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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성당과 박은종 신부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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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포 [490817] 쪽지 캡슐

2000-03-12 ㅣ No.9156

제목 : 삼각지 성당과 박 은종 신부(1)

                        - 삼각지성당 김 대포 바오로

   < 서   언 >

 

     지난 2월 7일 강남성모병원에서 있은 박 은종 신부님의 영결미사 후 인터넷사이트에는

   박 은종 신부에 대한, 그의 죽음에 대한 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깊은 애도의 표현과 교회에 대한 그리고 신앙인의로서의 자성에 관한 내용과 또 다른 여러

   가지의 글들이었다.

 

   이 글을 적는 본인은 아직 인터넷을 잘 알지 못하여 어떤 내용들의 글이 올라와 있는지  

   무척 궁금해하던 차에 한 교우 형제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글들을 볼 수있었다.

 

   그 중 나의 관심을 크게 끈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박신부님의 죽음의 양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삼각지성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이었다.

 

  나는 1998년 7월 3일 삼각지 성당의 실직자 쉼터에 입소하여 1999년 4월 10일 퇴소한,   

  그리고 입소 중에 카톨릭 교리공부를 하고 1998년 12월 24일 나이 50세로 영세한 사람이다.

 

  또한 나는 1999년 2월 박신부님이 휴양을 명 받고 그해 3월 초, 삼각지 성당을 소리 소문도   

  없이 떠난 후,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7월 7일에야 강원도 황지성당 소속  

  상동공소에서 그를 만나 7월 9일 까지 함께 지냈고, 또 10월 18일 상동공소로 가서 10월

  20일 까지 함께 지내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박은종 신부님의 교회법상 ’불경스러운 죽음’에 대한 누명을 벗기고,  

  또 ’삼각지 성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하는 삼각지 성당 교우들에 대한 다른 성당 교우

  들의 불신에 대한 오해를 (삼각지 성당 교우는 ’사제를 죽음으로 몰아 간 X들’이라는

  누명을 쓰는 것 같아서) 풀어야 하겠기에 이 글을 적어 올린다.

 

  물론, 나는 삼각지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지도 못했고, 박신부님과 오랫동안  

  함께 있은 것도 아니어서 전반적이고도 완벽한 내용을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약 8개월 동안 교회에서, 쉼터에서, 그리고 며칠간의 공소에서의 만남만으로서

 

 <1>보고 생각한 사항, <2>듣고 생각한 사항, <3>짐작하고 생각한 사항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의 이 세 가지 ’생각한 사항’들이 사실에 거의 가까우리란 확신을 갖고 있다.

 

 

<1> 보고 생각한 사항  

 

1. 신부님을 처음 뵌 것은 1998년 7월 1일 오후 2시 경.    노숙자 쉼터에 입소하기 위해  

  수녀님과 면담을 끝내고 최종적으로 입소허락을 받기 위해 신부님께 인사를 드릴 때였다.

 

  신부님이 어디 계시나 하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전혀 뜻밖에도, 나이 어린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이들과 농구공을 갖고 놀고 있던)앳된 청년이  내게 손을 내 밀며,  

  ’반갑습니다. 쉼터에 들어오시게 되어서 고맙습니다.’하였다.

 

 신부님이라면, 으례 나이가 지긋하고 근엄하게 생기신 분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게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2. 신부님은 우리 입소자들에게 계약을 하자며, 입소계약서에 먼저 서명하였다. 그때, 나는

 ’계약은 무슨 계약? 우리는 거저 혜택을 입는 것인데, 있으라면 있고 나가라면 나가야 되지  

  감히 우리가 계약을 하다니 . . .’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후, ’혜택을 주는 쪽이나 혜택을 받는 쪽이나 다 하느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것’

  이며 ’쌍방은 언제나 동일한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한다.’는 신부님의 생각을 알고 나서,

  세상의 방식과는 너무 다른 하느님의 방식( =사제의 방식)에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3. 쉼터의 규정을 자주 어기는 자들을 퇴소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신부님은 반대하시며,

 ’그 형제는 여기서 나가면 아무 데도 갈곳이 없어요.’하고 끝까지 감싸주었다.

 

  그러나 쉼터 식구들의 눈총에 못 이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퇴소한 사람이 생겼으며,

  신부님은 그때마다 남아 있는 우리에게 ’왜 좀더 감싸주지 못했느냐’고 우리를 나무랐다.

 

4. 신부님은 강론 중에 수시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나누어 주라’고

  강조하시고, 외부 단체로부터의 ’생색내며 도와주는 짓들’을 받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옷이 없는 자에게 기꺼이 자기가 입고 있던 옷까지 내어주었다.

 

5. 신부님은 외식 (음식점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것, 교우들이 초대하여 식사대접 하는 것

  등)을 단연코 거절하였다.

