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묻고답하기 천주교 ㅣ 성경 ㅣ 7성사 통합게시판입니다.

q 아래 박철순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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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1-24 ㅣ No.82

 

 

 안젤로입니다.   박철순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지적 감사합니다. 여기서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제 글은 -
16세기의 종교 분열이나 교회의 부패상에 대해 어떠한 편견을 가지고서 - 어
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음을 먼저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말씀드린 앞의 글을 놓고서 이렇게도 정확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개신교 신자도 아닌 같은 가톨릭 신자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 자못
역설적이라고 말해야 하는 심정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꼭 말씀드릴 것은 님의 그러한 태도는 여러 가지로 오해하시
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 열린 마음으로 역사와 가톨릭의 교리에 대해 진지하
게 살펴볼 것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감정의 일시적 흥분 상태에서 신
앙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적인 개인만의 구원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
다. 우리 가톨릭의 구원은 언제나 ’나’가 아닌 ’우리’의 구원에 초점이 맞추
어져 있으며 더욱이 우리의 신앙은 이성과 지성이 납득하는 객관적이고도 확

고 부동한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하여 정서와 감정까지도 순

응할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초자연적 계시진리를 아무 의심없이
전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교리적 신앙입니다.

 가톨릭 신앙은 교리적 신앙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며 개신교와 가톨릭 신앙
의 차이점 -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하늘과 땅만

큼의 차이이며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가톨릭 신자가 된 그 어떤 이유도 자격
도 없다고 감히 필자는 말합니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가톨릭의 교리적 신앙과 개신교의 신뢰적 신앙의
상이함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술하겠거니와 그 점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많은
인식의 변화가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을 님께서는 분명히 인식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개신교
인들의 신뢰적 신앙처럼 그저 ’나는 주님을 영접했다’ 느니 ’나는 세례를 받고
그분의 현존하심을 믿었으니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
제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받았다’ - 이것은 루터의 주장인 불신앙만 빼고는 세
례받은 이는 모두 구원된다는 주장과  동일함 -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님이
가톨릭 신앙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
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철순님께서 필자의 의견에 동감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는 것도 또한 말씀드립니다.
 
 아래 교리 설명의 대부분은 가톨릭 교리서와 한국 가톨릭 대사전 그리고 교

부들의 신앙, 억만인의 신앙, 가톨릭 신앙, 가톨릭과 개신교, 천주교와 개신

교,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영원과 시간의 만남, 십자가 바라보며, 여러 종교

에서 보는 죽음관, 가톨릭 사상강좌, 가톨릭 교회사, 종교의 근본 문제, 가톨

릭 신자들이 알아야 할 개신교 근본주의 등 전부 교회에서 인준을 받은 (라틴

어로는 Nihil Obstat라고 하여 성교회에서 ’오류 없음’의 허가를 받았음에 주

의할 것) 저서들의 인용이며 그런만큼 필자의 의견에 동감하지 못하고 안하고

의 차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님께서 정말로 진정한 가톨릭 신자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님이 그런 역사인식을 한다고 해도 루터가 독성죄를 범하고 그리스도
를 욕되게 했다는 사실만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우리의 역
사 인식을 넘어서 그 자체가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인지를 충족
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님이 제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해서 제가 상관할 바는 더더욱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왜 제가 가톨릭 측의 역사

자료를 놔두고 개신교 측의 자료를 인용했다고 보십니까? 그건 당연히 가톨릭

은 루터의 반대편에서 역사를 서술했을 것이기에 루터에 대해 공정한 평가가

되지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럽의 옛 격언에는 ’상대방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audiatur et altera pars)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말에 따라 루터에 대해서 우리 가톨릭의 역사 서술이

아니라 개신교 측의 역사 서술과 평가를 고집한 이유입니다. 당연히 가톨릭의 역

사 서술에서 루터에 대해 뭐라고 했을 거 같습니까? 가톨릭에서 루터를 훌륭하게

평가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님이 더 잘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그럼 개신교측

에서는 뭐라고 그를 평가했겠습니까?  이 다음에 쓴 글을 끝까지 보시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진리는 용기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저서를 직접 보았느냐고 물어보셨지요? 그럼 이제 그의 저서와 그의
편지와 그 당시 역사가들의 기록을 인용해서 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루터
자신이 얼마나 중대한 과오를 범했고 그가 씻을 수 없는 독성죄를 범했는지
밝혀보기로 하겠습니다.

