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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에 대한 상세 고찰(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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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3-10 ㅣ No.159

 

 

- 교황의 무류성(無謬性) -

 

 

 

 

하느님의 보호

 

교회의 그르칠 수 없는 교도권 -이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교 교회의 통치자

곧 교황이라는 최고 지도자의 인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교리만큼 자주 오

해받고 따라서 비신자들로부터 큰 반감을 사고 있는 교리는 아마 없을 성싶다.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 중에서도 교황의 무류성에 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경

우도 없지 않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에게 이 문제를 냉정하고

우호적으로 소개하고 싶다. 여러분이 반대하고 있는 것은 실은 가톨릭이 주장

하는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이 아니라, 다만 여러분의 정신 안에만 상상으로

있는 것처럼,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악선전으로 말미암은 오해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음을 여러분이 깨달았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여기서 또다시 부탁드리는 것은 그저 마음을 탁 터놓고 이 문제를 다루어 보

자는 것이다. 나는 이를 교회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다만 구세주 예수 그리

스도의 말씀과 우리의 보통 상식에만 의지해서 이 거룩한 신앙의 가르침이 진

실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우선 교황의 무류성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여러 사람

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무류성이라는 것은 교황이 신적 영감(神感)

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사도들과 복음 사가(史家)들은 신감(神感)의 은혜를

받은 만큼 그들의 글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이 영감(靈感)을 받는다거나 또는 고유한 하느님의 뜻의 계시를 받는다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성령

이 약속되었음은 성령이 계시하는 새로운 교리를 전파하기 위함이 아니요, 성

령의 도우심으로 사도들이 전해 준 계시, 곧 신앙의 유산을 범하지 않게 보존

하고 충실히 설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무죄와 혼동되다

 

 둘째로 무류성은 교황이 죄를 범할 수 없다거나 도덕적 악을 저지를 수 없다

는 말이 아니다. 어쨋든 전혀 흠이 없을 수 없었던 몇몇 교황을 지적하여 이렇

게 말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보라, 저런 죄를  범한 교황도 있다. 곧 그 교황

은 무류성이 없었다. 따라서 이는 교황이 무류성을 갖지 못한다는 뚜렷한 증거

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무류성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 듣기만

하면 이런 반대는 자취를 감출 것이다. 왜냐하면 무류성이라는 것은 무죄(無罪)

하다거나 인간적 약점이나 결점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교황은 극소수의 몇 명만 제외하고응 모두 덕스럽게 살았다. 최초 30명

의 교황 중에서 29명이 신앙을 위해서 순교했다. 베드로의 성좌에 앉은 264명

의 교황 중에서 79명이 그들의 빼어난 성성(聖性)으로 말미암아 성인으로 공경

되고 있다. 겨우 대여섯 명만이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나마 이것도 그리스도 친히 뽑으신 열두 제자 중에 유다가 끼여 있었다는 사

실에 비추어 보면 놀라울 만큼 적은 비율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만약 대다수의 교황이 부덕하였다 해도 이런 것은 무류성과

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교황의 성직에 부여된 이 무류권은 교황 개인의

도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 사정에 관해서 판단을 그르치지

않게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판사는 국가의 법률로 정해진 법적 권한

과 권위를 받는다. 그런데 비록 그의 사생활에 어떠한 도덕상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 사정 때문에 그가 재판석에서 내린 판결이 무효할 수는 없

다. 재판석에 앉은 그의 권위는 그의 사생활 여하에 달려 있지 않다. 즉 그가

맡은 직책에 부여되어 있다.

 

 

 

인간적 약점을 인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류성은 교황의 성직(聖職)에 부여된 것인만큼 교황의 사생

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판사의 법적 권위나 마찬가지로 이러한 직책

을 마련한 사회의 복지를 위한 직책에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교황은 자기들도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약점을 갖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는 매일 미사를 시작할 때 기도를 드린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

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

홀히 하였나이다." 또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

소서. …주 하느님,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오늘 저희가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

 

 교황은 그토록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인간성이 지니고 있는 나약함과 허물

과 유혹에서 유독 면제되어 있다고 꾸미지는 않는다. 자기의 직책에 부여된 무

류성이 있다 해서 자기는 전혀 죄를 범할 수조차 없다는 소리를 그림자조차 비

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보면, 소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목사들이 죄를 범한 교

황도 있다고 떠들어 댐으로써 교황의 무류성의 교리를 불신케 하려는 것은 무

슨 짓일까? 가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일부러 잘못 전하고서 진리의 왕이신 하느

님께 대해서 올바른 소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신이

나게 주먹질을 한다고 해서 개신교가 세지지도 않을 것이며 가톨릭이 약해질

리도 없다.

