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할아버지의 호빵

스크랩 인쇄

최요안 [jachoi] 쪽지 캡슐

2000-10-03 ㅣ No.1841

●…공소미사가 있는 날이면 왜 그렇게 마음이 바쁜지….

지난 주말에도 그랬다. 미사가 저녁 8시이건만

낮12시에 라면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집을 나섰다.

먼저 상남과는 반대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미산에 사시는

교우 집에 들러 미사에 나오라고 알려주기 위해서다.

미산계곡은 이미 단풍이 내려앉고 있었다. 내린천변 둔덕은

봄 날의 개나리 꽃처럼 모두 노랗게 변해 있었다.

서울에서 휴양차 내려와 있는 형제님의 민박집을 찾았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차도 안보였다.

난방이 안돼 겨울에는 서울로 철수해야겠다더니

벌써 떠나셨는가보다. 내려오다 김 수산나 할머니 댁에 들렀다.

냉담하다가 이번에 새로 교적을 만드신 분이다.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몇번이고 다짐을 받고서야

다시 차를 몰고 내려왔다.

 

상남슈퍼에 와서 골롬바 자매에게 미사후에 음료수를 부탁하고,

군종성당에서 새로 교적을 옮겨온 정 아녜스 자매에게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다.

"저녁에 어디 갈 일이 있는데 갔다가 시간이 되면

와보겠다는데요."

맥이 풀렸다. 능력 없는 선교사의 한계를 느꼈다.

누구의 신앙인데…. 신앙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회의 책임이기도 했다.

 

풀이 죽어 앉아 있는데 배달 주문이 들어왔다.

트럭을 몰고 엄달골로 향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의 군무가

한창이었다. 상쾌한 가을 바람을 가르며

가을 속을 신나게 달렸다. 돌아와 보니 재수씨가 만두국

두 그릇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왠 만두국이예요?"

"집에서 했다길래 한 그릇 더내오라 그랬지요."

고마웠다. 그렇지 않아도 점심이 시원치 않았는데.

배부르게 먹고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아직 미사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재수씨 혼자 가게에

남겨 놓고 슈퍼 앞에 세워 놓은 차에 가서 눈을 붙였다.

 

가을 해가 많이 짧아졌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지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 미사는 잘 치러질까? 교우들은 잘 나올까?

농사일 때문에 8시로 했는데 다음부터는 한 시간 당겨야

할 것 같았다. 7시가 넘어서자 골롬바 자매에게 먼저 오는 분들

안내를 부탁하고 신자들을 모시러 출발했다.

가장 먼 미다리의 남 마리아 할머니 집부터 갔다.

할머니는 식사를 하다 말고 "오늘 미사예요?"한다.

그제서야 바쁘게 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하셨다.

내려오다가 문 베드로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할아버지도 절에 다니는 할머니의 핀잔을 들어가며

그제서야 준비를 했다. 고석평 군인관사에 들러 루갈다 할머니를

모시고 슈퍼로 돌아오니 7시 50분이 다 되었다.

자포대 프란치스꼬 형제 가족은 8시가 다돼서야 내려왔다.

 

이렇게 오후 내내 마음 조렸던 공소 미사를 지낼 수 있었다.

끝내 김수산나 할머니와 정 아녜스 자매는 나타나지 않았다.

공소 미사를 지낼 때마다 이렇게 항상 마음 조린다.

교우들은 조금만 일이 있다 싶으면 미사에 안나온다.

미사가 우선이 아닌 것이다. 때로는 혼자 화가 나서

교우들을 태우러 가지 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미사를 끝내고 다시 교우들을 태워다 주려고 나왔다.

마리아 할머니, 루갈다 할머니, 베드로 할아버지-

신부님을 전송하고 출발했다.

"한 주일 동안 잘 지내세요. 묵주기도도 하시구요."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에 미사전에 가졌던 속상했던 마음이

다 풀렸다. 말이 없던 베드로 할아버지가 부시럭거리며 뭔가를

꺼내더니 말씀하셨다.

"선교사님, 이것 좀 드세요."

"뭐예요?"

할아버지가 내민 것은 호빵 다섯 개가 들어있는

검은 비닐 봉지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할아버지 드시지….’하는 말만 되풀이 했다.

이 철없는 선교사에게 하느님은 또 한 방 먹이신 거다.

왜 그 순간에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구끝까지라도 가야한다.’는

어느 성녀의 말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산골 공소 선교사의 일기 - 95>



2,549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