 그의 편지 중에는 자신의 과오가 이렇게까지 큰 결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

랐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한번 보시면 생각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를 루터에 대한 모략내지는 비방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면 사실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딘지 한

국적 정서에 맞지 않고 왠지 고자질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에 반기를 든 이들은 모두 사실 가톨릭 교회안에 있었던 자들이

라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5세기의 아리우스가 그랬고 네스토리우스가 그랬으며 그노시스파,모노피지스
트파, 펠라지우스파, 아노모이우스파, 마케도니우스파, 얀세니우스파, 알비파,
보헤미아의 후스, 영국의 위클리프, 독일의 루터, 프랑스의 칼빈, 스위스의
츠빙클리등 모두 가톨릭의 평신도 또는 사제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 모두 자신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언명을 능가한다고 독성죄를 범했
고 하느님의 아들의 신성을 의심해서 현대의 개신교의 현대주의 경향에서처럼
마치 니체가 말했듯이 실존의 최정상에 서 있는 듯한 초인의 위치로 격하시
켰으며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개신교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보셨다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니
중언부언한다는 것 자체가 님의 교양을 의심하는 것 같아 여기서 줄이겠습니
다.


 그리고 한 가지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도 교회를 침범하지 못하리라고 성서
에 말씀하신 것이 개신교의 출현으로 틀리게 된 이야기가 아니냐 하셨는데
그건 무언가 오해를 하신 듯합니다. 역사를  한번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초세
기의 교회사부터 시작해서 가톨릭에서 갈려나간  무수히 많은 이단과 이교가
가톨릭을 언제나 어느 시대나 괴롭혀 왔음을 목격하실 것입니다. 추후에 역사
상 존재해 온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간 교파에 대해서는 그 이름도 생소한 것
이 한 두 개가 아니지만 그 특징에 대해서까지 아주 자세하게 파헤쳐서 여러
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이단이나 이교라는 표현은 가톨릭과 구분짓는
것일뿐 감정적인 뜻은 없음을 다시 한번 말해둡니다.
 

 이것을 본다면 현재의 개신교로 인해 예수께서 보증하신 가톨릭 교회의 영속
성이 깨졌다고 말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러한 위기는 주님이 직접 세우신 교회를 더욱 견고하고 튼실하게 만드는 기회
가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도 역사를 통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도 교회를 넘보지 못하리라고 하

신 이상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에도 굽힘이 없이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는 아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아가 주님께서 명하신 세계의 모든 곳에 복음을

전파한 이상 이미 실현되었고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주님이 우리 가톨릭 교회

를 지켜주시고 있다고 말씀하셔야 옳은 말이 아니겠습니까?


 부연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의 출현 때문에 교회의
존립에 위협을 느끼지도 못할뿐더러 여태까지 가톨릭의 역사 안에서 갈려나
간 무수히 많은 교파의 탄생을 목격했고 그 많은 갈라진 교파들의 소멸 또한
보아왔다는 것은 아래 제  글 중 - 우리는 왜 가톨릭인가? - 에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역사가 매콜리의 평론에서 이미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필자는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한 이상 베드로
의 배는 난파될 수 없으며 지금까지 2천년의 교회역사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
음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과거의 역사를 왜 살펴보겠
습니까? 역사 속에서 인간이 아닌 신의 힘으로 존재하고 있는 진리 한 가지
는 가톨릭 교회는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사실뿐
입니다.

