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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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성월을 맞이하여 『덕원의 순교자들』신간안내(분도출판사,요한네스 마르,이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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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출판사 [bundopress] 쪽지 캡슐

2012-09-10 ㅣ No.12



양장본(168*220mm)|576쪽|2012년 9월 1일 발행

분도출판사 홈페이지 : www.bundobook.co.kr
▶ 책의 판매 수익금은 덕원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하느님이 부르시면, 따르라!

1940년 6월 16일, 덕원에서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가
옛 학우에게 보낸 엽서 가장자리에

북녘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을 증거하던 사제와 수도자들이 한국전쟁을 전후하여(1949-1952) 공산주의자들 손에 적잖이 희생되었다. 이 가운데는 덕원수도원·연길수도원·원산수녀원 소속 수도자들과 함흥대목구·연길대목구 소속 사제 서른여덟 분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 사제와 수도자가 열셋이요 독일인 사제와 수도자가 스물다섯이다. 우리는 이 고귀한 죽음을 ‘순교’라 하고 이들을 아울러 ‘덕원의 순교자들’이라 부른다. 이 책 『덕원의 순교자들』은 이 서른여덟 분의 가열찬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덕원의 순교자들’의 삶과 수난사는 처음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수도자들이 교화소에 수감되었을 때, 수도원에서 쫓겨난 몇몇 한국 수도자는 담장 안의 형제와 비밀 쪽지를 주고받았다. 이들의 담대한 용기가 없었던들 많은 순교 행적이 영영 땅속에 묻힐 뻔했다. 또한 옥사덕수용소에서 함께 수감 생활을 하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수도자들의 증언도 그들의 순교 사실을 알리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살아남은 분들이 덕원수도원과 원산수녀원, 평양교화소와 옥사덕수용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서방에 알리면서, 고향의 가족 친지와 수도 공동체들은 이 신앙의 증인들에 관한 자료를 힘닿는 대로 찾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르면서 역사적 증언과 일화(逸話)적 회고 그리고 경건한 추측까지 담긴 다양한 전승의 갈래가 형성되었다. 이 책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사료들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순교자들이 손수 남긴 편지와 기록은 물론이려니와, 그들과 삶을 나누고 마지막을 지킨 이들의 증언 또한 가치롭다.

바야흐로 기존 전승 자료의 정사(精査)와 역사비평을 통해 이 신앙의 증인들의 삶을 역사적으로 튼실하게 뒷받침할 시기가 되었다. 이 작업이 그저 전승의 생동감 없는 각색이나 무미건조한 자료 모음집에 그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은 조금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어디서보다 이 책에서, 이 순교자들의 삶의 오롯한 모습을 많이 만날 것이다.

오틸리아 연합회 역사 고문인 요한네스 마르 박사가 당시 사료들을 총망라하여 이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기록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저자는, 오틸리아 연합회와 투칭 수녀원 소속 남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동아시아 선교 역사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로, 2009년 출간한 기념비적 대작 Aufgehobene Häuser: Missionsbenediktiner in Ostasien(『분도통사』 왜관수도원 옮겨 엮음, 분도출판사 2009)을 이 책에서 축약·재구성·보충하여 ‘덕원의 순교자들’을 삶과 죽음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 준다.

오틸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두 해 앞둔 2007년 5월 10일, 왜관수도원은 ‘덕원의 순교자들’ 38위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교령을 반포하고, 현재 본격적인 청원 절차를 추진 중에 있다. 한국과 로마의 담당 기관에서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이 심사 과정은,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우리 순교자들의 역사와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는 2007년 2월에 열린 오틸리아 연합회 평의회의 권고와, 같은 해 봄에 열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총회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시대의 최근 연도까지 신앙에 대한 배척 때문에 피 흘린 모든 이를 미래에도 기억하자”고 호소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출간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20세기 순교자로서 ‘덕원의 순교자들’이 지니는 각별한 의미는 이들이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 나누었다는 데 있다. ‘덕원의 순교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정치·사회적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의 절망과 아픔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은 분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한국 현대사의 일부이며, 그들의 순교 사건은 한민족의 비극과 별개가 아니다. ‘덕원의 순교자들’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들의 순교 행적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이가 가슴에 품고 추앙할 만하다.

