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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이제는 여기에 (연극 금관의 예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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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lby00523] 쪽지 캡슐

2018-03-02 ㅣ No.28348

일본 조총련 발매 '금관의 예수' 싱글 LP

얼마전 전설적으로만 떠돌던 일본에서 발매된 김민기님의 '금관의 예수' 앨범자캣을 공개해드렸지요?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금관의 예수는 일본에서 발매된 2장의 싱글 LP가 더 존재합니다.

하나는 일본가수가 일본어로 직접 최입한 '금관의 예수'와 '서울로 가는 길'이 수록된 싱글 LP가 있고 또 한장은... 가히 환상적인 앨범자캣을 담은 토요미술사 발매의 김지하 시(詩)를 노래한 2곡이 수록된 싱글 LP가 있습니다.

이 싱글 LP의 뒷면에는 양희은이 노래한 '금관의 예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친 김에 블러그 친구들에게 자캣을 공개합니다. 이 음반은 골수적으로 포크를 사랑하는 음악친구로부터 입수했습니다.

추후 시간이 나면 '늙은 군인의 노래'가 금지되면서 야기된 양희은의 동종 음반이 6가지 버저으로 변신을 거듭해야 했던 기구한 사연을 담은 음반이야기를 소개할께요. 사회적 상업적 논리 때문에 아픔을 담고 탈색과 변색을 거듭해야 했던 그 음반이 궁금하지요. 보시면 너무 흔하게 보아온 음반일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음반 몇번째 버전일지 맞춰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출처 : 최규성 블러그

우리시대의 명반 명곡 우리시대 명곡 명반

'김민기 1집' 1971년 대도레코드 창작앨범 시대 연공식 신호탄…

한국 포크음악의 전설을 담다. 사랑·이별 타령 뛰어넘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뇌 노래에 담아

▲ 김민기 1집 초반 1971년 대도

김민기1집 재반 1972년 대도 '세노야'수록반

1970년대는 김민기의 ‘아침이슬’로 시작되었다 해도 무방하다.

1971년에 발표된 그의 1집 은 ‘기념비적’이라는 찬사조차 2% 부족한 명반중의 명반이다. 그러나 빛나는 찬사 뒤엔 한 미술학도의 인생을 반체제 혁명가 못지않은 탄압과 감시의 가시밭길로 몰아넣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민기란 이름 뒤에는 ‘저항’과 ‘금지’라는 긴 그림자가 오랫동안 길게 드리웠다. 하지만 금지시키고 죽이려 해도 그의 노래들은 시퍼렇게 불멸의 생명력은 과시하며 국민가요로 등극했다. ‘아침이슬’을 비롯해 ‘친구’, ‘꽃피우는 아이’등 김민기 1집에 수록된 노래들은 그에게 ‘한국포크의 전설’이란 월계관을 씌웠다.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하자마자 낙제를 했다. 곧바로 휴학을 한 그는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림물감 값이 부족했기 때문. 이때 고교동창 김영세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포크듀오 ‘도비두’ 결성을 제의해와 대학가와 시내 음악다방에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학업보다 음악에 매력을 느낀 김민기는 1970년 6월 29일 명동 YWCA 청개구리 창단멤버가 되었다. 그곳에서 고교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양희은과 운명적 만남을 가졌다.

 이후 김광희, 방의경,송창식, 김도향등 많은 포크가수들과 음악교류를 시작했고 평론가 최경식, CBS 김진성PD등과 친분을 맺으며 그의 노래가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래를 부르라’는 평론가 최경식과 기독교 방송김진성PD의 지원으로 음반제작의 길이 열렸다. 서울음대의 정성조와 김광희의 도움을 받아 1971년 11월 전설적 명반인 첫 독집을 발표했다. 또한 듀오 도비두가 노래한 ‘친구’와 누나의 친구 김광희 곡 ‘세노야’가 김인배 크리스마스 캐롤집을 통해 연속으로 발매되었다.

 김민기의 음악은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선동적인 운동권 노래로만 인식되어왔다. 그의 노래는 확실히 이전과는 틀렸다. 사랑과 이별타령으로 일관된 대중가요의 표현 한계를 넘어 삶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뇌를 은유적으로 담은 시적인 노랫말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김민기 1집은 외국의 히트 팝송 번안에 급급했던 이 땅에 창작 앨범의 시대를 열어 제친 공식 신호탄이었다. 음악 색깔도 다양했다.

 ‘친구’ ‘저 부는 바람’ ‘꽃 피우는 아이’ ‘그날’ 같은 노래들은 클래식 기타의 선율로, 정성조 쿼텟의 연주가 더해진 ‘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길’ ‘종이연’ 등은 재즈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피아노와 현악으로 연주된 ‘아침이슬’은 차라리 클래식이었다. 남북을 초월한 민족가요 ‘아침이슬’은 휴학 중 맨발로 동숭동을 배회하며 새 학기를 기다리다 ‘그냥 그저 재미삼아 그림의 이미지를 노래로 바꿔 본’ 노래라 한다.

