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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욕먹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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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송 [hsson] 쪽지 캡슐

2002-09-08 ㅣ No.38296

 

    1. 열열한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던 사울은 그리스도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던 바리사이파 입장에서 보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여러번 어겼던 예수를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를 사칭하는 사기꾼, 가짜 메시아로 여겼을 것이고, 따라서 그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잘못된 길에 들어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강제로라도 제 정신이 들도록 감옥에 쳐넣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잡아들이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 극적으로 회개하게 되지요. 그때 그리스도께서 빛 속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울은 목숨 바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사도로 전환하게 됩니다(사도행전 8장 이하).

     

    그런데 사울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율법을 수호해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율법을 상대화하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고 확신했을 겁니다. 그런데 다마스커스 사건은 이런 사울이 자신의 주관적인 의도와는 달리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다시 말하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던 사울은 사실은 하느님을 욕되게 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경우를 들어서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것이 죄인지도 모를수 있다"고 말하지요.

     

    2.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짓이라고, 그분을 욕먹이는 짓이라고 하는 분이 자신의 말이 먹혀들어가지를 않으니 고정관념의 벽이 높다고 한탄하시네요. 거의 ’순교자적인’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면서 소위 자신의 ’진리’의 말에 귀를 전혀 기울이지 않은 굳은 마음의 천주교 신자들이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들고 있다고 한탄하면서,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것이 죄인지도 모를수 있습니다"고까지 얘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분은 가톨릭 신자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한탄하기에 앞서, 하느님께 이들의 ’굳은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청하기에 앞서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신의 주장이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 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째서냐고요?

     

    1)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그분을 떠보려고 했지요. 그 중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이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르 22,34-40).

     또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남겨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말씀을 받아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갈라 5,14). 사실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에도 보면 구원과 비구원은 바로 이웃사랑, 그것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 대한 이웃사랑으로 판가름 납니다.

     

    그런데 박 용진씨는 안식일교 설립자가 본 환시에 굳건히 의존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이 모든 계명의 골자요 으뜸이라는 것이지요. 분명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의 골자요 으뜸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선포하셨는데, 박 용진씨는 안식일이 모든 계명의 골자요 으뜸이라고 합니다. 물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한 방편이지만, 다는 아니지요. 그렇다면 안식일이 마치 모든 율법을 대표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박 용진씨는 예수님의 말씀을 축소하고 오도하는 것이 됩니다. 그분은 천주교와 교황이 십계명의 한 조항인 안식일 규정을 바꾸었다고, 하느님의 계명을 인간이 바꾸었다고 비난을 했는데(물론 잘못된 비난입니다. 성서 안에서 이미 안식일 다음날, 주일을 지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자기 스스로 남에게 던진 그 비난의 화살이 부메랑이 되어서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진 꼴입니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것이 죄인지도 모를수 있다"고 말하지요.

 

  2) 박 용진씨는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창립 200년도 안된 안식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던 그 이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1800년 이상의 교회 역사 안에서 살았던 수많은 신자들이 다 지옥갔다는 말인가요? 아우구스티노는 물론 프란치스코 성인,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한국의 수많은 순교자들, 가난한 이를 위해서 일생을 헌신했던 마더 데레사 등등 이런 분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다 지옥에 갔다고요?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란 말입니까? 이런 주장 뒤에 있는 하느님 상은 어떤지를 보자는 것이지요.

 

 안식일라는 계명 하나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과 구원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옥에 쳐넣는 그런 하느님은 자신의 명령 하나 어겼다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폭군과 과연 어떻게 다릅니까?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안식일 규정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살던 세리와 창녀들을 버리지 않으심으로써, 하느님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자비로운 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자신과 함께 못박혔던 죄수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아마도 안식일과는 무관하게) 일생을 죄인으로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서 회개한 그 죄인에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박 용진씨는 어떻게 만들었나요? 안식일 준수 그 하나를 구원과 비구원의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아주 옹졸하고, 속좁고, 답답한 인간을 닮은 하느님으로 만든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역설이 가능하답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좋은 것이지만, 한 가지만 뽑아서 그것이 모두인양 하다보면 그런 우를 범하기 쉽지요. 이와 연관지어서, 악마도 예수님을 유혹할 때 성서 구절을 이리 저리 인용해가면서 ’박학다식’하게 유혹했다는 것(마태 4,1-11), 한번 깊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지요.

