가
진정한 사랑은 진실로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자유, 너의 자유, 우리 모두의 자유는 스스로가 충분히 모든 이해와 판단과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있는 만큼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도, 대체할 수도, 대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유다의 지도층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같이 예수에게 적대적인 인간들조차도 자신들의 의지대로 가게 '내버려 두는'? 것은 인간성의 핵심을 살아있게 하는 가운데 세상 속에 모든 것은 있다라는 사실을, 그리고 가리옷 유다도 자기 의지대로 가도록 놔 두고, 베드로도 삼 세 번 완전 부정에 이르는 자기 실존을 드러내도록 하며(베드로는 예수가 너는 나에게 이럴 것이다 라고 말해주었을 때, 아니요, 저는 절대로 그렇게 할 인간은 아니라고 극구 반문했다) 쓸데없이 애써, 필요이상으로 무의미하고 무책임하게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신의 뜻은 분명 그 '모든 것을 합하여 선으로' 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일들,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에서도 이웃들, 이웃과 함께 하게 된다
우리는 그 모든 일에 있어 우리 마음대로, 멋대로 해서도 안 되지만, 우리의 주제와 분수를 넘어서 오바해서도 안 된다
마치 우리가 개입하고 간섭하면 그 모든 일이 뭔가 될 것 같은, 같지 않은 심정적인 바램과 예상을, 그런 기대를 안고서 말이다
그런데 대체로 우리는 서로에게 못할 짓을 한 것처럼, 서로를 못살게 굴고 해치며 망치는 지경으로 곧장 가는 것 같은, 그런 행태를 서슴치 않는데, 대체로 그런 결말로 가는 우리의 상태는 악감정이라 말 할 수 있는 심정이나 악의나 적의라고 말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그런 의도나 감정을 지배적으로 발화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진리를 따르지 않고 정의를 지키지 않는 한 모든 일이 우리 모두에게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 각자의, 모두의 오만함과 무지함은 우리를 그런 상태에 빠지게 하고 우리를 그런 성격과 욕망을 지닌 존재들로 정형화하며 그로부터 우리의 모든 갈등들과 사건들이 불거져 나와 우리의 삶을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는 가리옷 유다에게 그 어떤 쓸데없고 무의미한 의식이나 감정으로, 그 어떤 하찮고 몹쓸 행태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과 사명, 삶의 의미와 가치는 모든 이,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깨닫고 살아야 할 일이다
모든 이는 언제나 그런 은총과 축복으로부터 살아 있다

자기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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