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No'라고 말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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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kimstella] 쪽지 캡슐

2000-05-03 ㅣ No.1120

외국에서 산지 21년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날 때 모든 친척들이 "쟤가 커서 뭐가 될는지..." 했다고 합니다.

신동이라서? 아니요. 너무 나쁜 아이라서? 아니 그것도 아닙니다.

단지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알고 자라났고 또 환경이나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그렇게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는 No라고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핀잔 아닌 핀잔을 같은 한국인이나 또 외국인 직장 동료들에게서 가끔 듣습니다. 대부분 웃으며 "예, 해 드릴께요"라고 말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사표’가 아니라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외국에 와서 살기 때문에 그렇게 된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외국인들은 오히려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표시하니까요.

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날의 기억이 날이 갈수록 새로워지며 바뀌어진 성격입니다.

외할머니는 거의 나를 만드셨습니다. 글, 글씨, 스케이트, 음악....그런 것들이 거의 외할머니의 ’극성’같은 정성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 할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시던날.... 초겨울이었고, 나는 감기 기운 때문에 학교에서 조퇴를 하고 집으로 왔었습니다. 할머니는 허리를 좀 두드려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나는 짜증 어린 얼굴로 대답했지요. "할머니, 나도 아파서 조퇴한거야. 좀 자고 해 드릴께" 할머니는 조금 슬픈 얼굴로 - 아니 이건 지금의 내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많이 부어 있던 할머니의 얼굴은 표정을 읽기 힘들었으니까요 - "해 주고 싶어도 못 하게 될 때가 곧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만 자고 해준다는데 그러네..." 투덜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가 나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 밤...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을때 할머니는....

정말 10분만 더 기다리시지 않고 주님 곁으로 가신 후였습니다.

그땐 그냥 울기만 했지요. 나는 어렸고, 그 일로 내 자신을 성찰할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30년이 흐른 지금까지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나는 매번 그 생각을 하면 새로운 눈물이 흐릅니다. 가슴에 진실로 통증을 느낍니다.

내가 할머니 투병 중 매일 허리를 두드려 드렸다 한들 한번 안하겠다고 한 그것에 비할 수 있을까요. 할머니는 내게 새로운 성품을 주시고 가신것이 아닐까요.

이제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웬만하면, 만일 그것이 나를 정말 죽을만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하지 뭐.

나중에 다시 눈물이 흐르게 하지 말고.... 지금 조금 피곤하고 말지 뭐.

사랑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 그대들에게 감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나 자신도 아직 그걸 완벽히 실천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 웬만만 하면, 그저 해 주는 사랑을 하자고. 그것이 나중에 진실로 웃을 수 있는 길이라고.

주님 주신 사랑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지, 마치 먼지 한알갱이 같은 그 실천조차 못하고 사는 우리가 아닌가 말입니다.

그래서 배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No라고 말하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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