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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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2 제8회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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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임 [kr3217] 쪽지 캡슐

2013-08-24 ㅣ No.200453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 2

 

제8회 하느님의 자기 계시 1/ 탈출 3,1-6

 

안녕하십니까?

자, 탈출 3,1-6. 저는 다음과 같이 제목을 붙였습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 1. 1이 있다는 거는 2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기 계시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기 계시 후에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겁니다.

 

곧 자기 계시 1, 부르심 1.

자기 계시 2, 부르심 2.

자기 계시 3, 부르심 3.

이런 어떤 리듬으로 탈출기 3장이 진행 된다는 것을

숫자로 어렴풋이 힌트를 드렸습니다.

 

3,1-6에서 핵심 구절은 6절입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 직역하자면 "나는 너의 아버지의 엘로힘"

곧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이."라는 이것이

자기 계시. 하느님께서 그렇게 처음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겁니다.

 

탈출기 3장 1절은 탈출 2,11-22에 장소적으로 연결이 됩니다.

앞에서 모세가 미디안까지 갔는데 미디안에서 있는 그 내용입니다.

탈출 3,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그 사도행전 7장에 등장하는 , 앞서 얘기한 그 스테파노의 연설이죠?

모세의 생애에 대한 언급을 따른다면 이제 미디안 가서 40년을 있는 겁니다.

모세가 처음에 미디안에 가서 우물가에서 이트로의 딸들을 만난 후에.

거기서는 르우엘이죠? 르우엘의 딸들을 만난 후에 40년의 세월을 지난 겁니다.

 

이제 아들도 낳고 그러면서 모든 것이 그대로 흘러가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흐름이 3장부터 등장합니다. 당장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앞선 2장에서는 모세의

장인 이름이 르우엘이었는데 여기서는 이트로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신학교에서 한번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한테 설명을 해 보라고 했더니 어떤

친구가 손을 번쩍들고 "장가를 두번 간 게 아닐까요?" ^^*~~~

그래서 제가 한참을 웃었는데, 그렇지는 않을 꺼 같습니다.

 

따라서 모세에 관한 이야기가 워낙 폭넓은 이야기다보니까 모세에 대한 전승이

여러 가지가 있는 겁니다. 하나의 전승에서는 그 장인의 이름이 르우엘입니다.

르우엘 그러면 어떤 뜻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엘'은 하느님이란 뜻이고, '르우'라는 

히브리 말 '레아'는 이웃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의 이웃', '하느님의 친구'라는

이름입니다. 또는 여기서 등장하는 이트로라는 그와 같은 이름

 

예, 모세는 장인의 양 떼를 돌보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본래 장인 이트로의 딸들이

하던 일이기도 하고, 창세기의 성조들이 하던 일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면에서

본다면은 사회적 하층 계급의 일입니다.

 

그는 우리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갑니다.

탈출 3,1: "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직역하자며는 광야를 지났다는 것이 광야 뒷쪽으로 해서 하느님의 산으로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중에 시나이 사건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그림으로 그리자면은 광야가 이만큼 있고 산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광야와 산이 어디까지가 광야고 어디까지가 산인지가 상당히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것처럼 탈출기가 진행이 됩니다. 나중에 이 시나이 산에 가서, 그림을 못

그려서 그런데 이게 시나이 산입니다. 이쪽에 있는 게. ^^*~~~

 

시나이 산에 가서 어떤 대목이 나오냐 하면 이스라엘은 요 경계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얘기하느냐하면 요 산자락도 밟지 말라고 말합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은 관광객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ㅡ지금 성전이 없어요.

거기 모스크 밖에 없습니다. 성전이 다 무너졌으니까. ㅡ 관광객들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정작 유다인들은 거기 근처에도 못 갑니다. 북쪽에 있는 통곡의 벽에

가서 벽만 잡고 기도하지 성전 안으로 못 들어 갑니다. 왜냐?