 

우상숭배가 뭡니까? 하느님 아닌 것, 사람이나 짐승, 자연등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한정된 생각을 절대화 시키는 것 역시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한 가지 생각과 관념으로 고정시키려는 태도,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배척하는 태도, 그것이야 말로 정말 위험한 우상숭배입니다.

 

3) 교황제도는 예수께서 원하신 바가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는 박 용진씨만이 아니라 많은 개신교 신자들도 동조합니다. 반면 가톨릭 교회는 마태오 복음 16장 18절, 요한 복음 20장 15-19절을 근거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반대자들은 이 구절을 달리 해석하면서 자기들의 반대 주장을 합리화합니다. 하지만 꼭 이 구절만을 근거로 얘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황제도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생겨났습니다. 십인 십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일치와 화합을 이루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미 예수님 제자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있었고, 초대 교회에서도 잘못된 가르침을 퍼트리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혼란과 분열을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내적, 외적 분열의 위험은 교회 역사 안에서 반복되었고,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가 깨지지 않고 복음 안에서 일치와 화합을 유지하도록 봉사하기 위해서 교황제도가 형성된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황 제도는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해서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교회 구성원들의 잘못과 약함으로 인해서 1053년 동방교회가 갈라져 나가고, 1517년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갈라졌지만, 가톨릭 교회가 그나마 지금의 일치와 화합을 이루고 있는 것은 교황 제도에 힘입는 바가 큽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바입니다(요한 복음 17장 참조). 교황 제도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그 일치와 화합을 위해 봉사한다면, 실제로 2000년 간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비록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봉사해왔다면, 바로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제도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꼭 성서 자구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를 바탕으로 좀더 ’창조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자녀라면 꼭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 따르나요? 아이 때나 그렇게 하지요. 성숙한 자녀는 꼭 부모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뜻을 헤아려서 실천하지 않을까요?

 

3. 이 게시판에는 가끔씩 개신교 신자분들이 오셔서 가톨릭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을 가합니다. 그 비판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아주 날카롭게, 또 어떤 분들은 가능한 포용력있게 받아들입니다.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겠지만, 이런 분들은 대부분 귀를 막고 우리 얘기는 듣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들이 우리의 설명과 반론을 듣고 설득되리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글을 쓰느냐? 개신교 신자분들의 비판과 반론을 통해서 우리 가톨릭 신앙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공부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의도에서 씁니다.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이단이 나타났을 때 그것과 싸우면서 기존에 믿고 실천하던 바를 재정리하고 보충해서 정통 교리가 형성됐거든요. 이와 유사하게, 또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뿌리를 더 깊게 뻗듯이, 우리를 흔드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신앙이 오히려 견고해질 수 있답니다.

 

긴 글이었습니다만, 골자는 계명을 철저히 지킨다고 하면서, 정통 신앙 운운하면서 하느님 욕먹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설적이고 무서운 사실이지요. 그러기에 끊임없는 반성과 식별이 요구됩니다. 또한  남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하겠고요. 자기 성찰 없이, 남의 말에 귀를 막고, 자기 말만 되풀이 하는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주관적인 의도와는 달리 하느님 욕먹이는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 자신이 그런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야겠지요.

 

한가지만 더 보태면, 가르침이 아무리 옳아도 그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 역시 하느님 욕먹이는 짓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그 말씀을 선포하면서 정 반대로 산다면, 사랑과 용서를 말하면서 무관심과 복수의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주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 방해자가 될 뿐입니다. 힌두교도였던 간디의 말을 자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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