 

 

 

과학은 포함되지 않는다

 

 셋째로 무류성은 교황이, 예컨대 물리학, 지질학, 천문학, 의학등의 자연과학

-어떠한 뜻으로 계시 진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의 문제를 논할 때에도 오

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또 순수한 정치적 문제, 예컨대 어떤 정치를

따라야 된다든가, 가톨릭 시민은 어떤 후보자에게 투표해야 된다든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무류성이라는 것은 과학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국가의 통

치권을 침범하지 않는다.

 

 넷째로 무류성교황이 사사로이 말하는 경우에도 어느 분야에 있어서든지 오

류를 범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말하는 경우에는 신앙과 도덕의

문제까지 그르칠 수 있다. 그러므로 베네딕토 14세 같은 교황이 교회법에 관한

논문을 썼다면 이는 다른 박사들의 논문과 마찬가지로 비판을 받게 마련이다.

 

 

참뜻

 

 그렇다면 무류성의 참뜻은 무엇인가?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교황이 공식석상

에서 온전한 권위로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순례 교회의 으뜸으로서, 전 교회

에 선포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언할 때 그르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세 가지 조건을 주의해야 한다.

 

 

  1. 교황이 성좌(聖座)에서, 즉 그의 공직인 베드로의 성좌에서 말해야만 한다.

 

  2. 이 결정이 전 교회(全敎會)에 관한 것이라야 한다.

 

  3. 신앙과 도덕에 관한 것이라야 한다.

 

 

 교황은 새 교리를 발명할 권리는 없다. 그는 계시의 창조자가 아니고 오직

시의 해석자, 설명자일 뿐이다. 그에게 신법(神法)을 파괴하거나 성서의 한

획이라도 바꿀 권리가 없음은 우리와 마찬가지이다. 그의 직책은 하느님의 진

리를 모든 시대의 인류에게 그대로 전해 주는 데에 있다.

 

 여기서 덧붙여 말하거니와 만일 2천 년의 가톨릭의 역사에서 어느 교황이 임

의로 공표한 신조가 있다거나 또는 공표한 신조를 나중에 제멋대로 고쳤다거나

또는 폐기했다면 이는 이제까지 말한  교황의 무류성이 순전히 새빨간 악독한

거짓말임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이

몇 건 아니 단 한 건이라도 2천 년의 가톨릭 역사에서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

한 답은 아주 자명하다. 단 한건도 아니 단 한건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가톨릭

의 역대 교황 중 가장 타락했다고 비난받는 교황조차 새로운 교리의 발명은 고

사하고 임의로 교리를 고친 적도 또 이미 공표한 교리를 폐기한 적도 없다.

 

 교황이 무류성을 가지고 교리를 공표할 때에는 그 이후의 어떤 교황이라도 이

를 바꾸거나 폐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따라서 위의 역사적 사실이 무

류성의 신적 보호(神的保護)를 입증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

의 역사가가 증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종파를 망라한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최고 법원과 비슷하다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교황의 직능은 근본적으로 헌법을 해석하는 국

가의 최고 법원과 같다. 헌법 조문에 대한 해석에 이견이 나타나는 경우에 이

문제는 마지막에는 최고 법원에서 결정이 내려진다. 이 법원장이 배심 판사들

과 협력해서 판결을 내린 경우, 이 판결은 일체의 관계자에 대해서 최후의 결

정적인 것, 또 어떤 법정에서도 번복될 수 없는 것이다. 국민들은 헌법의 뜻에

관해서 말썽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豫見)하여 이런 최고 법원을 마련해 놓

은 건국 공로자들의 슬기를 누구나 다 찬양한다. 이런 법원이 없다면 헌법은

있으나마나 한 걸레 조각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아귀다툼,

분열, 혼란, 무정부 상태, 내란 등이 숨돌릴 사이도 없이 연발될 것이다.  