 

자칫 잘못해서 율법에서 "너희는 절대로 거기 가지 마라." 하는 거를 잘못 밟으면

안 되니까 근처에도 가질 않습니다. 비슷한 대목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성스러운

공간이니까 절대로 그 근처에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 요 광야를 넘어서 이제 모세가 이 산으로 가는 겁니다. 따라서 그 표현은 광야

뒷쪽으로. 광야가 있고 산이 있으니까 이제는 산의 영역에 모세가 들어갔대는

겁니다. 이 광야 뒷쪽으로라는 탈출기 3장의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단 한번

등장하는, 여기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모세가 양들을 몰고 왜 거기까지 갔는지에 관해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금은 좀 운명적으로 이렇게 표시가 되는 거 같애요. 하지만 텍스트는 분명히

그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산,

직역하자면은 엘로힘의 산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산의 이름은 호렙입니다.

 

우리들은 호렙산과 시나이 산이 같은 산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텍스트를 이미

읽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19세기 후부부까지 주석가들 조차도 호렙 산과 시나이

산이 다른 산이라고, 두 개가 있는 두 개의 산이라고 생각하는 주석가들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요즘은 다 같은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렙이라는 말 자체는 '거칠고 메마르다'라는 그와 같은 어감이 그 단어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에게도 산은 굉장히 신비로운

장소입니다만 고대인들은 특별히 산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신령한 장소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옛날에 고대 근동에 있는 산의 꼭대기를 파보면 전부다

제단들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분들 왜 태백산 같은데 올라가 보면 천신단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계룡산 뭐 이런데 가보면 산은 좀 신비한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뭐 산신령 이런 것들이 있는 것처럼 신비한 장소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집트 피라미드도 사실은 뭐냐하면 그렇게 산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그와 같은 기억들이 이제 그들의 종교 생활 안에서 재현 되면서 산 모양의

건축물을 지었대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피라미드를 지었을까?

 

아, 따라서 이집트 민족이 거기 원래 살았던 것이 아니라 본래는 산이 있었던

곳에서 산에서 신을 섬기면서 살았는데 이제 이집트의 사막엔 산이 이제 더 이상

없다보니까 인공적으로 산을 만들 수 있는 장소, 그런 건축물들을 만들고 거기서

제사를 지내는 그런 용도로 아니면 지쿠랏을 만들 것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절에서 야훼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우리 말로는 주님의 천사라고 번역이 됐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직역하자면, 야훼의 천사가 모세에게 보여집니다. 따라서 의미만 보면 이런

겁니다. 야훼의 천사는 모세 앞에서 모세가 자신을 볼 수도 있고, 자신을 못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두개 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보게끔 만듭니다. 투명 망또를 벗은 겁니다. 여기서는 보게

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 천사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문장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히브리 말 문장이.

 

그래서 결국 주석가들도 그 문장에 있는 그 철자를 조금 바꿉니다. 본래 문장만

가지고는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그 철자를 바꿔서 거기에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냐하면, 불꽃, 불길 또는 화염이라는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본래의 그 문장은 이렇게 좀 어려운 문장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 오르는 뭔지 모를 뭔가의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뭐 이런 식일 것입니다. 근데 그 철자를 조금 바꾸니까, 불길,

화염 이렇게 볼 수 있겠다.

 

우리 말에서는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라고 얘기하는데 이게 불꽃이라고 그러면

조금 작고 귀엽고 이렇게 폭죽 놀이하는 그런 어떤 장난스러운 느낌이 있는데

본래의 느낌이 그게 아니라 화염입니다. 굉장히 불이 무섭게 타오르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런 불길 속에서 모세에게 주님의 천사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떨기나무는 히브리 말로 '쎄네'라고 합니다. 어떤 단어랑 비슷합니까?

'쎄네' ㅡ '시나이' 시나이 산의 이름은 떨기나무로부터 유래 됐을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짐작합니다.

 

※ 떨기나무 ㅡ 쎄네 ㅡ 시나이

 

예, 그렇게 가시덤불, 떨기나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사실은 그것이 정말

무엇인지는 정체는 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어원으로 본다면 그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짐작할 수 있는. 그것이 불에 타지마는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의 장면.