 

6. 1998년 여름, 폭우로 성당관리 묘지가 크게 훼손되었을 때, 보수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자,

  본인이 직접 현장에 나가서 약 2주간을 사역하였다. 또한 흐트러진 유해들을 직접 일일이

  씻고 정리, 포장하고 재 입관하여 일을 마쳤다.

 

7. 쉼터 식구들간에 좀 엄격한 사람에게는, 쉼터 식구들은 누구나 똑같은 지위이므로 누가

  누구를 나무라거나 지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나무랐다.

 

8. 강론 중, 신부님은 ’우리 성당에는 똥파리 같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어렵고 가난한

  할머니 신자들이 한 푼 두 푼 헌금하여 모아놓은 성당 재산을 탐내어 모여든 자들’이라고

  말했다.

 

9. 1998년 2월, 신부님의 휴양 결정이 있기를 전후하여,

  

  ①수녀원의 수녀 3명이 모두 철수하였다.(가재도구도 모두철수하였다.)

   *신부님이 내보낸 것이 아니라 수녀님이 스스로--

  

  ②몇몇 사람들의 신부님에 대한 언행이 극히 불손했다.

 

  ③교우들간에 분열 양상이 나타나고 많은 교우들이 신부님의 ’휴양’이 부당하다고

    흥분하였고 주교님께 올릴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④여러 교우들이 탄원서를 가지고 명동성당으로 갔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주교님을 뵙지도 못함.

  

  ⑤주일 오후 4시 30분경 주일학교 어린이 하나가 달려와서, 쉼터(성당 입구에 있음)

    앞에서 나를 보자 ’큰일 났어요, 어른들이 신부님을 막 때려요’했다.

   

    내가 놀라서 뛰어 성당으로 올라가니 신부님은 보이지 않고 몇몇 남자 교우들이 ’만남의

    방’에서 다른 한 남자 교우(신부님을 보호하 려는 신자)를 붙들고 밀치며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⑥그 일 후에 신부님은 저녁 5시 청년미사를 집전했다.

  

  ⑦그 날 후에 나는 낮시간에 자주 성당에 갔지만 신부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신부님은 사제관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이었다.

   

  ⑧나는 편지를 써서 사제관 문 밑으로 밀어 넣었다

 

 

 

        [편지의 원문]

 

 존경하는 박 은종 신부님.

 

 제 평생에 처음 만난 신부님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신 세례자 요한 님 같은   

 분이라서 저는 정말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행복합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시간에 마침 제가 보편 지향적인 기도 1번 (사제 님을 위한 기도)를 할  

 기회를 갖게 되어서, 미사책에 기록된 기도문에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의  

 임무를 다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소서."란 저의 기도를 덧붙였습니다.

 

 신부님, 오늘 설교 말씀처럼 "나설 때와 물러 설 때를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성당(또는 교회당)은 사제(신부 및 목사)들의 『순교지』 이거나 『무덤』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세속적인 신도들을 비판하고 나무라며 하느님께로 인도하다가는 마치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사건처럼 ’믿는다고 자처하는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리거나, 또 너무나 세속적인 신도들과 영합하여 그냥 저냥 살아가다가는 곱게 회칠한

 무덤 속에서 썩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평소 생각이 틀렸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요즘 또 한번 옳았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저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저들이 모르고 있으니, 저들을 용서하십시오."한  

 예수님의 기도를 오늘 저는 감히 신부님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신부님이 주교님으로부터 휴양을 명 받으신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신부님이  

 불명예를 받으셨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늘 신부님께서 강론하신 바 같이,

 하느님께 "떠나라."는 명을 받은 아브람의 경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부님, 혹시 실망하고 사제의 길을 저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들의  

 기우겠지요. ’아브람’이 역경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되셨듯이, 신부님께서는 이 역경을

 통하여, 진정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박은 『박은 종』이 되시길 빕니다.

 

   신부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심을 존경합니다.

 

    - 김 대포   바오로   올림 -

 

⑨이틀쯤 후 성당 마당에서 신부님을 보았고, 내가 신부님께 좀 어떠냐고 인사하였다.

  신부님은 내 편지를 보았으며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수염을 깍지 않은 몰골을 보여서 미안하다고 했으며, 나는 ’신부님은 젊으신   

  대다가 동안이라서 사람들이 얕보기가 쉬우므로 차라리 수염이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아브라함 링컨도 그래서 수염을 길렀으니 신부님도 그냥 길러보시지요.’라고 했다.

  신부님은 아무 대답없이 웃으셨다.

 

⑩신부님은 떠나고 새 신부님이 오셨다. 많은 교우들은 떠난 박신부님을 위해 생미사를  

  끊이지 않고 넣었다. 어디에 계신지도 몰라 안타까워하고 울며 기도하였다. 그러나 새로  

  오신 신부님께 누가 되고 폐가 될까봐 매우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⑪99년 7월 7일 (수) ∼ 7월 9일 (금)

  쉼터에서 같이 생활하던 A씨와 함께 신부님을 찾아갔다.