 

 사실 가지각색의 인종과 경제적 이해 관계를 달리하는 이렇게 많은 주(州)들

이 이제까지 합중국으로서의 정치적 결합을 유지해 온 것은 오직 이 최고 법원

덕분이다. 2백년의 미국 역사상 단 한 번 일어난 남북  전쟁도 칼싸움을 하지

않고 최고 법원에서 따졌다면, 피흘리는 집안 싸움을 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

이 역사가들의 정평이다.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도 이와 똑같다. 교황직이라는 최고 법원이 없었던들 가

톨릭은 벌써 옛날에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져 만신 창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태어난 지 겨우 4세기밖에 되지 않은 개신교가 저렇게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무

수하게 분열되고 있음을 보기만 하더라도, 만일 가톨릭에 교황의 무류성(無謬性)

이라는 신정(神定) 법원이 없었다면 20세기 동안에 얼마나 무수히 갈라졌을 것인

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눈 가진 사람이면 모두 놀라워하는 이 교회의 통일이

야말로 20세기 동안 꾸준히 기능을 발휘해 온 이 최고의 틀릴 수 없는 법원의 복

스러운 열매이다.          

 

 

 

다르냐?

 

 헌법을 해석하는 최고 법원의 직능과 성서를 해석하는 교황의 직능이 비슷하다

는 것은 종교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에게도 감명 깊은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를 밝혔을 때 어느 비신자 변호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과연 지독

히도 비슷하군요. 그렇지만 다른 점도 있지 않습니까? 즉 국가의 최고 법원의 결

정은 최후 결정적이기는 하지만 무류성은 인정하지 않거든요. 틀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교황의 결정은 틀릴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비유는 절름발이가 아닙니까?"

 

 이제 내가 그 법률가에게 답변할 말을 독자 여러분에게도 들려 주고 싶다. 지당

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최고 법원의 판결을 최후의 결정적

인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지면 틀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 판결이

진리와 정의의 소리가 아니라면 구속력(拘束力)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 않다

면 그릇되고 불공정한 결정에 불복한다 하여 구금 투옥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최고 법원의 선언도 무류성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셈

이다. 엄격히 논리적으로 따지면 무류성의 제재력을 지니고 있는 결정은 곧 실제

로 틀릴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인정해야 될 것은, 국가의 최고 법원은 무류성과 같은 제재력

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무류성은 없다. 왜? 대답은 역시 간단하다. 국

가의 건국 공로자들은 이 법원에 무류성을 주었지만 그들 자신들은 무류성이

없었으며 따라서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느니 만큼- 이론상으로는 무류

성을 지니고 있어야 할 최고 법원의 최후의 결정에 실제로는 무류성이 없을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줄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톨릭 교회의 창설자요, 교황의 무류권이라는 최고 법원

창립자이다. 이의 판결이 실제로 제재력이 있고 번복될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이 판결의 권위와 결정에 실제로 요청되는 것, 즉 사실

상의 무류성을 부여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건국 공로자들과는 달라 스스로 무류성을 지니고 있

었다. 따라서 교회의 최고 법원에  무류성을 사실상으로 줄 수 있었다. 아니 주

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만일 주지 않았다면 이의 판결이 전 회원에 대해서 제재

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그릇되고 불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마땅히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될 것이다. "이 결론은

조금도 빈틈이 없다"는 말이 드디어 그 법률가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그러므로

교황이 공식석상에서 선언하는 결정은 제재력과 번복될 수 없는 성질이 있는 만큼

논리상 필연적으로 무류성이 없을 수 없다.     

 

 

 이제 이 지성의 소리가 과연 역사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지를 살피기로 한다.

곧 이러한 무류성을 -역사적 사실로써-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의 첫 번째 교황

인 베드로에게 주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보상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광경이다. 베드로는  방금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역사적 신앙 고백을 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

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다음의 말로써 베드로에게 보상했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

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베드로에게 사도들의 수위권과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릴 권한을 주신 이 장엄

한 약속은 분명하게 아람어 문구(文句)로 표현되어 있고 독특한 유다 말투와

속어(俗語)가 풍부하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 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맛도 힘

도 없어진다. 예컨대 예수께서는 게파(Kepha)라는 말로 ’베드로’와 ’바위’의 두

가지를 다 표현했다. 곧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이렇다. "너는

바위(게파)니라. 나 이 바위(게파)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죽음의 힘’이라는 표현은 죽음 또는 죄악의 힘을 뜻한다. 열쇠를 준다는 것은

유다인의 비유로 권리를 준다는 뜻이다. 오늘에도 열쇠는 재치권(裁治權)을 상

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저명한 인사가 큰 도시를 방문했을 때, 시장은 그에

게 큼직한 열쇠를 주는 수가 있다. 이것은 그가 그 날 하루 그 도시를 다스린다

는 권리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하신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아람어

말투를 현대의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러하다.

