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변질된 사랑 /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스크랩 인쇄

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4-14 ㅣ No.171507

+찬미예수님!

 

성모님의 메시지,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지금을 환란의 시대, 어둠의 시대라 합니다.

이 환란의 시대, 어둠의 시대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사랑이 변질된 시대이다.

이미 오래전 성서에서는 사랑이 변질된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디모테오 후서 3장 1절~9절에 보면 마지막 시대의 타락상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때에 어려운 시기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그때 사람들은 이기주의에 흐르고

돈을 사랑하고 뽐내고 교만해지고 악담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고

경건하지 않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남을 비방하고 무절제하고 난폭하고 선을 좋아하지 않고

배신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자만으로 부풀어 있고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할 것이며

겉으로는 종교생활을 하는 뜻이 보이겠지만 종교의 힘을 부인할 것이다.’

이미 2천 년 전에 환란의 시대가 다가올 때 나타날 현상들을 말하고.

 2천 년 동안 성모님은 여러 군데 발현하시면서 이러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환란의 시대, 어둠의 시대라는 것은 사랑이 망가진 시대, 다른 말로 사랑이 변질된 시대다.

이 세상의 문제는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곧 나의 문제요, 나의 문제는 곧 사랑의 문제입니다.

본인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본인에 대한 열등감, 미움, 상처로 가득 차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의 힘으로 존재합니다.

여러분들, 화초 가꾸실 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정성껏 물주고 왔다 갔다 하며 눈이라도 마주친 화초는 놀랍게도 사랑을 보답합니다.

향기를 뿜어내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꽃을 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왔다 갔다 하면서도 관심이 없고 또 생전 물을 안 주면 분명히 죽습니다.

 

나무 12그루를 정원에 심고 그 나무마다 사도들의 이름을 붙여 놓았대요.

그런데 다른 나무들은 잘 자라는데, 유독 한 나무만이 죽더랍니다.

짐작되시죠? 유다스 나무.

지나가는 사람마다 유다스 이름이 붙은 나무를 보고 한마디씩 욕하고 지나갔습니다.

나쁜 놈, 못된 놈, 인간 같지 않은 놈, 퉤 하고 침 뱉고.

얼마 되지 않아서 열두 사도 나무 가운데 유다스 나무는 죽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집단농장을 할 때 늘 매년 소출이 떨어졌지요.

다음해에 자기 땅을 주고 소출을 보니 집단농장 때보다 열 배 이상 이더랍니다.

집단농장은 마지못해 했지만 자기 땅을 가꿀 땐 소출에 대한 애정이 생긴 거죠.

 

이 세상의 문제는 나의 사랑의 문제로 귀착이 됩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건전하십니까? 변절 되지 않았는가를 우리들은 점검해야 됩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크게 낮추보면 인간적인 사랑이 있고 하느님을 닮은 사랑이 있을 겁니다.

 

내가 사랑한 만큼 나도 사랑받고 싶소, 주시오. 기브 앤 테이크(given & take)입니다.

‘내가 주는 만큼 다 받지는 못해도 내가 주는 것만큼 반이라도 되돌려 받고 싶소.’

정(情)의 사랑이라고 그럽니다. 감정의 사랑이라고 그럽니다.

이런 사랑은 분명히 한계가 있고 불확실하죠.

어릴 때는 엄마사랑이 전부인 줄 알다가 그 사랑에 만족을 못하고 연인을 만납니다.

어머님의 사랑은 한계를 느낍니다. 그리고 불확실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돌연히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심장마비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반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가까운 사람을 갈라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인간적인 사랑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살아오시면서 다른 사람한테 배반당한 적 있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배반하지 않았다 해도, 여러분에게 배반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내가 배신당한 상처만 끌어안지, 내가 누구를 배반한 것에 대해서는

늘 변호사처럼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게 왜 배반이야. 그게 왜 배신이야.’ 합니다.

아무튼 이런 에로스적인 사랑은 불확실하며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랑은 그 내용이 ‘무조건 주겠소. 되돌려 주면 감사하고 안 돌려줘도 원망하지 않겠소.

하느님께서 평화와 기쁨이라는 선물을 대신 주살 것을 알고 있소.’

이 조건이 없는 사랑은 성서에서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그럽니다.

의지의 사랑이라고 그럽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과연 우리들은 이 하느님의 사랑을 할 수 없단 말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할 수 있습니다.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는 어머니는 ‘내 몸이 얼마나 불에 탈까?’ 생각 안 합니다.

저 안에 있는 자식새끼만 살릴 수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아무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뛰어드는 만큼 네 놈은 나중에 커서 이 은혜 잊어버리면 안 돼.’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뛰어듭니다.