  아무런 사전 연락 없이 찾아갔으므로 신부님도 긴장하고 나도 긴장하였다. 나는 삼각지

  성당 교우로서 온 것이 아니라 쉼터 가족으로서 왔다고 했다.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신부님은 건강했으며 그 지방 교우들에게 믿음생활 면에서나

   사회생활 면에서나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동네 어린이들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어있었고 노인들에게는 믿음의 지팡이가 되어있었으며

   생활이 어렵거나 일이 많은 집에는 좋은 일꾼이 되어있었다.

 

   신부님은 헌 작업복을 입고 있었으며, 9일 나와 함께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에 갈 때는

   가장 좋은 옷이라고 입고 나온 것도 역시 낡은 작업복이었다. 나는 앞으로 내의며 양말

   등을 기워서 입으리라고 다짐했다.

 

   신부님은, 누가 찾아오는 것이 무척 괴롭다며 절대 오지말라고 하였다.

   태백역 앞 식당에서 짜장면을 먹고나서, 서울에서 짜장면 얻어먹은 것 오늘 갚겠다고

   우겨서 겨우 내가 음식값을 지불했다.

 

⑫10월 16일(토)과 17일(일)은 날씨가 추웠다. 여러 교우들이 낮미사 후에 박신부님을

  걱정하였다. 신부님의 입성이 형편없는 것을 아는 나도 걱정이 되었다.

  

  월요일 아침 일찍, 한 자매님과 동대문 시장에 가서 겨울옷 몇 가지를 사 가지고 나 혼자만

  강원도 상동으로 갔다. 물론 전화도 하지 않고. 함께 가지 못하는 자매님은 눈물을 글썽

  이며, ’꼭 전해 주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저녁 늦게 공소에 도착했으나 신부님을 만나지 못했다. 이웃 성당 신부님과 등산 갔다가  

  밤늦게 오셨다 한다. 화요일 낮에 양지쪽에 빈 라면상자를 깔고 앉아서 둘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 - 서울 교구 신부님들이 여러분 찾아와서 서울로 가자고 하였다는데 왜 가지

  않았느냐   - 교구에서 사제를 정당하게 발령내면 되지 사제가 찾아가서 변명하면

  되겠느냐 - 9월 발령에 신부님이 가리라고 우리가 생각한 자리에 다른 신부님이

  가셨던 대요  -  교구 감찰실에서도 신부님을 보낸 모양이던데, 혹시 서울 교구가

  싫으면 원주교구로 옮기면 어때요 - 교구간의 이동은 쉽지도 않지만 그럴 생각도

  없어요. 무언가 잘못됐다면 원상태로 해놓으면 되지요. - 이제는 오지 마세요,

  나도 여기를 떠날 거예요.- 떠나더라도 겨울은 여기서 나세요,

  2월엔 꼭 발령을 받으세요  . . . )

 

   이런 이야기들을 하였지만, 나는 신부님과 교구사이에는 결코 합일점이 없는 평행선이   

   있음을 느꼈다.

 

   신부님은 <애당초 잘못된 발령이라면 도로 원위치로 돌려놓고 임기가 만료되면

   다른 곳으로 발령 내든지, 만료되기 전이라도 휴양될 확실한 사유가 발생하면 그때  

   휴양을 내면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고,

 

   교구는 교구대로 <이미 발령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네가 원하면 다른 자리로  

   발령을 내 주겠다.>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20일 점심은 뜻밖에도 신부님이 몇몇 할머니 교우들을 모시고 돈까스를 대접했다.

   나는 놀라서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하면서도 맛있게 먹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왠지 눈물이 많이 흘렀다. 맛있는 돈까스를 먹었는데도 . . .

   어쩐지 영영 못 볼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 . .

 

⑬11월 하순, 신부님이 상동공소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12월 중순, 기도 중에 가슴이 몹시 아렸다. 이발소에 가서 면도로 삭발하고 창호지 전지에   

  대자보를 써서 명동성당에 가서 엎드려 기도했다.

 

        

     [대자보 전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야훼께서

     "삼각지 성당에 박은 나의 종, 박은종 신부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대답한 카인처럼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하고 대답해야만 할까요?