1997년 이 노래의 친필악보는 참여연대의 유명인사 기증품 경매에서 150만원에 팔려나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포크 명곡 ‘친구’는 1968년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동해안으로 여름야영을 갔다가 한 후배가 익사를 당했을 때 사고를 알리기 위해 서울로 돌아오는 야간열차 안에서 자신의 슬픈 심정을 담은 노래였다.

이 음반은 화두는 최초의 금지곡 '꽃피우는 아이'. 연속적으로 퉁겨대는 힘찬 기타 파열음 사이로 흘러나온 구수하고 힘찬 그의 목소리는 묘한 매력을 발산하며 상당기간 음반은 제법 팔려나갔다. 1972년 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환영회 무대. 초청가수 김민기는 후배들에게 ‘꽃피우는 아이’등 노래를 지도했다.

유신정권이란 통제의 암흑기에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반정부 분위기를 신입생들에게 심었다”는 죄명으로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후 그의 독집음반은 전량 압수, 폐기되었다. 데뷔음반을 녹음했던 이청은 “마스터테이프를 압수당하고 제작에 관여한 모든 관계자들이 수차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받아야 했다.”고 전한다. 금지조치 이후 그의 음반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억압의 시대 지하로 울려 퍼진 보이지 않는 최고의 인기 음반

민주화 상징으로 외국어도 알려져...금관의 예수로 일본서 발매

▲김민기 금관의 예수 앨범 일본발매

▲김지하 양희은노래 금관의 예수 싱글
일본발매

▲일본가수 나카야마 치나슈 금관의 예수
싱글

금지된 김민기 1집은 입소문을 타면서 노래들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 증폭되어갔다. 그래서 수거되어 자취를 감춘 그의 음반은 불법 복사 카세트테이프가 음성적으로 거래될 만큼 찾는 이가 급증했다. ‘보이지 않는 최고 인기음반’이 되어 버렸다.

이에 총 10곡이 수록된 초판은 재킷과 수록곡이 다른 4가지 버전이 소문 없이 줄을 이어 발매되었다. 그 중 듀오 도비두 시절에 녹음한 ‘세노야’와 연주곡 ‘4월’이 수록된 재발매 초반은 음반 콜렉터들이 가장 탐내는 귀한 음반이다.

1979 년 12월 궁정동 사건 이후 민주화의 봄기운이 완연해졌다. 1980년 5공화국이 출범되면서 대국민 유화책으로 해금인사들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김민기에게도 서울의 봄기운이 불어오는 듯 했다.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불우 아동 돕기 자선공연은 오랜 침묵을 깬 그의 공식 재기무대다. 그때 대규모관제행사 ‘국풍81’이 기획되었다. 정권에서 상징적 의미로 김민기의 참가를 종용했을 만큼 세월은 변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후 보이지 않는 통제는 질긴 생명력을 이으며 계속되었다.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광주 민주화 항쟁은 김민기라는 이름은 시인 김지하와 더불어 한국 민주화를 대변하는 음악적 상징으로 해외에 까지 알려졌다. 금지된 그의 첫 독집이 ‘금관의 예수’라는 타이틀로 일본의 조총련계로 여겨지는 레이블을 통해 소량으로 발매되었다. 부제로 ‘지하저항의 노래’라는 타이틀이 한글로 붙어있는 음반이다. 비밀리에 발매된 이 음반은 공식적인 음반레이블은 찾아볼 수 없고 음반 고유번호 ‘SS-3593’만이 선명하다.

1면은 ‘금관의 예수’를 취입했던 양희은의 노래 8곡이 수록되어 있고 2면엔 김민기의 1집 수록곡 8곡이 그대로 수록되었다. LP한 장에 무려 16곡을 담고 있는 특이한 이 LP는 한동안 존재여부를 놓고 격론이 오갔던 전설적인 희귀음반이다. 이후 2장의 싱글LP가 더 발매되었다. 하나는 일본가수가 일본어로 직접 취입한 '금관의 예수'와 '서울로 가는길'이 수록된 싱글LP고 또 한 장은 일본 토요미술사가 발매한 양희은의 '금관의 예수'가 수록된 싱글이다.