 

따라서 여기서는 그 내용이 어떤거냐하면은 두 가지 이미지가 서로 겹쳐져 있는

겁니다. 하나는 불길, 하나는 떨기나무. 그래서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타고 있지는 않는 그런 내용입니다.

 

불에 타고 있지만 타고 있지 않는. 동일한 공간 안에 있지마는 하지만 그 두 가지가

서로 만나지는 않는. 제가 옛날에 자연 과학을 좀 공부해서 그러는데 물리학자들

중에 평행 우주이론 뭐 이런 거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동일한 공간 안에도 사실은 여러 우주가 겹쳐져 있다. 서로 우리가 만나지 못하지만

그 평행 우주에 가보면은 나와 똑같은 하지만은 나랑은 조금 다른 그런 뭐 어떤

나라는 존재가 거기도 또 있다." 뭐  이런 식의 것들이 나오고 요새는 그런 공상과학

드라마나 이런데서도 그런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애요.

 

여기서 얘기하는 거는 뭡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과 하느님의 초월적인

세상의 그 존재가 겹쳐져 있기 때문에 그 불길이 거기 있어도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겁니다. 예, 그것을 보고 모세가 의문을 갖고 더 자세히 볼려고 가까이 갑니다.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4절에서부터는 갑자가 야훼가 등장합니다. 2절에서는 누가 나왔었죠?

야훼의 천사가. 그런데 갑자기 멤버가 교체가 돼요. 예, 무언가 본래의 이야기에는

야훼의 천사가 있고 야훼로 교체된 건지 아니면 본래의 이야기는 야훼가 있고

여기서 야훼의 천사로 교체가 된 건지 여기에 관해서 우리가 좀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뭔가 좀 이상해요. 처음에는 야훼의 천사가 있었는데 이제는 야훼가 등장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와 비슷한 현상이 언제 일어나냐 하면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만날 때 일어납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야훼의 천사가 그에게 왔다가 갑자기 아브라함이 야훼와 대화를

나누는 그와 같은 대목들이 등장합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에 관해서는 예전에 한번

설명의 말씀을 드렸는데 생각이 안 날수도 있지요. ^^*~~~ 다시 조금 있다가

설명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 여기서 야훼는 두번에 걸쳐서 모세를 부릅니다.

2,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그를 부르셨다.

 

왜 두번 부를까요? '모세야!' 부르지 않고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는 거는 뭔가

다급하게 부르는 겁니다. 다급함이 좀 웃겨요. "신발을 벗고 들어와라!" ^^*~~~

조금 우리가 설명이 필요한 내용입니다.

 

자, 비슷한 내용이 여호수아기 5,15에도 등장합니다.

"주님 군대의 장수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네가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여호수아는 그대로 하였다."

 

주님의 군대 장수가, 야훼 군대의 장수가 여호수아, 모세의 후계자지요.

그에게 말합니다. "네가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우리가 요 이론만 따진다면 성전에 들어갈 때 신을 벗고 들어가야 됩니다.

'신을 벗어라.' 왜 신을 벗으라고 했을까?

거룩한 장소에는 왜 신을 신고 들어가면은 안 되는 것일까?

 

사실 우리나라 전통으로 우리가 생각한다면은 집에 들어갈 때에 신을 벗고

들어가는 전통을 생각한다면 이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혹시 이슬람 모스크에 들어가 보신 분은 알겠는데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다 신을 벗게 돼 있습니다. 양말은 신어도 되는데 신은 벗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 신장들이 쭉 있어서 신을 벗게 되어 있는.

아직도 그 전통을 지키고 있는 거죠.

 

따라서 그런 전통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사실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단지 서양 사람들에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거 같기도 해요.

 

탈출기 3장과 여호수아기 5장은 모두 거룩한 장소, 즉 성소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오지 마라, 그리고 신을 벗어라"라는 두 명령은 모세가

거룩한 장소에 대한 경외를 지닐 것을 그리고 그 거룩함 앞에서 자신을 낮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연 모세가 야훼의 명령대로 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 텍스트는 명확하게

얘기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텍스트는 계속해서 야훼의 자기 소개를

이어갑니다.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의 아버지의

엘로힘,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이 바로 나다."

