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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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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삼종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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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열 [khoyeoul] 쪽지 캡슐

2014-10-27 ㅣ No.367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연중 제 30주일 (2014년 10월 26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 함께한 신자들 그리고 순례객들과 삼종기도를 하시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하신 훈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은 모든 율법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집약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의견을 모았다고 말합니다 (참조. 마태오 22,34-35). 그들 가운데 한 명인, 율법 교사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6절). 예수님께서는,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산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7-38절).


이쯤에서 말씀을 그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가 묻지 않은 무엇인가를 더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39절). 이 두 번째 계명도 예수님께서 지어내셔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레위기를 인용하십니다.


예수님의 독창성은, 분리할 수 없고 상호보완적이며 동전의 양면 같은, 이 두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을 한꺼번에 두심에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한 좋은 설명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당신의 첫 번째 회칙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16-18항)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세상과 이웃과 가족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증명 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표징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여러 계명들의 제일 위에 있기 때문에 첫 번째 계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제일 꼭대기에 두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둡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그곳으로 되돌아 오고, 모든 것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는 거룩하게 되기 위한 요구사항으로 이방인이나 고아 그리고 과부와 같은 약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참조. 탈출기 22,20-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하나인 사랑의 신비 안에서 일치 시키심으로써, 이 계약의 율법을 완성시키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빛으로, 사랑은 믿음의 척도이며, 믿음은 사랑의 영혼입니다.


매일 만나는 구체적인 형제들을 향한 봉사를 신앙생활과 영성 생활에서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에게 귀 기울이고 그의 삶에 가까이 하고 특이, 다른 이의 상처로부터 더 이상 기도와 성사 안에서의 하느님과의 만남을 분리 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각자 대답을 주십시오. 당신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의 믿음은 내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의 영혼입니다.   


숲처럼 많은 규율과 규정 어제와 오늘의 법치주의-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형제의 두 얼굴을 식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두 개의 규범이나 계명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규범이나 계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두 얼굴을 주십니다. 아니 단 하나의 얼굴을 주십니다. 그것은 많은 얼굴들을 반영하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형제의 얼굴 안에, 특히 더 작고 약하고 보호 받지 못하고 도움이 필요한 얼굴 안에 하느님의 모상 그 자체가 존재합니다. 


이 형제들 중 한 명을 만났을 때 그이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는지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가능합니까?


이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기준을 모든 사람에게 제공해 주십니다. 하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유롭고 넉넉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전구로 이 사랑을 영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개방하고, 하나의 얼굴인 사랑의 계명으로 귀착되는 두 얼굴의 계명 안에서 항상 걸어 갈 수 있도록 합시다.  


(삼종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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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16-18항 

(이 번역문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16.  사랑의 본질과 성경의 신앙에서 사랑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고찰하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태도에 관하여 두 가지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고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명령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하여, 이 질문들은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그 누구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랑은 명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있거나 말거나 하는 하나의 감정이지, 의지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첫 번째 이의에 힘을 실어 주는 듯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그러나 이 구절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요한의 첫째 서간에 나오는 이 구절의 전체 문맥은 그러한 사랑이 명백히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 주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너무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이웃에게 폐쇄적이거나 이웃을 미워한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 됩니다. 요한 성인의 말씀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길이며,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17.  실제로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앞에서 인용한 요한의 첫째 서간(4,10 참조)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1요한 4,9)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4,9 참조). 사실 하느님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에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의 마음을 얻고자 하십니다. 최후 만찬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위에서 심장을 찔리시기까지, 부활하신 뒤 나타나시기까지, 사도들의 활동을 통하여 태어나는 교회의 길을 인도하신 그 위대한 행위들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후의 교회 역사에서도 계속 현존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반영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사들을 통하여, 특히 성체성사를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교회의 전례에서, 교회의 기도에서, 살아 있는 신자 공동체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 현존을 깨닫는 법을 배웁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계속하여 먼저 사랑하십니다.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감정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알고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사랑 또한 우리 안에서 응답으로 꽃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차츰 발전시켜 나갈 때,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감정은 오고갑니다. 감정은 만나자마자 일어나는 놀라운 불꽃일 수 있지만, 그것이 완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는 에로스를 완전히 그 자체가 되게 하는, 말 그대로 사랑이 되게 하는 정화와 성숙의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잠재력을 불러일으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온 존재와 관련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들을 만날 때, 사랑받고 있다는 체험에서 솟아나는 기쁨의 감정이 우리 안에서 일깨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은 또한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지성을 모두 요구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은 사랑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며, 우리의 의지가 그분의 의지에 순응함으로써 우리의 지성과 의지, 감정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의 행위 안에서 결합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완성되지도 않습니다. 일생에 걸쳐 사랑은 변화하고, 성숙하며, 사랑 그 자체에 충실합니다. 같은 것을 바라고 같은 것을 싫어하는 것(Idem velle atque idem nolle)9)이 옛사람들도 인정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면, 의지와 사고의 공유에 이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는 사고와 감정의 일치 안에서 이러한 의지의 일치가 자라나, 우리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가 점점 더 일치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지가 내게는 더 이상 계명을 통해 외부에서 강요되는 낯선 의지가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께서 나 자신보다 더 깊이 내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10)을 깨달음으로써 내 자신의 의지가 됩니다. 그리하여 점점 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것입니다(시편 73[72],23-28 참조).


18.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과 내밀한 만남을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러한 만남은 의지의 친교가 되어, 내 감정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는 순전히 내 눈과 감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친구는 곧 나의 친구입니다. 다른 사람의 겉모습을 넘어서 나는 사랑과 관심의 행위를 보여 달라는 그의 내면의 열망을 깨닫습니다. 이를 어떤 정치적 필요로 받아들여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 기관들을 통해서만 그에게 관심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게 될 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외적인 필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갈망하는 사랑의 눈길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요한의 첫째 서간이 힘주어 강조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의 필연적인 상호 작용이 드러납니다. 나의 삶에서 하느님과 그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 이상의 것을 전혀 볼 수 없으며, 그에게서 결코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삶에서 오로지 ‘열심해지려고’, 또 ‘종교적 의무’를 다하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면, 나와 하느님의 관계 또한 메말라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지만’사랑이 없는 관계입니다. 기꺼이 내 이웃을 만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만 나는 하느님께도 마음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봉사할 때에만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는지,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인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복자의 예를 생각해 봅시다.- 은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 이웃 사랑의 힘을 끊임없이 길어 올렸으며, 거꾸로 그 만남은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더욱 생생해지고 심오해졌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뉠 수 없으며, 하나의 계명을 이룹니다. 그러나 둘 모두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외부의 ‘계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부에서 얻는 사랑의 체험에서 생겨납니다. 이 사랑은 본질상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통하여 자랍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기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치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은 우리의 분열을 뛰어넘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 바로 ‘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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