이 책 앞부분에 소개되는 세 분의 전기는 다른 분보다 분량이 많다. 그것은 이 세 분이 다른 분들보다 더 혹독한 수난을 당해서가 아니라, 38위 순교자의 삶의 역사가 완결된 역사적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는 데 이 세 분이 큰 몫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는 한국에서 수집된 모든 정보가 처음으로 보충되었다. 무엇보다도 한민족 특유의 큰 도량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목숨 바쳐 그 신앙을 입증한 한국인 수녀와 사제들의 전기가 되도록 상세하고 풍부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이 순교자들의 불타는 열정을 우리 마음속에 불러올 수 있기를 바란다. ‘덕원의 순교자들’이 살고 죽었던 그 치열한 역사의 현장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읽을 것을 권한다.

- 본문 중에서 -

“평양교화소, 1950년 3월 4일.
사랑하올 라우렌시오 신부님!
편지와 축하에 감사. 바깥에서 온 첫 소식. 많은 기도 부탁. 어르신[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죽음은 우리도 알고 있었음. 당일은 몰랐음. 감옥 식사가 맞지 않아 고생하셨을 게 분명. 심한 설사로 피골 상접. 교화소 내 매장되었으리라 추정. 루페르토 [클링자이스] 신부, 그레고리오 [슈테거] 신부(영흥), 다고베르토 [엥크] 신부, 요셉 [그라하머] 수사가 나와 함께 있음.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는 어르신을 보살피던 감방에 아직 혼자. 그렉(그레고리오) 신부와 닥(다고베르토) 신부는 무사. 두루 안부 전해 주시길! 요셉 수사는 류머(티즘)로 쇠약. 루페르토 신부 병세 악화. 7개월째 심한 설사. 걱정 태산. 저는 무사. 부원장신부(아르눌포)는 (1949년) 8월 신부들과 북쪽으로 이송. 귀환 여부 불명. 감방(2.5×3.5미터)에 신부 18명이 6주 동안 밤낮으로 갇혀 있었음. 당시 나는 독방. 침구가 가장 필요, 모포 석 장 … 덕원, 12월 6일 그는 … (이하 해독 불능).”(259-260쪽)


“나는 손을 들어 축복하며 이 편지를 씁니다. 최근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등에 종기가 났고,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는 등에 류머티즘이 있으며 김종수 베르나르도 신부는 설사와 소화불량으로 고생합니다. 벌써 한 달째입니다. 늘 있는 통증만 빼면 다들 건강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260쪽)


“깔개로 솜이불(다섯 명분). 옷은 불요불급. 성탄 전에 다들 솜저고리를 받았음. 그게 전부. 난방은 없음. 6월(1949년), 나는 우리 인쇄소의 반공 ‘삐라’ 인쇄 건으로 조사받음. 마르크스에 관한 루페르토 [클링자이스] 신부의 영흥 강연.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의 사진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임자가 되었음. 7월 2일에 인쇄 사건과 루페르토 신부의 강연에 대해 조사받음. 10월 15일 판결.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 나, 루페르토 신부, 요셉 [그라하머] 수사, 그레고리오 수사는 징역 5년. 그레고리오 [슈테거] 신부와 다고베르토 [엥크] 신부는 7년. 죄목은 ‘나쁜 사상’(불온사상). 우리는 거기에 관해 조사받은 바 없어서 변호할 기회도 없었다고 이의를 제기함. 판사(대좌)는 수일 내로 설명하겠다고 해 놓고 감감무소식. 판결은 5분 만에 끝났음. 소좌만 참석. 5월 1일까지 낮에는 앉아 있고 밤에는 누워 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음. 책과 성무일도서는 없고 기도만 많이 함. 상호 대화 금지.”(260쪽)

 

그곳에 묵묵히 앉아 있던 그 사람들에 관한 소식은 이것 이외에는 없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 수사는 10월 초에 집단 학살 당한 사람들에 포함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는 1940년 6월 16일 옛 학우가 수녀원 입회 문제로 자기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그녀에게 써 보낸 말을 스스로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하느님이 부르시면, 따르라!”(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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