 

여기서 이 직역이 우리 말 성경과 차이나는 점에 대한 설명이 조금 필요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나는 뭐 이렇게 되어 있는데 히브리 말 성경에서는

'나'라는 주어가 잘 쓰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현대어 중에서 동사 변화를 통해서

주어를 안 쓰는 언어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이태리 말이라든지 이런 말들은 나, 그, 너 뭐 이런 주어들이 사용되지

않고 그냥 동사만 사용됩니다. 동사 안에 그것이 1인칭인지, 2인칭인지, 3인칭인지

그런 것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히브리 말도 그런 말이거요. 근데 여기서는 일부러 주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주어를 사용했을 때는 그 주어가 강조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바로 '나다'라는 겁니다. 그거는 너희 선조들이 하느님이라고

불렀던, 엘로힘이라고 불렀던 그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이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니 앞에 나타나 있는 그게 바로 나야라는

그와 같은 하나의 선언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부분을 번역할 때 '너의 아버지의 엘로힘,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이 바로 나야. 바로 나다."라는 그런 의미로

번역을 하게 되고 또 한가지의 문제점은 여기서 우리 말 성경과 제 번역이 같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서 "너의 아버지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렇게 나오지요?

 

여기서 '너의 아버지'라는 말은 단수입니다. 따라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걸 복수로

바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의 조상들의 하느님'이라고 번역하기 위해서.

하지만 분명히 단수이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도 그렇고 이 부분은 단지 모세에게

모세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 아버지의 엘로힘이라고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나중에 하느님이 다시 자신을 얘기할 때는 문장이 바뀝니다. 어떻게 바뀌냐하면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들의 엘로힘이다." 그때는 이제 이스라엘의 조상들,

성조들의 엘로힘이다라는 의미로 분명히 읽어야 하겠습니다.

 

예, 이렇게 3장6절에 나오는 야훼의 자기 소개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창세기

15장, 17장, 26장, 28장. 앞서서 계약을 맺는 그와 같은 장면에서 똑같이

등장하게 됩니다.

 

창세 15,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17장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등장하고,

창세17,1-2: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사람이

되어라.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26장 24절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이사악과 아비멜렉의 대목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등장하고,

창세26,24: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에게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의 수를 불어나게 하겠다."

 

창세 28,13-15에 야곱이 베텔에서 꿈을 꾸는 장면에서도 역시 비슷하게

하느님께서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그와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창세 28,13-15: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따라서 이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성조들에게 또는 모세에게 등장했을 때

언제든지 얘기하는 하나의 문학적인 양식으로 이렇게 표시가 됩니다.

 

우리가 공문 같은 거 보낼 때 그렇게 보내게 되잖아요. 항상 공문에 대한 중요한

안건을 쓰고 첫째 줄에 뭐가 들어갑니다. "귀사의 어떤 번영을 기원하며..."

번영을 내가 기원하든 기원하지 않든 어떤 번영을 기원합니다. 또는 존경하는

누구누구 님. 내가 존경을 안 해도 또는 그렇게 써야 되는 하나의 문학적인

양식의 틀로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 이렇게 하느님이 자기 소개를 하자 모세는 어떻게 하지요?

하느님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립니다.

창세 3,1-6: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느님이 만약 여러분에게 탁 나타나가지고

"누구야, 누구야!" 부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예, 어떤 분은 뭐 덥석 안겠다는 분도 있을거고, 어떤 분은 도망가겠다는 분도

있을거고, 어떤 분은 납작 엎드리겠다는 분도 있을거고, 뭐 여러가지 그런 것들이

있을 겁니다. 근데 마냥 반갑기만 할까요? 겁도 좀 날까요? ^^*~~~

겁도 좀 날 거 같애요.

 

탈출 33,20:"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모세가 여기서는 하느님 나도 당신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야훼 하느님이 어떻게 얘기하냐하면, 하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다 해주겠지만

하지만 너희들이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하느님의 영광이 너무나 밝기 때문에,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볼 수 없다

라고 얘기합니다.

