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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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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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cskim74] 쪽지 캡슐

2002-02-05 ㅣ No.5619

 

   나는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TV를 시청하지 못했다.  아내가 혼수로 장만해온 12인치 흑백 TV가 우리 집에서는 처음으로 장만한 것이었고 가보 1호를 장식했다. 옛 고향집에 살 때는 아버지께서 사오신 라디오가 우리집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 문화생활의 큰 몫을 차지하였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이면 동리 사람들이 한사람씩 모여 들어 함께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들었고 연속극도 즐겼다.  이렇게 라디오를 듣다 보니 서울의 아가씨는 상냥 하고 멋쟁이 아가씨로 인식되었으며 표준말을 쓰고 있는 서울 아가씨가 나도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고향에도 신부감이 많았을 터인데 서울 색시와 결혼하게 된 것은 라디오 덕택이 아닐까 생각된다.  

 

  누구나 결혼 할 나이가 되면 나름대로 결혼관을 갖게 마련이다.  나는 얼굴이 예쁜 여자보다는 수수한 편이 좋다고 생각했으며, 눈도 밝고 또순이처럼 살림을 잘 사는 여자를 고를 것이라 마음 먹었다. 어른들께로부터 삼종지도의 덕을 자주 들었기에 남자에게 순종하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를 바랬고 영어는 알파벳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배우자로서 자격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다 서울 색시이면 금상첨화가 되리라고 믿으며  소망 했다.

 

   사내 대장부라면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서 출세 한번 하고 싶듯이 나도 그랬다. 어릴때부터 남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기를 좋아했으며, 남보다  빨리 부자가 되고 잘되기를 바랬던 나였으니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나를 두고 한 말 같았다.  아내도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고, 또 뒷바라지  해주기만을 기대했다.  어머니께서 그러시는데 여자는 눈이 밝아야 바느질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직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보니 살림을 알뜰히 사는 또순이가 더 마음 편하고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인박명"이라는 말을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에게 자주 들어 그 뜻을 알고 있었기에, 앞일을 누가 알까마는 미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불행을 자초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여겨저 두고두고 보면 좋을 수수한 사람이면 만족할 것이라는 결혼관이 내 마음에 자리 잡았는지 모른다.  

 

   신부감을 소개받아 사귀던 시절  우리는 서울시내 번화가로 여겼던 충무로에 있는  직장 가까운 애플다방에서 자주 만났다. 언젠가 그 다방에서 아내가 나에게 들려준 말은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사람은 각기 제 모습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났지요.  제가 당신과 똑 같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잘못 되었다고 보지는 마십시오.  당신이 계획한 데로 내가 행동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저도 당신의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신념들을 이해해 줄 거예요."  유교문화에 젖은 경상도 집안에서 자라난 사나이에게 이런 소견은 마음에 썩 들지 않을 것이  뻔한 이야기지만 ’결혼하고 나서 보자.’라며 마음속에다 꾹 눌러 놓고 지냈다. 그날 따라 즐겨 마시던 커피도 아주 쓴맛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으로 금호동성당에서 영세를 받았고 주일학교 교사생활과 청년 레지오 단장을 하며 봉사생활을 익혔던 아내는 결혼 후 어린시절부터 그녀의 몸에 벤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 보이기 시작하였다.  생활비를 쪼개어 조롱박이나 소품들을 사서 매듭이나 박 공예를 만들어 집안을 장식했고, 장판에 니스 칠을 하여 윤이 나도록 걸레질을 하였다.  내가 뉴욕에 연수받으러 가있던 석 달 동안 라면만 끓여 먹으면서 세탁기를 장만해 놓았고, 시장을 보러갈 때면 시장 안을 몇 바퀴 돌고 돌아 값싼 식품재료를 골라 사서 맛있고 영양 있는 식사를 장만하곤 하였다.  또순이는 소설이나 영화에만 나오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기도상위에 펼쳐놓은 성서를 몰래 펼쳐보니 밑줄이 차례차례 그어져 있었고, 밤이 늦도록 쌍촛불을 켜고 묵주알을 굴리는 모습을 자주 바라본 터이라 그 모습이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닮은 듯하여 언젠가 나는 "우리 집 성모님"이라 별명을 붙였고 그 이름을 자주 불러주곤 하였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 옛말이 있지만 우리 집은 달랐다.  벽에다 집 아이들이 연필이나 크레온으로 낙서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고, 집안을 자주 털고, 쓸고, 닦고하여 유리알처럼 깨끗한 상태라 놀러온 동리 아낙네가 먼지 떨어질까 봐 조심해야 되겠다고 발뒤꿈치를 들고 걸으며 조크를 보낸 적도 있었다.

 

   집안살림과 아이들 교육은 아내 몫으로 맡기고 나는 사무실 일에만 매달렸다.  아이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하거나 버릇없게 굴면 아내가 대신 내게 싫은 소리를 듣고는 하였다. 우리나라 경제가 이란사태 후 불경기였던 80년대 초 어느 해는 일요일을 포함 일년에 7일 밖에 쉬지 못했다. 우리가 자가용 승용차로 처음 마련한 것이 손아래 동서가 유학 가며 인계한 낡은 포니 였었다. 차를 처음 끌고 오던 날 식구들은 "우리 집에도 자가용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신이 났었다.  어느 공휴일에 아내는 이제 차도 있으니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해변에나 한번 다녀오자고 제안을 하였는데 나는 "나라경제가 어려운데 여가를 즐길 때가 아니다."며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두 아이들이 어렸던 시절 이웃집 교우가족과 포니에 8명이 타고 서해 안면도에 다녀온 것이 아득하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결혼기념일 날 아내 잠옷이라도 한 벌 사주고 싶었지만 북경에 출장을 다녀오던 날 고작 실크 삼각팬티 한 세트 사다준 게 기억에 새롭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내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 자랑과 자식 자랑 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는 말이 귀에 익어 칭찬도 아끼고 살아온 나였는데도, 집안에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싫은 소리와 괴로운 사연이 있어도 입이 무거워 마음 속에 묻어두고 마는 엘리사벳의 모습에서 지난날 나는 어디엔가 모자라는 삶을 살았던 게 아닌가 하고 회심의 눈을 뜨기 시작 한 것 같다.  요즈음 아내가 비타민처럼 나날이 복용하고 있는 그 약이 갑상선 이상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할 말을 잊고 아연 실색하고 말았다.

 

  어느 주말 일터에서 돌아온 나에게 "옛 말에 사람은 명예와 지위의 즐거움은 알면서도 이름 없이 평범하게 지내는 「참다운 즐거움」은 모르고 산다."며 귀밑머리가 하얗게 변해 가는 아내가 하던 말이 푸념이 아니라 생명의 메아리라는 것을 왜 진작 몰랐던가 후회 하지만 때는 이미 너무나 늦었다. 지난날 나는 참 바보처럼 살았던 게 분명 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내여, 나의 아내여, 미안하고 참 미안해요. 이 못난 남편을 용서해줘요."라고 엘리사벳에게 마음의 고백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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