 이미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전세계적으로 가톨릭의 인구는 계속 증가세에 있
으나 개신교의 인구는 감소 내지 정체 상태인 것이 세계적인 통계자료를 통
해 이미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표시로서 미국의 개신교 인구가 정체 내지 감소세에 있다는 통계자료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습니다. 그 반면 가톨릭 교회는 세계 어디서나 그 영
적 생명력이 쉼 없이 새롭게 피어나고 있음에 모든 이가 경탄해 마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전 가톨릭과 루터교의 의화선언의 일치부분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가톨릭 교리를 루터교의 주장대로 수정해서 타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가톨릭의 교리를 수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옥의 세력이 교회를 유린한 것이
될 것입니다.

 아래 제 글을 보셨으면 아실 테지만 이미 100년전에 가톨릭은 4억이었으나
개신교는 3억이 조금 안 된 인구였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개신교 인구는 4억이 채 안되나 가톨릭은 10억 3천
만명이 훨씬 넘었다고 통계는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래
필자의 글에서 인용한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님의  저서 가톨릭 신앙에서처럼
개신교는 허물어지는 모래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이가 나고 있는 가운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석학들이 - 물론  개신교 신자였던 이들이- 가톨릭으로  속속 귀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영국의 언론들은 한동안 ’지성인은  모두 로마로 가는가?’ 라는
제하의 큼지막한 기사를 실었었고 영국의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 경은 이렇
게 큰(?) 사태로 인해 앞으로  영국 성공회의 앞날이 걱정된다고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상세히 고찰하겠습니다.
  

  참고로 이글은 원래 제가 계획한 연재에 있었던 것인 만큼 오히려 님의 그
런 의견이 제가 빨리 글을 올려야 할 이유가 추가되었다고 말해둡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루터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항변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 인식을 할 줄 아는 이성과 양심을 가진 가톨릭 신자라면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정통 프로테스탄트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걸맞는 행동
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번 살펴보십시오.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이 가톨

릭에서 갈라져 나온 480주년 기념  행사는 하면서도 루터의 행실을 본받으라든

지 아니면 루터만큼 성덕이 높은 인물은 개신교 안에서 없었다는 그런 말은 절

대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필자가 철순님보다는 훨씬 잘 안다고 생각

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9년 전에는 개신교 신자였으니까요.


 우리가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 사람의 행위에서 보여지는 그 한 면만을 가지
고 그 사람의 전 인격을 판단할 수 있냐고 님께서는 생각하실 지도 몰라 제
가 한 말씀 덧붙이겠습니다.


 윤리 행위란 무엇입니까? 윤리 행위는 내적 의지(內的意志)의 외적 표현(外的

表現)에 다름 아닌 것이 바로 윤리 행위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님께서는

고백 성사를 보셨을 때 물론 예비자가 아닌 신자이실 테니 고백 성사를 보셨을

테지만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실정법에 저촉되든 안 되든 그것을

떠나 우리는 신부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런 생활 상의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우리 가톨릭 신자의 입에서 루터는 그다지 악한이 아니었다니! 이 무슨 망발입

니까?


  필자가 의도한 글의 연재 목적은 확고한 믿음을 가진 가톨릭 신자에게는 다

시 한번 교리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의 역사를 되새기게 하려 함이요 연약한 믿

음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믿음에 대해 확신을 심어주고 비신자에게는 역

사적으로 그리고 가톨릭 교회외적인 기록들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더구나 우리 한국이라는 특수한 종교적 상황에

서 신자들이 겪는 비신자와의 갈등에 좀더 현명하게 대처하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편파적인 의견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기에 더욱 그

렇습니다. 밑의 필자의 글이 무척 많고 긴 줄은 압니다만 한번 찬찬히 살펴보시

기 바랍니다.