 

1열왕19,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 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가 야훼를 만나면서 동굴 어귀로 나왔으면서 그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기 위해서.

 

이사 6,2.5 :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야훼의 주위에 천사들입니다. 사랍들조차도 어떻게 합니까? 날개를 둘러가지고는

얼굴을 가립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기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너무나 밝고

크기 때문에. 그리고 이사 6,5에서도 예언자는 뭐라고 얘기 합니까?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이제 나는

큰일났다.

 

예수님이 타볼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데 옷이 어떻게

변합니까? 하얗고 환해서 더 이상 볼 수 없도록. 나중에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는데 거기에서 환하게 빛나는 하얀 옷을

입은 젊은이들을 만나는 거, 천사들을 만나는 거, 그런 것들은 모두 천상 세계의

어떤 영광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밝아서 우리들이 감히 그것을 쳐다볼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억지로 볼려고 한다면, 여러분들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면

어떻게 될까요? 눈이 멀고 맙니다. 그것을 억지로 볼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밝음이라는 것.

영광의 밝음에 관해서 우리들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문장을 한번 이렇게 읽은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몇 가지 묵상꺼리 또는

정리해 볼 것들을 몇 가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탈출 3,1-6은 독립적으로 읽어 본다면, 그것만 딱 떼어서 읽어 본다면,

하느님의 현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에 담겨 있는 여러가지 어휘와 표현들은

구약의 부르심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문학적 요소들을 보여 줍니다. 다른 부르심

이야기들과 비교해 볼 때 탈출3,1-6은 덜 추상적이고 더 설화적입니다.

더 이야기적이고 그리고 조금은 덜 추상적입니다.

 

따라서 신학적 메세지보다는 이야기적인 구성에 더 치중되어 있는데 광야 너머에

있는 엘로힘의 산이라든지, 불타오르는 떨기나무라든지, 신을 벗고 얼굴을 가리는

모세에 대한 장면 묘사라든지 등을 통해서 성서 기자가 이야기를 얼마나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했는지를 우리가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앞서도 여러번에 걸쳐서 말씀드렸지마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신관은

내재적인 신관과 초월적인 신관이 있습니다. 내재적인 신관은 인간 세상과

신들의 세상이 함께 있는 것. 초월적인 신관은 인간 세상과 신들의 세상이 따로

있는 겁니다.

 

따라서 엘로힘의 산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재적인 신관입니까, 초월적인

신관입니까? 엘로힘의 산이, 시나이 산이 뻔히 보이는 데 있는데?

그것이 거룩한 공간이라고 해서 초월적인 개념으로 이제 나가기는 합니다만,

하느님이 사는 곳이 특별히 여기라고 우리가 얘기 했을 때 그것은 내재적인

그와 같은 신관입니다. 이런 것들이 약간 겹칩니다.

 

따라서 조금은 웃긴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했을 때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십니까, 아니면  계시는 곳이 정해져 있습니까?

예, 옴니프레젠스(omnipresence)라는 그런 라틴 말 개념으로 우리가 사용합니다.

어디에나 계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느님의 산을 따로 지정했을까?

 

반대로 우리 시대에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얘기하면서 왜 우리는 따로

성전이라는 특별히 거룩한 장소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마련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것들에 대한 질문을 우리가 함께 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종교적인 관이 사실은 그 안에서 교차하고 있는 겁니다.

내재적인 신관과 초월적인 신관이. 엄격히 얘기하면은 초월적인 신의 세계와

세속적인 인간의 세계는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이 만날 수 있도록

유일하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 그것이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어떤 전례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미사 드리는 것.

 

그런 초월적인 공간, 초월적인 신관이 본래는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지만,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체험이 전례의 현장이라고 우리가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따라서 이런 초월적인 신관을 바탕으로 한다면 야훼가 일반적인 인간들과

함께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초월적인 신관을 바탕으로

한다면 누가 필요합니까? 천사가 필요한 겁니다.

