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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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6, 1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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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04-11 ㅣ No.171421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6,10)하고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6,11)  

많은 군중이 모여든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 곧 병자들의 병을 치유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여드는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끼니가 걱정되셨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해결책을 갖고 계셨지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6,5) 하고 필립보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묻는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생뚱맞게 충분히 먹을 만큼의 빵을 살 수 있는 돈의 액수를 먼저 걱정합니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눈치가 빠른 안드레아는 필립보와 달리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6,9) 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결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 또한 필립보와 비슷하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6,9)하고 이내 부정적인 생각을 드러내 보입니다. 긍정인 듯 긍정 아닌 부정, 곧 5,000명을 먹이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할 것이다, 는 태도 말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서도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고 탓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의외로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6,10) 하고 평온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고서는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가 언급한 아이가 가진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6,11) 이는 곧 예수님은 막무가내로 당신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제자들에게 스스로 해결책을 찾도록 유도하시고, 그 범위 안에서 해결 방안을 찾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가 가진 작고 부족한 양이었지만, 자신이 가진 전부를 타인을 위하여 기꺼이 내어놓을 때 그것이 아무리 작고 하찮아도 결코 작거나 부족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십니다.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그것을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도 충분히, 부족하지 않도록 넉넉하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충분히 먹고도 남긴 조각으로 무려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하신 표징 곧 빵의 기적, 나눔의 기적입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방법은, 보통 없음, 無에서 있음, 有를 창조하시지만, 때론 하느님께서는 비록 사람이 갖고 있는 하찮은 것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때 곧 있음을 나눌 때 그것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시길 더 원하십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고 그에 따른 여성과 아이들을 합치며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군중이 아무도 부족함 없이 충분히 먹은 이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전이나 지금도 오천 명이 아니라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 기아 인구는 8억 5,000만 명으로 이전보다 1억 5,000만 명이 더 증가했다고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세상에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늘 복음의 어린이처럼 자기 나라가 가진 것을 가난한 나라와 나누려는 마음이, 가진 자가 없는 자와 나누려는 마음이 없기에 세상 곳곳에서 기아로 죽어간 이들이 많습니다. 나눔이 곧 사랑이고 기적입니다. 이기적인 자신을 넘어서는 이타적인 마음이 곧 기적입니다. 작은 아이는 부유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가 되시고, 가난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신 예수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이며 가시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지, 표징을 통해 드러난 신비적이고 비가시적인 하느님의 마음, 하늘나라의 신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한 일과 그로 인해 사람들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을 통해 일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내어 맡기면서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 곧 당신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무르고자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6,14~15참조)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홀로 아버지 계신 곳에 아빠 하느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산으로, 하느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일을 하고 기꺼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 계신 곳으로 물러가야 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마태 4,4) 

사도행전에서, 율법 교사 가말리엘은 동료들에게 “ 저 사람들(=사도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5,38) 하고 제안합니다. 때론 우리도 하느님의 일을 한답시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하느님께 대적하는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섣불리 판단할 일이 아니고 하느님께 맡기며 때를 기다리고 내버려 두는 것이 낫을 수가 있습니다. 복음의 아이처럼 가말리엘은 자기 생각을 솔직히 나눴기에 동료들은 기꺼이 수긍했던 것입니다. “주님,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을, 곧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마음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을 필요한 이들과 나눌 수 있는 당신의 작은 아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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