 

 

"너는 내가 교회를 세우려는 튼튼한 바탕이니,  죽음도 악도 이를 부수지 못할

 

것을 네게 보증한다. 또 내가 네게 교회를 다스리고 맺고 풀고, 또 옳고 그름과

 

의당함을 결정할 권리를 주노니 네 판결은 하느님이 친히 인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지도할 것을 서약했다

 

 영원히 감명 깊은 최후 만찬 때,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악이 쳐 이기지 못할

것을 보증하고 한 신앙 안의 형제들을 인도하고 북돋울 책임과 권리를 주었다.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너희를 제멋대

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다오."

 

 그리스도는 부활한 후 베드로로부터 사랑과 충성의 맹세를 받고서 이렇게 말

했다.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이 말씀으로써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양우리 안에 있는 평시도뿐 아니라 무리 안에 있는 장로와 제자들과 사도들까

지도 자양분 많은 진리의 양식으로 먹여 기를 책임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볼 수 있는 으뜸인 베드로에게 집중되어 있는 그르칠 수

없는 교도권을 주셨음은 다음의 말씀에서도 명백하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

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

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표현은 구약과 신약 성서에 약 90번 나오는데,

그 때마다 부여된 사명의 성공을 보증하는 특별한 하느님의 도움을 준다는 뜻으

로 쓰여 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다. 그리스도 계신 곳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이는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종교를 가르침에 있어 교회가 거짓을 가르침으로써 세

상을 길 잃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대 교회에 명백하게 보증하는 말이다. 그리

스도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영원한 진리인 나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말미암아 말하며 가르쳐 너희들

 

을 항상 인도하고 도와 주겠노라."    

 

 

 

그리스도, 진리의 성령을 보낼 것을 약속하다

 

이와 똑같이 그리스도는 진리의 성령을 사도들에게 보내실 것을 약속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

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으로써 교회의 사명을 지도하기 위해서 초대 교회에 진리

의 성령이 항상 함께 계실 것을 보증했다. 교회가 신적 창설자의 가르침에 대

해서 변함 없는 충성을 다하게 되리라는 이 보증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

의 으뜸인 교황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교회의 무류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 밖에도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에게 맡기신 전 인류를 가르

치는 신적 명령(神命)을 그르치지 않게 인도할 것을 보증하는 말씀이 많지만,

이상 말한 것만으로도 마음을 터놓고 읽는 사람이면 이를 확신하기에 넉넉할 것

이다.

 

 

 

간격을 어떻게 건널까?

 

 따져 봐야 할 문제가 아직 좀 남아 있다. 첫째, 내가 이상의 말을 했을 때 어

떤 대학 교수가 질문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가 베드로와 그의 동료 사도들에

게 그르침 없이 가르치도록 보호하고 지도할 것을 보증한 증거는 성서에  많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로부터 오늘날의 교황까지에는 크나큰 간격

이 있지 않습니까? 1세기에 베드로에게 부여된 무류성을 20세기 오늘의 교황도

누릴 수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 때에 내가 그 교수에게 답변한 대답을 여러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그리스

도께서 베드로와 그 동료 사도들에게 맡긴 사명은 온 인류를 가르친다는 것이

다. 이 사명은 마지막 한 영혼이 조물주의 품안에 안겨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

다. 이렇게 그들의 사명은 계속되어야 할 것인데 베드로와 그 협력자들도 당시

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게 마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명백하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사도들은 세말(世末)까지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들의 후계자들의 인격과 함께 세말까지 있

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조리 있는 결론을 부인하려면, 그리스도는 그 당시 살고 있던 사람들의 영

혼만을 구하려 했지 그 후대의 영혼은 상관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될 것이다. 그

렇지만 그런 소리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세기를 이어

온 인류에게 그의 가르침을 정확히 전하도록 마련해 놓았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오직 오류를 범하지 않게 보호하는 신적(神的) 교도권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오늘의 교황도 또 앞으로의 그의 후계자들도 첫 교황인 어부 베드로에게 부여되

었던 것과 꼭 같은 무류성을 누리고 있다.     