 

따라서 탈출기 3장의 이야기도 본래의 이야기는 야훼와 모세가 이야기하는 그런

어떤 직접적인 이야기의 내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조금 더 발달한 초월적인

신관의 편집자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이야기 대로 놔두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누구를 등장시키는 겁니까?

야훼의 천사를 등장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야훼와 모세가 얘기하는 것 같지마는 사실은 누가 모세와 얘기한

거다? 야훼의 천사가 모세와 얘기한 거다라고 설명하는 그와 같은 해설의

대목입니다. 인간은 감히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그런  컴뮤니케이션을 가질 수

없다라는 초월적인 신관인 조금은 후대에 발전한 초월적인 신관에 의해서 본래에

있었던 그런 전승이 조금 새로 쓰여진 것에 덧붙여졌다고 이 대목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자, 야훼는 모세의 이름을 두번 부릅니다. 창세 22,11을 보면 주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역시 두번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창세 46,2에 보면 하느님이 야곱, 이스라엘을 부르면서 또 두번 부릅니다.

"야곱아, 야곱아!" 또  두번 부르는 거 기억이 나십니까?

 

1사무 3,10에 보면은 주님께서 어린 사무엘에게 오셔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두번 부릅니다. 또 두번 부르는 거 한번 더 남았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사도 9,4에 보면 사울이 땅에 엎어졌는데 "사울아, 사울아"하고 부르게 됩니다.

신이 인간을 찾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번씩 불린 아브라함, 이스라엘, 사울, 사무엘.

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 불림 안에서 굉장히 하느님과의 조우 안에서 그 인생의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는 공통점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나중에 하느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 두번 부르시면은, "누구야, 누구야!" 하고

두번 부르시면은 아, 이건 중대한 사건이 이제부터 나에게 일어나는구나! 라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된다는 겁니다. ^^*~~~

 

자, "신을 벗어라."

유다 종교 전통에서 성소에 접근하기 위해 불결한 신을 벗어야 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법적으로도 규정이 돼 있습니다.

탈출 30,17-21에 보면 물두멍에 관한. 성막을 만들면서 물두멍을 만들게 되는데

그걸 만들고 나서 제관들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물로 손과 발을 씻게 하여라.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잖아요. 성전 안에서도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고 앞에 두 가지 건축물들이 서게 됩니다. 그 하나가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고 다른 하나는 커다란 물 그릇이 그 안에 마련되게 됩니다. 나중에 이것이

유대 습성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밥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 정결례를 하는.

 

예수님도 손 안 씻고 먹었다가 항의를 받는 대목을 우리가 읽을 수가 있지요?

예, 이렇게 전례적으로 정결을 유지하기 위한 그와 같은 규정들이 나옵니다.

따라서 여기서 "신을 벗어라." 라고 하는 그와 같은 대목들을 이것과 함께 좀

연결시켜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

나중에 신약에서 루카 7장을 보게 되면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른 죄인인 여자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요한 12장에서도 비싼 순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 발치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여 드렸던 그 마리아를 보게 됩니다. 이거는

어떤 뜻입니까? 예수님이 이제부터는 하나의 제관의 구실을 하는데 그 제사를

드리기 전에 예수님을 뭔가 준비하는, 준비시키는 그와 같은 상징적인, 전례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단지 여인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라고 얘기하기보다 예수님의 어떤 십자가

사건을 준비하는 하나의 전례적인 틀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의 발을 이렇게

닦아 드리는.

 

반면에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

요즘도 성 목요일 날 저희가 세족례를 하지요? 그런 세족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신발에 관해서만 생각해 보자면,

이사 20,2에서 야훼가 이사야에게 말합니다. "자, 네 허리에 두른 자루 옷을 풀고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여기서 신을 벗으라는 것은 이제부터 아시리아 임금이

이집트의 포로들과 에티오피아 유배자들을 알몸과 맨발로 끌고 갈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예언적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를 사회적 차원에서 해석하자면은 이렇게 맨발로 옷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은 노예 계급을 상징하는 그런 하나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명 25,5-10에서는 이것이 좀 더 분명해집니다.

