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마흔 다섯,아무것도 없지만

스크랩 인쇄

박상학 [pshak59] 쪽지 캡슐

2001-04-30 ㅣ No.3405

마흔 다섯,아무것도 없지만

 


빈농의 셋째 아들,

짧은 학력이었지만 부지런하고 검소한

내겐 희망이 있었다.



나이 서른, 제법 돈을 모았을 즈음

성공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다니던 직조공장의 사장이 공장을 맡아보겠느냐고

권해오자 형제들에게 돈을 빌려 공장을 인수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너무도 모르는 바보였다.

약삭바른 사장이 잇속을 다 챙긴뒤,

껍데기만 남은 공장을 내게 떠맡긴 것이었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어느날,

한 여인이 내앞에 나타났다.



사촌동생의 친구였던 그녀는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내처지를 잘알고 어떤 고생도 각오하겠다는

그녀의 사랑에 감동해 우리는 결혼을 했다.

초라했지만, 행복한 시작이었다.

부지런한 아내는 식구들의 사랑을 흠뻑받았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부모님 병수발을 도맡았고,

퇴근하면 형님네 가게일도 도왔다.



그런데 일년뒤 첫딸을 낳고 장모님이

우리집 근처로 이사오시면서 부터

아내는 이상해 지기 시작했다.

왠지 쫒기는 사람처럼 늘 불안해 했고

돈에 쪼달리는 눈치였다.



급기야는 보험과 적금까지

해약한 사실이 드러났다.

내가 펄펄 뛰며 다그치자

울면서 그돈을 모두 친정엄마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했다.

알고보니 장모님은 사이비종교에 빠져 있었다.



장모님은 장인의 산재보상금도 모두 헌금으로 바쳤고

치료를 받지 못한 장인은 불구가 되어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또 처남의 대학등록금마저 헌금해 버리자,

비관한 처남은 군대에 가버렸으며 지금까지

아내에게 헌금을 강요해온 것이다.



들을 수록 기가 막혔다.

다음날 장모님과 크게 다툰뒤,

아내에게도 친정출입을 삼가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처가와 의절한 뒤 우리가정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 듯했으나 아니었다.

장모님은 나를 악마라고 저주하면서

신도들을 동원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게다가 아내가 그종교로 돌아오지 않으면

장모님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끊임없이 헌금을 요구했다.



급기야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은채

혼자 시달림을 받던 아내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 요구를 들어주느라 여기저기 엄청난 빚을 지고

큰 형님네 가겟돈 까지 손을 댄 뒤였다.

그래도 장모님의 손길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자

시댁식구들에게 사죄의 유서를 남기고

죽음을 택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그러나 장례식장에 몰려온 장모와 신도들은

이상한 노래를 부르면서

오히려 천국으로 갔으니

기뻐해야 한다고 박수까지 쳤다.

당신딸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냉혹한 장모님을 보자,

분노가 폭발한 나는 손에 잡히는대로

쥐고 휘둘렀다.



누군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결국

아내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채

경찰서로 끌려갔다.

다행히 정상참작이 되어 풀려났지만

이 북새통에 어머니마저 충격으로 운명하셨다.



너무 기가 막혀 눈물조차 안 나왔다.

더욱이 아무것도 모른채 장모님에게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는 딸애를 보니 끔찍한 생각마저 들었다.

복수와 자살을 꿈꾸며 하루하루

망가져 가던 나는 제발 당신보다 앞서가지말라며

식음을 전폐한 아버지의 눈물앞에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러나 불행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발목을 다쳐 목발을 짚고 다니던

딸애가 어느날 차디찬 시체로 돌아온 것이다.



아......

너무도 원통했다.

그때부터 뺑소니차를 잡으려고 현수막,

신문광고까지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가족들을 비롯하여 주위사람들의 눈치는

점점 심해지고 스스로도 미안함과 원통함,

분노등 복잡한 감정이 뒤죽박죽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포자기한 나는 세상을 원망하며

술과 싸움질로 심신이 황폐해 갔다.

가지고 있던 돈은 다 날렸고 IMF라

취직도 쉽지 않고 형제들의 집도 마음이

편치 않아 결국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되었지"한탄하며

지낸 노숙자 생활이 두어달 지난 어느날이었다.



무료급식소 앞에 줄을 서서

한 끼 밥을 기다리는 데 문득 눈물이 솟구쳤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을 들어가

실컷 울고 있자니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이렇게 떠돌다 병들어 죽어라고 낳으신게 아닐텐데..

구십이 다된 아버지는, 미안해 하며 죽은 아내는,

또 딸애는..."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곧 세수를 하고 머리도 감았다.

그리고는 내 뒤치닥거리로 피해를

많이 보고 형수와 사이까지 나빠진 큰형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했다.



만날 면목은 없었지만, 수신자부담전화로 내위치를

알리자 즉시 달려와 주었다.

그리고 형의 도움으로 겨우 몸만 뉘일 수 있는

월셋방을 구한 뒤, 공공근로를 하면서

취업자리를 물색했다.




그리고 지금 마흔 다섯, 지하 단칸방,

처자식 없는 홀아비, 청소부.....

용역회사를 통해 들어온 이 건물 청소일은

정말로 박봉이다.

게다가 그동안 건강을 돌보지 못한 탓에

몸이 자주 아프다.

하지만, 이렇게나마 평안하게 살게

된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다.

내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어서 빨리 폐끼친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고 소원해 진 관계를 회복해

예전처럼 어울려 사는 것이다.




*글/신경섭(좋은 생각5월호)*



2,515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