 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으로 저는 한때 맹렬한 반 교황주의자였으며 루터와
칼빈의 신학에 경도되어 있었으며 교황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던 사

람이었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그러나 님께서는 한가지 간과하신 게 있으니 그건 바로 루터라는 사람이 잘
못한 게 아니라 그 루터가 처해 있던 시대 상황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지
않느냐 하는 오해입니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 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루터의 글과 그의 언행을 보면 파렴치한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님이 어떤 이유로 루터를 두둔하려는지 저는 잘 모르겠으나 그를  
두둔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정욕이란 억제할 수 없는 것으로서 동정 허원은 지켜서는 안되는 마귀
의 간악한 흉계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동정 허원을 맹세했

던 27살의 수녀 카타리나와 42살의 나이에 결혼을 했으며 요즘에 보기에도 민

망할 정도의 결혼을 주선한  것으로 그 이름이 유명(?)합니다.
 
그 한 예로는 그의 동지 수사였던 41세의 칼스탈을 15세 소녀와 결혼시킨 것
과 헷센의 백작 필립에게 자식을 8명이나 낳아준 본처가 엄연히 있음에도 불
구하고 17세의 처녀 마르가리타 폰 델 사일과의 중혼을 허락하면서 남자에게
는 억제할 수 없는 정욕이  있나니 한 여자로 만족하지 못하면 첩을 두어도
상관없다며 다처제를 주장하고 무엄하게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정하신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폭행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이후 개신교에서는 공공연히 이혼과 중혼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여러
분도 잘 아시는 가정 윤리 파탄이라는 현대의 가장 무서운 사회악이 만연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개신교의 성립 이전 그러니까 15세기동안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이혼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님이 만약 교황성하께 대한 모독적인 언행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직접 목격하였다면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물론 님이 진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그러한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칭찬하거

나 두둔하는 쪽에서 그 사람의 인격을 볼 수 없음이 옳은 이야기가 아니겠습

니까?


 우리가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명하신 계시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
친 루터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는 교황에게 반기를 들고 그 교서를 공공연히
불태운 일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님이 한번 소름끼치는 루터의 원
작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그 저작에는 루터가 직접 그린 삽화가 나와 있습니
다.


그 삽화에는 교황청이 마귀의 소굴로 되어있으며 교황이 이마에 666을 아로
새긴 적그리스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루터는 교황의 가슴
에 자신의 독이 가득 찬 독설이라는 단도를 심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직접 슈말칼덴 동맹(개신교 연합군)에 헷센 백작과 같이 출정해 칼 5세의
신성동맹(가톨릭 연합군)과 일전을 준비하던 중 세상을 떠난 인물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미국에서 선정한 천년 동안 가장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위
인에 마르틴 루터가 들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루터로 인해 발생한 인류의 영적, 물적 손실은 이루 막대한 것이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가톨릭이 과학을 박해하고 신앙에 의거 사람들을 괴롭히고 학
살한 줄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
습니다. 더구나 비신자도 아닌 가톨릭 신자의 머리 속에 가슴 속에 그런 잘못
된 역사 인식이 자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자신이 분열의 씨앗을 안고 있다
고 생각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 한 예로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갈릴레이는 교황청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도 아니며 자신의 학설에 대해 교회는 탄압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님을 사람들은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 재판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약간의 주제로 글을  
올린 과학과 종교에 이어 다시 한번 추후 거론할 것을 말해둡니다.

 
아직 자세한 이야기는 안 드렸지만 독일에서 루터의 슈말칼덴 동맹 -개신교
연합군 - 과 전쟁을 벌였던 신성동맹 - 가톨릭연합군의 지도자 - 칼 5세는
결전이 끝나고 영구히 개신교의 이탈에 종지부를 찍을 시점에 어리석게도 가

톨릭의 교리를 루터파의 취향에 맞게 적당히 고쳐 전쟁을 종결하고 그들을 가

톨릭으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가톨릭으로부터
도 루터파로부터도 모두 배척을 받았으며 그 결과 다시 힘을 얻은 루터파의
가톨릭 제후들에 대한 침략으로 30년 전쟁이 촉발되었음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
습니다.