 

 

 

그르칠 수 없는 성서만으로 넉넉한가?

 

둘째, 최근 가톨릭이 아닌 교파의 고위 교직자가 교황의 무류성에 대해서 설교

했다. "우리 편에는 그르칠 수 없는 성서가 있다. 성서만이 무류성이 있을 뿐이

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도저히 배겨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모든 이를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그 고위  교

직자에게 나는 공손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은 성서에 대한 당신 개인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그르침 없이  믿든지 믿

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만일 그르침 없이 믿는다면 그것은 곧 당

신이 스스로 당신 자신의 무류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교황에 대

해서만은 무류성을 부인하고 있다. 우리는 교황에게만 무류성을 주장한다.

 

 당신 생각을 따르면, 성서를 읽는 수억의 사람들이 제각기 다 무류성이 있지만

교황만은 없다는 말이다. 곧 성서를 읽는 사람이면 다 교황이 되고, 그 반면 교

황만은 교황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당신은 교황 한 사람의 무류성을 인정하지

않는답시고 성서를 읽는 사람의 머리 수효만큼 무류성을 만들어 놓고 있는 셈이

다.

 

 또 만일 당신의 성서 해석이 옳다는 것을 그르침 없이 확신하지 않는다면 무류

성으로써 해석하는 자 없는 무류성의 성서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게다.

 

 어쨋든 그르칠 수 없는 산 해석자 없는 무류성의 성서는 무의미하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무류성이라는 것이 인쇄된 성서 글자에서 독자의 마음 속으로 저절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라면 모르겠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개신교의 무수한 분파가

무엇을 말하는지 보면 명백하다."

 

 

어느 서적이든지 그 의미 해석에 대한 쟁론을 서적 자체가 해결하지 못한다는

가톨릭 교회의 확신에 찬 입장을 앞의 글에서 이미 이야기 한 바 있지만 교회

가 탄생하기도 전의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의 사물을 꿰뚫어보는 혜안

(慧眼)을 지닌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들어보자.

 

 

 

 "그 서적에게 백 번 물어보라. 백 번 같은 대답을 하리라. 무식한 자에게나 궤

 

변론자에게나 다 같이 찢길 터이니… 그 저자가 나와서 명백히 그 뜻을 해석하

 

기 전에는 그 서적은 모욕만 받을 것이다." (Plato Pheod., 60)

 

 

 

 

잡탕

 

이 사실은 비(非)가톨릭 작가 말록(W.H. Mallock)의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

(Is Life Worth Living?)’에 잘 쓰여져 있다.

 

"어떤 초자연 종교든지 무류성을 포기한다면 곧 반(半)계시 종교로 자처함이 뚜

렷하다. 이것은 반은 자연적이요 반은 초자연적인 잡탕이다. 따라서 결국 순전

히 자연적 종교일 수 밖에 없다. 계시 종교임을 공언(公言)하려면 불가불 무류

성을 공언해야 한다. 그런데 계시되었다는 그것이 첫째 분간되기가 어렵고, 둘째

이해되기가 어렵고, 셋째 여러 가지 서로 모순되는 것을 한꺼번에 뜻한다면 그런

계시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어쨋든 무류의 계시가 되려면, 다시 말해서 적

어도 우리에게 계시로 나타나려면 성서 자체와 동등한 권위가 있는 성서 해석권

이 필요하다."

 

 

참으로 이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통일을 보존하기 위하여 무류의 교도권

을 세웠음을 부인하는 이에게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겠다.

 

"우리의 건국 공로자들이 헌법 해석의 최고 권위를 마련함으로써 국가의 영구

한 통일을 보존하게 한 그 예지(豫知)를 그리스도는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

다면, 이런 말은 결국 하느님은 슬기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건국 공로자

들이 국가의 통일을 위해서 마련한 그것을 전지(全知)하신 하느님이 교회의 통

일을 위해서 마련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치에 맞는 말일까?"