죽은 형제의 아내에게 살아 있는 형제는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한다는 율법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과거에 여성을

보호하는 차원이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 주지 않을 경우에 그 여성은 신명기 25장에 따르면 그 자신의

남편의 형제에게 가서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그는 뭐라고 불리냐하면, '신 벗겨진 자의 집안' 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비슷하게 룻기 4,7을 보면 옛날 이스라엘에는 구원하거나 교환할 때 무슨 일이든

확정짓기 위하여 자기 신을 벗어서 상대편에게 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에서는 증거로 통하였다. 신발을 벗어서 상대편에서 무슨 약속을 하고

주면은 그것이 하나의 증거물이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신발이 없다는 것은 구원하거나 교환할 수 있는 그와 같은 사회적 입장이

아닌 것을 뜻하게 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뭐라고 그럴까요? 주민등록증이

없는 거라고 봐야 될까요? 아니면 뭐 그 이상의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예, 조금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신발에 관한.

 

그런데 고대의 관습에서는 신발이라는 것이 요즘에 우리가 대하듯이 그렇게 쉽게

신을 수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요즘엔 정말 그런 게 너무 풍요로워졌지요?

하지만 저만 같애도 항상 어렸을 때 보면은 정말 발이 자라서 신발이 맞지 않게

되었을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신발은 떨어질 때까지 신으면은 그 다음에 새로

신발을 하나 부모님들이 사 주시는 뭐 이랬던 세월을 저희들이 기억합니다.

 

따라서 신발은 한 켤레죠. 다. 한 켤레 신다가 다 떨어지면 새로 한 켤레를 사는.

근데 요즘에는 어느 집 신발장이나 신발들이 가득한 거 같애요. ^^*~~~

 

예, 아무튼 이렇게 우리들의 시대만 해도 그랬는데, 이 과거의 시대에 신발이

의미하는 그와 같은 것은 그의 지위 아니면 그가 갖고 있는 위치 뭐 이런 것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가 갖고 세속적인 지위, 위치 이런 것들이 유용하대는

겁니까? 안 되는 겁니다. 신 앞에서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몸에 걸치고

있을 수 없다라는 그와 같은 의미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탈출 3,7-12: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그 전부분이 '하느님의 자기 계시'라면 이제부터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이것이 7절부터 12절까지 전체를 자리매김하는

중심 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시는 소명입니다.

 

자, 7절. 시작하자마자 세 동사가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보고, 듣고, 안다. 앞에랑은 조금 다른 테마죠?  앞에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늘로 올라가자 하느님이 그 소리를 듣고 조상들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따라서 그들의 처지를 살펴보고 그리고 알게 되었다라는 건대. 여기서는 그와

같은 것들을 조금 다른 체계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보고, 듣고, 알게 되었다.

 

그렇게 보고, 듣고,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분명히 똑똑히 보고, 분명히 듣고,

알게 되었는데 그 마지막 제일 중요한 것은 '안다'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 말로

'야다'라는 그와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여기서 주석가들은 이 '안다'라는 동사가 단지 정보의 인식이라는 수준을 넘어서

이제는 백성의 고난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야훼의 내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봅니다. 백성의 고통이 이제는 야훼의 고통이  되는 거예요. 그와 같은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친밀함을 7절 시작부분에서 분명히 등장합니다.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제 뭐라고 부르지요?

" 내 백성, 너는 내 꺼야!" 이렇게 부릅니다. 너희는 이제 그들이 아니라, 단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이제 나의 백성.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에 어떤 일치된  상태, 하나가

된 상태를 이 한 단어에서 우리는 좀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고통을 알게 됨으로써 야훼는 내려 옵니다. 정녕 고통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8절 마지막에 보면은 "데리고 올라 가려고 내려왔다."라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서 야훼는 어디 있다가 내려 온 걸까요? "하늘에서요."

"아니죠. 아니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 하늘 나라로 가야 되는데?"

