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2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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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위치(吉事尙左, 凶事尙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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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수 [mokmarcus] 쪽지 캡슐

2014-06-25 ㅣ No.206584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군자나 높은 사람은 평소의 생활에 왼쪽을 높여 상석(上席)으로 친다<君子居則貴左,「道德經」偃武篇, 李滉의 「退溪集」,「淮南子」繆稱訓에는 凡高者貴其左로 됨>. 제사에도 왼쪽을 숭상하여 받들어(吉事尙左) 부부의 위치가 남자는 사당의 동쪽 계단에 서고 부인은 서쪽 계단에 서 있는다. 남성이 동쪽에 있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본뜬 것이며 여성이 서쪽에 있는 것은 달이 서쪽에서 뜨는 것을 본 뜬 것이다(「禮記」禮器).

남자가 큰절을 할 때에 오른손을 아래로 하고 왼손을 위로 하여 포개어 잡고(좌공수左拱手) 무릎을 꿇어 땅에 짚고서 몸을 굽혀서 이마가 손등에 이르도록 절을 한다<경기곡권(擎?曲拳), 凡男拜 尙左手 拜手稽首「禮記」內則편>. 왼쪽은 양(陽)이고 양(陽)은 길상(吉祥)에 해당되므로 남자 역시 양이므로 그렇게 한다.

장로자각종색선사 좌선의에 보면 스님들이 참선 할 때에도 방석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앉는데 먼저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의 무릎 위에 올려 겹친 다음에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무릎위에 밖으로 포개어 앉는다. 다만,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국보 90호)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위에 걸쳐 연꽃 좌대에 앉아 오른손 끝을 빰에 대고 왼손은 복숭아뼈에 얹고 두 눈은 실눈을 뜨고 엷은 미소를 머금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폐백, 홀(笏), 서옥(瑞玉)을 들거나 잡을 때에도 음(陰)에 해당하는 오른손을 아래로 하고 양(陽)에 해당하는 왼손을 위로 포개어 받들며(操幣圭璧 則尙左手, 尙은 上으로 높인다는 일반적인 뜻임,「禮記」曲禮下편) 잡는다.

군주가 앞장서 걸어 가면 신하가 뒤따르고 아버지가 앞서면 아들이 뒤 따르며 남편이 앞서면 부인이 뒤 따르므로(君先而臣從 父先而子從 夫先而婦從,장자」天道편) 고귀한 자가 앞서고 비천한 자가 뒤 따르되 남편은 우측으로 비켜가고 부인은 좌측으로 비켜 갔으나(道路 男子由右 女子由左, 禮記」內則편) 지금은 남성이 찻길쪽으로 가고 여성이 인도쪽으로 가서 차량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하려는 차원으로 바뀌었으며 차량이나 사람 모두 우측 통행이다.

사내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에는 나무로 만든 활을 대문 왼쪽에 걸고 여자 아이일 경우에는 여자의 상징인 수건을 대문의 오른쪽에 걸으며(子生 男子設弧於門左 女子設?於門右, 「禮記」內則편), 태어난지 3개월 말 쯤에 사내 아이는 머리를 왼쪽으로 땋고 여자 아이는 오른쪽으로 땋는다.

그러므로 남자가 죽으면 활(弓)을 사용하지 못하여 활집에 넣어(굴독 屈?, 활전대 라고도 함) 곳간안의 못걸이<위아래로 통할 곤(?)>에 걸어 조상할 조(弔)자로 결합되어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하는 근조(謹弔)로 쓰고 여자는 죽으면 왼쪽 허리에 차는 수건<세(?)>을 쓰지 못하니 수건의 뜻이 들어있는 근조<謹○, 입구(口)부수 아래 수건 건(巾)자와 결합한 조(弔)의 속자>로 표기해야 타당하다고 사료된다.

여자가 큰절을 할 때에는 왼손을 아래로 하고 오른손을 위로 포개어 잡고(우공수右拱手) 한다(凡女拜 尙右手, 「禮記」內則편). 오른쪽은 음(陰)으로서 여자는 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만 혼사등 길사(吉事)에는 머리를 숙이고 이마에서 손을 내리면서 숙배(肅拜, 공경할 숙)하고 흉사(凶事)에는 남자처럼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대어 이마가 손등에 까지 이르는 수배(手拜) 한다(婦人吉事爲肅拜, 凶事爲手拜, 「禮記」少儀편)고 하였다.

공자가 누이의 상(喪)에 오른손을 위에 올려 놓으니 제자들도 따라서 오른손을 위에 올려 놓아서 공자가 말하기를 “누이의 상이기 때문에 오른손을 위로 놓은 것이다”하니 그제서야 모두 왼손을 위로 올려 놓았다(「禮記」檀弓上편)고 한다. 불자는 무릎을 꿇어 앉아 머리를 숙이고 두손바닥을 펴서 상대방의 발을 들어 받드는 형상의 두면예족(頭面禮足)으로 예배한다. 그러나 성균관 전례위원회가 간행한「우리의 생활예절 36쪽, 1992년」에 흉사시 남자는 오른손이 위로 가고 여자는 왼손이 위로 간다는 공수(拱手)는 문헌근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전주이씨 봉향회에서는 종묘 제례나 산릉 제례시에 양손을 들어 머리에 이르게 한 다음 어깨 넓이 만큼 팔을 벌리고 양손은 팔자(八字) 형상으로 하여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땅에 짚은 다음 이마를 주먹 하나 들락날락 할 만큼 사이를 띄어서 배(拜)하고 흥(興)하기를 4차례 반복하여 고두례(四叩頭禮)로서 절을 한다. 고두(叩頭)는 곧 이마를 조아림이니 손과 머리가 땅에 이르는 것을 고두라 한다. 절한다는 것은 공경을 표해 드린다는 뜻이니 몸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려 조상에게 보답하는 것이다.