철길에서 놀고 있는 자식을 밀어내고 죽은 아버지도 있습니다.

그 기차 바퀴가 내 몸뚱이를 지나갈 때 얼마나 아플까, 그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만 살릴 수 있다면 내 몸이 기차에 깔려 터져 죽어도 아무 관계가 없는 겁니다.

 

위의 두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기 새끼이니 그럴 수 있다고 그래요.

그럼 피도 살도 안 섞인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한 건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죠.

그래도 세상이 살맛나는 것은 내가 못하는 것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쯔(Auswitz) 수용소에는

한 사람이 탈출하면 20명을 죽이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하나가 도망치다 전기 철조망에 걸려 죽고 나니까, 수용소 사람들을 불렀죠.

교도소 소장이 막대기를 가지고 배를 쿡 찌르면 그 사람은 오늘 죽는 것에요.

20명을 무작위로 지정합니다.

그때 그 자리에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님이 앞줄에 서 있었는데,

꼴베 신부님 앞을 지나가면서 바로 그 옆에 있는 사람의 배를 쿡 찔렀습니다.

그 사람은 무릎을 꿇고 교도소장의 바지에 매달리면서 울부짖었죠.

‘저는 처자식이 있습니다. 저는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들어주겠습니까? ‘한번 결정하면 끝이야.’

그때 꼴베 신부님이 ‘저 사람 대신에 죽겠습니다.’

‘너 뭐하는 놈이야?’

‘천주교 신부입니다. 저는 가족이 없지만 이분은 있습니다. 저를 대신 죽이십시오.’

‘잘난 척하는 놈이 나타났구나. 그래 네 놈이 대신 죽어라.’

그래서 지하 감방에다가 20명을 가둬두고 물 한 모금 주지 않는 아사형에 처합니다.

사람들은 며칠을 버티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죽어가죠.

꼴베 신부님은 죽은 가는 사람들 옆에서 마지막으로 사제로서의 기도를 바쳐줍니다.

단둘이 남고 마지막 한 사람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신부님은 사제로서의 의무를 합니다.

그래도 꼴베 신부님의 숨이 끊어지지 않자 교도소장은 독극물 주사를 놓아 죽입니다.

꼴베 신부님은 성인이시죠.

그 신부님은 평소에 성모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갖고 있던 수도사제였습니다.

 

자, 철길에서 자식을 밀어내고 죽은 그 사람은 아버지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합시다.

불길에 뛰어들었던 엄마는 자식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합시다.

꼴베 신부님은 사제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럼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요?

 

그 전에 수인사목 할 때 얘기입니다.

자기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서 옥바라지까지 했던 사람을 압니다.

5대 독자인 자식을 27군데를 찔러 죽였는데 그 살인범을 6개월 동안

피눈물 나는 기도 끝에 양자로 삼기로 결정하고 ‘신부님, 다리를 놓아주십시오.’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살인범이 완강히 거부했지요.

‘신부님, 그 여자 이상한 여자 아닙니까? 내가 그 자식을 얼마나 처참하게 죽였는데,

나를 자식으로 삼겠다구요? 싸구려 동정 안 받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 자매님은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십시오.’ 했지요.

 

그 둘이 만나는 날 그 자매는 사형수의 손을 잡고,

‘긴 말 할 것 없다.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야.’

그 살인범도 울었고, 지켜보던 교도관도 울었고, 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부터 얼마나 옥바라지를 잘하던지 일주일마다 교도소에 와서 영치금 넣어주고,

겨울이면 털실로 양말을 짜오고, 속옷도 넣어줍니다.

사랑을 받으면서 완전히 바뀌어서 무기 징역에 있던 사람은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 사람이 사람을 처참하게 죽였던 조폭이었을까’ 할 정도로 새사람이 되어 12년 만에 석방이 됐죠.

그 후 그 모자는 다른 도시로 가서 서로 의자하고 모시며 슈퍼마켓을 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죽인 원수로 양자로 삼아 옥바라지를 한 그 자매가 일시적인 감정이겠습니까?

싸구려 감정이겠습니까?

아니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할 수 있는 겁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피도 살도 안 섞인 사람에게 신장을 떼어주는 것, 이것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어리석은 죽음이요, 어리석은 행동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계명 중의 계명이요, 하느님의 지상명령인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 것이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못 해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교우들끼리 험담하지 맙시다.

서로 내살 같이 아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합시다.

교우들에게 서로 돌을 던진다면 매일 평일 미사 참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의 성체를 매일같이 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살아있는 전교요,

주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가장 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아멘.

 

♣2019년 부활 제5주일(05/19)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61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