 그 결과 독일의 3천만 인구가 1천 2백만으로 줄었으며 강대국들의 전장이
된 독일은 그후 오랜기간 외세의 압박속에 지내야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입니다.


 만일 가톨릭의 일관된 주장과 행동으로, 물론 개신교 측의 시작에서부터 그
토록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그것이 안되었을 당시, 슈말칼덴 동
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칼 5세의 불분명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만 아
니었다면 이런 분열의 싹은 아예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16세기가 타락의 시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역사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타락의 시대라고 하는 그 16세기
에는 물론 종교 개혁이라는 거센 소용돌이로 베드로의 반석이 위태로왔던 것
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성덕이 찬란히 빛나는 성인들이 배출된 시대였
다는 사실입니다.   


 저 자신 유니텔 가톨릭 동호회에서 여러 가톨릭 신자들과 대화를 통해서 박

철순 님처럼 루터란 그저 가톨릭의 악폐를 개혁하려던 선의의 개혁자로 오해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교리에 대해 잘 안다고 하던 가톨릭 신

자들조차도 루터의 저서나 그의 편지 그리고 그가 귀족을 선동해 10만명이 넘

는 무고한 농민을 학살한 것을 그저 선의의 개혁가의 사사로운 실수 정도로
여기고 그의 인간 됨됨이는 괜찮았음에도 가톨릭 교회가 중세의 타락상을 그
저 선구적인 종교 개혁가에 뒤집어 씌우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충격을
받았던 것을 이 자리를 빌어 말해야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루터라는 이의 타락상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있
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 까지나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 왜 필자는 루터를 거명해서 그의 나쁜 언행과 독성죄를 말한 것일까
요? 그것이 전체 개신교인들에게 어떠한 해악을 끼치기 위함이겠습니까?

 천만부당하게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오해입니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너무나
모르기에 역사의 오류는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역사가 증명하듯
이 교회를 정말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한 것은 교회 외적인 데서 있지 않
고 내적인 곳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님의 그릇된 오해 - ’죽음의 힘’도 교회를 누르지 못하리라고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명하신 사실에 대해 - 존 A. 오브라이언 대주교님의

명저 ’The Faith of Millions’ 가운데  일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님의 그릇된

견해에 대한 저의 답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교회는 네로의 시대부터 오늘의 공산주의 독재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폭군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왔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교회의 자녀들은 신앙을

위하여 순교(殉敎)해 왔다. 그들은 매몰찬 망나니들의 모진 칼날 아래 용감히

쓰러졌다. 그들은 순교의 십자가위에서 불꽃의 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늘날 종교박해자들의 불같은 성화에도 굽힐 줄 모른다.  

 교회는 헨리 8세의 교회 재산 약탈도, 나폴레옹의 교황 감금도 목격했다. 그

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세말까지 만민에게 가르치기를 명한 계시 진리의 부스

러기조차도 어떠한 임금이나 농민을 위해서 굽히지 않았다.

 교회는 개신교 교파들의 조직체를 깊숙이 좀먹은 현대식 불신앙의 쓴맛도

보아왔다. 교회는 탈을 뒤집어 쓰고 아양을 떠는 현대식 이교에 속지도 않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현 세계의 비위를 맞추려 윤리 표준을 낮추지 않는다. 그

는 득세한 국가주의나 제국주의에 굽혀 영적 통치권에 관해서 협상하려 들지

도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토록 같은 분이다." 이것

이 그의 고집이다. 교회의 이 영속성, 만대에 존속하여 그 진리의 한조각이라

도 굽힘이 없이 만민에게 전하기에 지칠 줄 모르는 이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

께서 항상 교회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지켜왔다는 눈부신 증거가 아니겠

는가? 오늘의 가톨릭은 19세기 전에 유다에서 하느님이신 창설자의 손으로

태어난 그대로의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루터가 종교 개혁 당시 행한 언행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의 글에서 하

도록 하겠습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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