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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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태오 (高宗玉 마태오)신부님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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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1-01 ㅣ No.594

한해가 마지막 가는 어제밤. 저는 토론토에 계시는 고마태오 신부님께 밤 11시 55분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약 5분간만 통화를 하다보면 외로우신 고신부님께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를 전화로나마 들려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토론토 서쪽지역, 스카보로에 있는 천주교 양노원에 홀로계실 신부님을 생각하며 전화를 했는데 신부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그 시간이 현지시간으로는 아침 9시 55분이라 신부님께서 인슈린 주사를 맞는 시간이라서 방에 계실텐데 했는데..... 끝내 통화를 못하고....

오늘 1월1일 새벽에...고마태오 신부님께서 감기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주님 품으로 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시간이 그곳 시간으로 어제 아침 7시40분(서울시간 밤9시 40분)이었다고 하니 저는 결국 돌아가신 후에 전화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민족분단의 현장인 38선이 지나가는 개성 여현마을에 태어나서(1930년생)

독실한 천주교 신자셨던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17세에 38선경비대 보조원을 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목격하고, 이를 피할 마음으로 해군에 입대한 것이 계기가 되어 海兵隊 상사가 될 때까지

한라산 공비토벌을 비롯해 저 유명한 도솔산전투에 이르기까지 숱한 전투를 치루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그가 휴전 후에 제대를 하여 늦깍이로 신학교에 입학, 2년을 다니다가 불란서유학길에 올라 낭시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아 

몬트리얼에 있는 프랑스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받아 캐나다에 갔다가 때마침 독일광부출신 및 한국인 들의 캐나다 이민 붐으로 인하여 캐나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한 한국인 미사를 집례하다가 오늘날 신자 3천명에 이르는 몬트리얼 한국인성당을 설립하고, 이어서 토론토 한국인성당(현재 교인수 7천명) 주임신부로 봉직하셨으며 미국의 산호세 성당 주임신부로도 일하신 바 있습니다.

 

84년부터 약2년 반 동안 한국 천주교회의 부름을 받아 본인이 그토록 소원하셨던 북한선교회 일을 맡아 파리에 가 계시면서 북한인민들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북한말을 배워야 하고 그들이 세뇌교육을 받은 주체사상도 알아야 한다면서 북한 책을 구해 보고(빨간 물 들었다 오해도 많이 받으셨지요), 스스로 노가다 일을 하고 6개월 동안 딱딱한 나무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하셨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산호세 성당으로 귀임, 후에 43년만에 고향인 북한 땅 개성 부모님 산소와 평양의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기도 하셨다더군요.

 

고마태오 신부님께서는 1968년 몬트리얼에 계실 때 자신이 직접 체험한 6,25 전쟁의 비극을 고발하며 동족상잔의 아픔을 보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사람이 다시 하느님을 찾는 과정을 그린 "모든 길은 神에게로"라는 자전소설을 佛語(안응렬교수 번역판 국내 출간)로 출판,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오자 이후 "사랑의 지도"외 全6권(가톨릭 출판사 간행) 등 소설과 "잔느 수녀님께"(바오로 딸 간행) "조국과 민족은 하나인데" 등 20여권의 주옥같은 신앙저서를 내신 작가 신부님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고마태오 신부님 책이 어떤 책은 20판이 넘게 많이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고신부님은 자신의 책 판매에서 나오는 印稅를 몽땅 여주에 있는 '라파엘의 집' 등 맹인선교회에 기부하시고 정작 본인은 캐나다 한국인교인들이 구성한 '고마태오 신부 후원회'에서 양노원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딱한 실정이었습니다.

40여년간 해외에만 계시면서 교포사목에만 전념 하셨지만 에트랑제처럼 떠돌아 다니시다 보니 몬트리얼교구에서 주는 퇴직금도 몇푼 되지 않았고 복지국가라고 하는 캐나다 정부에서 받는 년금이 채 3백불이 안 되어서 신자들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으시다고 본인께서 실토하시더군요.

한국인이라고는 본인 외에 한 사람도 없는 양노원에서 때때로 자신을 찾아주는 고마운 한국인 신자들이 없다면 토론토 한인성당 미사를 드리려 가는 1주일 동안 한마디도 모국어를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시던 외롭고 가난하셨던 고마태오 신부님께서 어제 2004년을 마감하는 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신 것입니다.   

 

이민 붐을 타고 무작정 캐나다로 온 초기 이민자들에게 일자리와 잠자리를 얻어 주시기도 하시며 한없는 사랑을 베푸셨던 분,

한때 캐나다 정부의 문화성 자문위원으로 계실 때는 불법체류자들의 구제및 정착을 위해 밤낮을 모르시고 뛰어 다니셨던 분. 심지어 한국군에서 김일성대학 출신이라 따돌림 받다가 겨우 동향인 홍종철씨 배려로 브라질로 이민, 이후 브라질 이민생활에 염증을 느낀 경원하(북한 핵무기 책임자로 국내에 알려짐)씨를 본인이 캐나다 정부에 보증을 서서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오게 하고, 외아들인 경원하씨가 단순히 82세의 어머니를 뵙고자 북한에 다녀온 것을 배신자로 몰아붙여 끝내 유능한 핵물리학자를 북한으로 망명케 한 것을 아쉬워 하시면서 우리들 한국인의 고질적인 편견을 질타하시던 고마태오 신부님.

자신에게는 인색하면서 남에게는 항상 너그럽고 큰사랑을 베푸셨던 분이셨습니다.

 

여담이 되겠습니다만 그분은 제게 숙제 하나를 남겨 주고 가셨습니다.

작년 추석 연휴를 이용하여 저는 고신부님의 부르심을 받고 토론토에 갔었습니다.

당시 75세의 고신부님은 당뇨합병증으로 인해 4개의 바퀴가 달린 밀대에 의지하여 몸을 움직이셨으며 시력마저 나빠져서 그 좋아하시는 글 쓰는 일도 하실 수 없는 상태셨습니다. 본인의 죽음을 예견하셨든지  고마태오 신부님께서는

"내가 죽기 전에 꼭 써놓고 하늘나라로 가야만 할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권형제가 맡아 써 달라"

다시 말하면 대필이었습니다.

10일 동안 숙식을 거의 함께 하며 녹음을 해 와서 지금 저는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부님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신데 제가 이 일을 해서 뭐 하겠습니까?

 

하지만 병원에 가시기 며칠 전 전화를 주셔서

"내년 부활절에 서울에 가서 그 책 출판기념회를 했으면 좋겠어" 하시던 고마태오 신부님의 허스키한 그 음성이 제 귀에 쟁쟁하여 손을 놓을 수 없습니다.

아무런 대가가 없어도 그 음성을 신부님께서 제게 남기신 마지막 유언으로 여기고 신부님께서 저를 통해 남기고 싶어 하셨던 그 이야기를 꼭 책으로 엮어 신부님의 영전에 바칠 것입니다. 물론 출판기념회도 열 것이구요.

고 마태오 신부님, 마음 편히 가지시고 주님 품에 편히 쉬십시요.

세상에 오셔서 너무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안녕히 가십시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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