 

 

 

 

지성의 자유에 대한 침해

 

 셋째로 마지막 의문이 남았다. 교황의 무류성의 교리는 지성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침해가 아닌가? 가톨릭 신자는 과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도 무

류한 교회의 시건방진 고집에 무턱대고 맹종해야 되지 않는가? 여기서 분간해 두

어야 할 것이 있다. 곧 자유에는 합법적 자유와 비법적(非法的) 자유가 있다. 먼

저 것은 진리를 믿는 자유이다. 나중 것은 오류를 신봉하는 자유로써 실제로는 지

성의 남용이요, 일종의 지성의 무정부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아무도 오류를 믿을 권리가 없음은 악을 행할 권리가 없음과 마찬가지이

다. 4에 4를 더하면 27이 된다고 믿는 자유는 정신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만

이 누리는 자유다. 지성을 지닌 모든 이가 진리를 믿어야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

는 의무이다. 이것을 자유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무류성의 교리가 명하

는 유일한 의무이다. 이는 지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기는커녕 크게 하는 것이

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마다 지성의 영역(領域)이 넓어지는 까닭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가톨릭 신자라 해서 주책없는 소리를 무턱대고 믿으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그릇된

스승에게 맹종할 리가 없다.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발명할 권리가 조금도 없다. 오

직 계시된 교리를 해석할 권리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최근의 교황들이 반포한 훌

륭한 학자적 회칙들도 엄격히 말하면 무류성이 없다. 이것들은 신앙의 교리를 단정

하는 것이 아닌 연고이다. 어떤 교리가 전체 교회를 위해서 정의되는 경우 이것은

새로 발견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함축적으로 보존되어 온 신앙 교리를 이

제 명현한 말투로 발표한다는 뜻일 뿐이다.

 

 

 

뉴먼과 킨즈먼

 

 이 교리는 가톨릭 신자의 과학 연구를 방해하지 않을뿐더러, 과학이 명백히 증

명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지도 않는다. 진리는 절대로 진리와 모순이 될

수 없다.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

려 자극이 된다. 옥스퍼드 운동의 선구자였으며 성공회의 천재 학자였으나 오직

진리만을 찾아 로마의 품에 안겼던 뉴먼(Newman) 추기경이 지적했듯이, 무류성은

 

"필요에 응한 보급이며, 필요의 정도를 넘지 않는다. 이 목적도 이 효과도 인간

사상의 자유나 힘을 약하게 함에 있지 않고, 그 남용을 억제하는 데 있다."

 

 델라웨어 성공회의 주교였고, 그 교회의 가장 위대한  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킨즈먼(Frederick J. Kinsman) 박사가 1930년 나와 함께 어느 대학교를 방문했

을 때, 그는 대학생들에게 그전에 그가 썼던 ’살베 마테르(Salve Mater)’의 글

을 되풀이해서 강연한 적이 있다.

 

 

"교회에 대한 나의 태도는 온전한 복종이다. 어떤 이는 ’지성의 자살’이라 욕

한다. 그렇지만 나는 차라리 ’부활’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체험한 이상 말마디를 가지고 다투고 싶지는 않다. 가톨릭 신자로서의 내 주요한

의식은 새로운 자유다. 기본스 추기경은 내게 짧은 편지를 써 보내 주었다.

’당신이 틀림없이 봉착될 외적 곤경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내적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내가 체험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먹을 갈아 부은 듯한 캄캄한 밤에 산 같은 파도가 춤을 추는 바다에 파선된 쪽

배에 들까부르는 뱃사공의 나침반과 같이 짙은 안개처럼 둘러싸인 오류 속에서

종교 진리를 찾는 길손을 위해 무류성의 등대가 여기 있다. 이것은 진리의 항

구로 이끌어 주는 확실한 길잡이이다. 이는 인자하신 성부께서 만대에 이

르기까지 계시 진리를 자손들에게 그르침 없이 전해 주기 위하여 마련한

보호자이다. 그러므로 교황직의 무류권은 온전히 합리적일 뿐더러, 자손 만대

에 그르침 없이 진리를 전해 주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패이다.

 

 

 

 

 

 

 

 

 

 

 

 

 

 

 

- ’The Faith of Millions (억만인의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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