 

 

<2> 듣고 생각한 사항

 

   1)박 신부님이 성당에 부임해 왔을 때, 전임 신부님 환송비(회식비 약 30만원)를 결재

     올리자, 우리 성당의 회계잔고가 얼마인데 너댓명이 이렇게 많은 돈을 쉽게 쓸 수

     있느냐고 하며 결제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2)박 신부님은 부임하여서, 나는 절대 식사 초대를 받거나 외식을 하지 않고 사제관에서만

     식사를 할 것이며, 성당내의 행사로 인해 성당 돈을 지출하는 외식은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 동안에 있었던 사목회의 낭비적 행태를 질책하고 사목회를 해산, 성당내의 직분을

    맡는 자는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봉사하는 자라야 하며, 차후 열심히 기도생활 하고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는 자들로 사목위원을 구성할 것이라고 하여 그 동안의 사목위원 및

    직분 맡은 자들과 사이가 나쁘게 되었다고 한다.

 

  3)교우들 중, 할머니들과 경제적으로 가난한 편에 속하는 교우들, 또 봉사를 많이 하는

    교우들은 대부분 박신부님의 사목 방침을 좋아하고 따르나, 그 동안 교회 내에서 행세

    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신부님의 방침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4)신부님은 ’정의구현사제단’에 속한 사제이며, 주교님께도 직언 하는 스타일이라 주교님이

    좋아하지 않으며, 그래서 본당 견진성사(1998년도)때도 주교님이 오셨다가 빨리 가셨다고

    한다.

 

  5)실직자 쉼터 운영, 성폭력 상담소 사무실 제공, 당고개 순교성지 주일 낮 미사 등은 많은

    반대를 무릅쓰면서도 관철했으며, 이웃 개신교와 함께 사용하는 성당 진입로의 가운데

    경계철책은 투표 유효 교인 과반수 이상의 반대로 제거하지 못했다고 한다.

    (쉼터, 상담소, 성지 주일미사는 지금은 없어졌다.)

 

  6)쉼터 운영에 있어, 몇몇 사회단체에서 도움을 주려고 했으나 생색내기 식의 제안이라서  

    거부했다고 한다.

 

  7)1998년 김장 배추를 많이 구해와서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3> 짐작하고 생각한 사항

 

  1)박신부님은 사제적 신념과 원칙에 철저한 분이다.

 

  2)필요하지 않은 곳에 교회의 재산을 쓰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 분이다.

 

  3)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신자들의 마땅한 본분이며, 가난한 자라도 더 가난한 자들을

     분수 껏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4)교회의 직분은 세상적으로 큰소리치는 자가 아닌 믿음에 열심인 자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5)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분 - 세례자 요한같은 분 - 이다.

  

  6)이제껏(50평생) 보아온 성직자들 중에서 진정 성직자다운 유일한 성직자였다.

 

 

만일 어떤 건강하고 시간 많고 무거운 짐도 갖지 않은 젊은 사람이 날씨도 좋은 날에 버스 두세 정거장의 거리를 500원을 내고 버스를 타고 간다면 그는 착한 보통 사람이다.

만일 그가 1500원을 내고 택시를 타고 간다면, 그는 약간 낭비기가 있는 보통 사람이다. 만일 그가 3000원을 내는 콜택시를 일부러 불러서 간다면, 그는 낭비가 심한 좋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 짐을 지고서도 걸어가서 남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한 헌금으로 쓴다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 박 은종 신부님은 바로 이런 훌륭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참으로 언행이 일치하는 사제였다.

 

       

 

 <당부 및 제안의 말씀>

 

  이상의 글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이 결코 어느 개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된다.  삼각지 성당 및 교우들이 왜곡된 의심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적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태가 비단 삼각지 성당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 교우들은 명심하고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요나를 통한 하느님의 경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니느웨와 같이 교회와 교인 모두는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못 박힌 예수님의 뜻이고,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오늘 삼각지성당에서, 서울대교구에서 순교하고 눈보라 속의 지리산에서 발견된 박은종 신부님의 참된 뜻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다같이 ’네 탓이요’가 아닌 ’내 탓이요’를 다짐하자.

 

※ 지난 2월 7일 용인 장지에서 불태우려던 신부님의 유품들 중에서 헌옷 몇 점을 내가 챙겨와서 보관하고 있다. 그냥 불태우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귀한 체취가 배어 있기 때문에 잘 보관하고 있다가 언젠가 그분의 기념관이라도 생기면  . . .

 

또 짧지만 선명하게 살다간 그분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한데 모아 앞날의 교훈으로 삼고 싶다. 그와 직접 마주했든 아니든 간에 뜻 있는 교우들의 모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모임이 있으면 전화주세요 017-285-1199)  

 

 

   기도합시다!

 

  하느님,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한 살로메와 그 목을 친 헤로데를 용서하여 주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과 매달도록 허락한 빌라도를 용서하여주소서.

 

그리고 그 일에 동조하거나 방관한 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용서하소서.

그들 중 하나라도 용서받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결코 저희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니 두렵고 또 두렵나이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 박 은종 사도요한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이오니 그의 영혼을 친히 거두사 당신의 품에서 평안을 누리게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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