1984년 김민기는 서울대 후배들인 ‘메아리’와 대학 노래패 ‘새벽’ 출신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제작을 지휘했다. 이 음반은 기관원들의 압력으로 3년을 묵은 뒤 1987년에야 세상 빛을 보았다. 이즈음 그의 1집은 직장인의 한 달 봉급과 맞먹는 30만 원대의 고가로 거래되며 더욱 귀한 몸이 되었다. 대중의 수요 욕구가 여전했던 것. 그 바람에 두 번이나 본인의 허락 없이 재발매 되었다. 현대음반에서 1987년 9월서 문제 곡 ‘꽃피우는 아이’가 삭제된 보라색 재킷에 이어 1990년 1월엔 초반과 똑같이 재차 발매했다. 마스터가 없어 복각 처리된 불법음반들이다.  2004년 이번에는 스스로 1집과 ‘공장을 불빛’ 노래복원작업을 시도해 6장의 CD박스로 발표했다. 대중가요사상 음반 1장이 이렇게 공식 비공식으로 수도 없이 재발매된 유례는 찾기 힘들다.

  2007년 ‘괴퇴 메달’ 수상자로 선정된 그는 “나는 깃발을 들고 뭐라 외친 적이 없다. 내 작품은 한마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칙칙한 구석을 들춰내는 것들이다. 그러니 힘을 잡고 있는 사람들 눈에 나는역적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노래들은 희망을 노래하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들이다”고 말했다. 그의 노래들은 통제된 시대의 가위눌림에 고통 받았던 70년대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시원한 외침 같았다.

 

그가 의도했던 아니건, 그의 노래들은 대중에게 억압의 현실로부터 해방감과 서로를 하나로 묶는 일체감을 안겼다. 그래서 김민기는 동시대의 젊은이에게는 세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80년대 이후 세대에겐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최근 ‘가요LP음반이 비싸다’는 소문을 타고 지하에서 숨죽였던 수많은 김민기 1집이 지상으로 쏟아져 나와 흔한 음반이 되었다. 명반의 자존심은 굳건하지만 고가희귀음반의 대명사라는 지위는 박탈당했다. 그의 1집 음반은 재발매를 둘러싸고 최근 저작권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oopldh@naver.com <ⓒ 한국아이닷컴>

주여이제는여기에 -  연극 '금관의 예수' 중에서

김민기3 (1993, 서울음반)

김민기 金敏基 / Kim, Min-Ki 1951-

B면 3.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연극 금관의 예수 중에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1971년 원주에서는 가톨릭 문화운동과 민족문화운동을 화이부동(和而不同) 차원에서 융합하려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싹텄다. 그 중심에 김지하가 있었다. 김지하는 가톨릭의 진보적 사상과 남미의 해방신학 및 개신교의 민중신학적 맹아를 일찌감치 예감했다. 1971년 지명수배자가 되어 강원도 탄광지역에 피신해 있던 김지하는 그 무렵 ‘금관의 예수’란 희곡 한 편을 썼다.

김지하는 이 희곡에서 거지 창녀 문둥이 술주정뱅이 같은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이 예수의 머리에서 금칠한 장식을 벗겨냄으로써 예수를 본래 모습으로 되살려냈다. 로마제국과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권력화한 기독교 계층에 의해 콘크리트에 갇혀 있던 예수가 ‘가시관을 쓴 예수’,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에 처형된 예수로 전위(轉位)된다.

예수 고상(苦像)의 웅변에 성직자와 수녀, 신자들이 흐느껴 우는 등 ‘금관의 예수’는 기독교계에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주제음악인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김지하의 글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노래로, 양희은이 음반으로 내서 유명해졌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금관의 예수' 공연과 김민기

1973년 무렵,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을 중심으로 카톨릭권의 문화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일환으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이 공연에는 김민기 외에 많은 연극패 탈패들이 참가했던 바, 이를 계기로 김민기는 연극패, 탈패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노래 '금관의 예수('주여 이제는 이곳에'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첫 발매된 양희은의 음반에는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이 달려있었다)'는 첫 공연지인 원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작곡되었다.

이렇게 우울한 노래는 금지곡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후에 양희은이 음반에 취입한 곡이다. 이 이야기는 모두 70년대 중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회의 부는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증가했지만 그것이 오직 한쪽으로만 기울기 시작하던 그 시절.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주의 존재가 필요했던 시절의 간절한 욕망을 담은 이 노래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서슬 퍼렇게 들리는 것은 한국 사회의 아픔이고 또 한국 교회의 상처이다.

-양희은이 음반에 담을 때는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바뀌고, '태양도 빛을 잃어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가 '어두운 북녘땅에 한줄기 빛이 내리고'로 바뀌는 등 각종 코메디가 자행되었다. 단어 몇개를 바꿈으로써, 우리의 아픔을 헤집으려 만든 노래가 삽시간에 북쪽을 비판하는 노래가 된 것이다. 박통, 브라보.

 

♬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가사 ♬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겨울 한 복판 버림 받았네, 버림 받았네)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가리라, 죽어 그리로 가리라
고된 삶을 버리고 죽어 그리로 가리라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네
이 기나긴 가난, 차디찬 세상 더는 못 견디겠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우리 구원하실 그분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출처 : 인터넷 여기저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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