배례(拜禮)는 재배계수(再拜稽首)가 원칙이었으나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임금이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천호수 삼전도(三田渡, 원래는 麻田渡 삼밭나루 이었음)에 9층단으로 쌓은 수항단(受降壇) 아래에 엎드려 청태종에게 만주족의 풍속대로 무릎을 꿇고 한 번 절할 때 마다 고개를 3번씩 끄덕이는 삼배 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예를 행한 후 그들의 풍속을 받들어 고두례를 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도 문관이 동쪽 왼편 해당 품석<品石, 창덕궁 인정전 뜰에는 「정조실록」정조원년(1777) 9월 6일(戊辰) 품석을 세움>에 서고 무관과 종친은 서쪽 오른편 품석(品石)에 배열하여 조회한다<文東武西, 「태종실록」태종3년(1403) 6월 9일(乙卯)條 및 勤政殿朝賀之圖, 세종실록 222권>. 조선조의 관직에서도 의정부 좌의정과 우의정의 품계가 다같이 정1품이나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영의정에 오르기 때문에 좌의정이 높다. 따라서 종1품의 좌?우찬성(左?右贊成), 정2품의 좌?우참찬(左?右參贊), 세자시강원 좌?우빈객, 정3품의 통례원 좌?우통례, 승정원 좌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우승지 등의 좌우 관직이 붙은 동일한 모든 품계에서는 좌가 높고 우가 낮다.

오른쪽을 상석(上席)으로 칠 때에는 전쟁이나 상례(喪禮) 등 흉사 때이다(凶事尙右). 상장군을 보좌하는 편장군은 왼쪽에 자리 잡아 있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있으며<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道德經」언무(偃武)의 章> 군자가 전쟁을 할 때에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기고(君子 用兵則貴右) 장수의 행오에는 왼쪽을 소중히하고 병졸의 행오에는 오른쪽을 소중히한다(軍尙左 卒尙右,「禮記」少儀편) 하였으니 전쟁을 상례로 간주함을 의미한다(以喪禮處之).

고대 로마의 마지막 황제 줄리어스 시저(B.C102-B.C44)는 오른손으로만 악수를 하게했다. 오른손끼리 맞잡으면 상대방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왼손잡이는 왼손으로 칼을 휘두를 수 있어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면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으므로 믿지 못할 상대로 취급했다. 그래서 왼손잡이를 라틴어로 불길하다는 뜻을 가진 ‘시니스타 (sinister)'라고 불렀다.

종묘 정전(正殿)의 신위(神位) 봉안에 있어서도 오른쪽 제 1실엔 시조 태조와 그 정비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신덕고황후 강씨(神德高皇后 康氏)로 시작하여 왼쪽 마지막 제 19실에 순종과 정비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계비 순정(純貞)효황후 윤씨로써 서쪽으로 상(上)을 삼았다(以西爲上, 西首位次, 西高東卑).

우(右)는 음(陰)으로서 음(陰)은 흉(凶)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사 지낼 때 역시 이 방향으로 하여 오른쪽이 왕릉이고 왼쪽이(?左) 왕후릉이다. 지도(地道)에서는 오른쪽을 존귀한 곳으로 삼으니 오른쪽이 남성이고 왼쪽이 여성이(考西?東) 된다. 또한 제수진설에서도 제사상을 향해 볼 때 오른쪽을 동쪽이라 하고 왼쪽을 서쪽이라 하여 서쪽을 상으로 하고 차린다<祭享陳設皆以西爲上, 「정조실록」정조 2년(1778) 12월 2일(戊午)조>.

인도인은 오른쪽을 성스러운 세계이고 정(淨)의 방향이며 정상의 방향으로 보나 왼쪽은 속세의 세계이고 부정과 비정상의 방향이라 일컫는다. <신약성서>「마태오 복음(25장 31절-46절)」에서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이들만 하느님의 오른편에 두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나 왼편에 세운 이들은 저주를 받아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 보낸다고 하였으니 서양인들은 성호를 그을 때 오른손가락을 머리에 댄 다음에 가슴으로 내려왔다가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부호를 그리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읊조리어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관습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좌?우익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프랑스 시민혁명(1789)직전인 5월에 삼부회의를 소집하여 국왕 루이16세(1774-1792)가 앉은 좌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귀족과 승려대표가, 평민대표들은 왼쪽에 앉았다. 그후 평민대표들을 처음으로 좌익이라 불렀다. 첫 입법의회 회의(1791.10.1)에서 의장석을 중심으로 왼쪽에 급진적인 자코뱅파(Jacobin)를, 오른쪽에 온건한 페이앙파(Feuillant)가 앉았다. 이때부터 자코뱅파를 좌익, 페이앙파를 우익이라 불러 정치적 행동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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