예, 야훼는 자신의 영토인 약속의 땅에 있다가 거기에서부터 이집트로 내려와서

백성들을 데리고 자신의 땅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하늘 나라 가면 큰일납니다. ^^*~~~

 

예, 따라서 여기서 올라가고 내려가는 그림이 우리가 알고 있는 초월적인

그림이라기보다는 약간 좀 내재적인, 야훼가 자기 영역인 고 땅에 있다가

거기에서부터 이집트로 내려와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는 그와

같은 그림입니다.

 

예, 야훼가 내려오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려는 것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는 것. 여기서 '구하다'라는 동사는 어디서도 사용되냐 하면 탈출 2,19에서

모세가 르우엘의 딸들을 구할 때. 르우엘의 딸들이 모세가 자신들을 구했노라고

얘기합니다. 그 의미는 어떤 위험, 고난으로부터 누군가를 들어서 옮기는 그런

어떤 대목입니다.

 

뭔가가 위험하니까 그거를 이렇게 들어 가지고 딴 장소로 옮긴다는 그런

어감입니다. 그렇게 구해진 백성은 이집트 땅을 떠나 여기서는, 우리 말 성경에서는

조금 이상하게 번역이 됐지요? "좋고 넓은 땅" 근데 여기서 좋다는 말이 어떤

말이냐하면 히브리 말 '토웁'입니다.

 

우리가 이미 한번 만났습니다. 어디서 만났냐하면, 모세가 태어났는데 그가

'토웁', 잘생겼다. 따라서 이 번역을 단지 좋다기 보다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여기서 가능합니다. '아름답고, 좋고' 하여튼 그렇게 넓은 땅, '토웁'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나서 "보시니 좋았다."하신 '토웁' 바로 그 의미입니다.

좋고 넓은 땅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 중에서 성지 순례 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그곳에는 젖도 꿀도 흐르지 않습니다.

^^*~~~ 그런데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젖과 꿀. 비옥함, 풍요로움의 표현인데

젖이라는 것은 동물성 비옥함이고, 꿀이라는 거는 식물성 비옥함입니다.

실지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동물적인 입장에서도 비옥하고 식물적인 입장에서도

비옥한 젖과 꿀. 예, 두 가지 뜻입니다.

 

나중에 여러분들 쭉 읽다가 열 가지 재앙을 읽게 되겠지요? 열 가지 재앙을 쭉

읽다보면은 처음에는 그 재앙이 누구에 대한 재앙이냐하면, 이집트 동물들에 대한

재앙입니다. 가축병, 종기, 모기, 등에 떼 이런 것들이 이집트에 살고 있는 동물들을

멸절시키는 그와 같은 과정입니다. 그러다가 우박, 뭐 이런 것들이 등장하면서부터

그때부터는 식물들을 멸절시키는.

 

따라서 동물들과 식물들의 세계가, 이집트의 동물들과 식물들의 세계가 피폐하게

되면서 전체가 이렇게 황폐한 땅으로 생명력을 잃어가는 그런 과정이 열 가지

재앙의 진행 과정입니다.  그에 반해서 그들이 가게 될 그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동물들도 풍요롭고 식물들도 풍요로운 그와 같은 땅으로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 그 땅에 살고 있는 여섯 민족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가나안, 히타이트, 아모리, 프리즈, 히위, 여부스.

탈출 3,17에서도 다시 한번 그 이름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순서가 조금 다르고

기르가스 민족이 추가되서 일곱 민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창세 15,19-21에 가면은, 이름이 여섯, 일곱이 아니라 열 민족의 이름이 나열이

됩니다. 카인, 크나즈, 카드몬, 히타이트, 프리즈, 라파, 아모리, 가나안, 기르가스,

여부스.

 

요즘에 있는 주석가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당시에 적어도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약 31개 정도의 도시 국가들이 있었을 꺼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지금 우리가 읽는 여기에서는 여섯 민족 정도가 그리고 일곱, 창세기로

가면은 열 민족 정도가 기억이 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 있는 그 상태에서 가장 빈번하게 어떤 접촉 내지는 갈등을 빚었던 민족들의

이름을 주로 이 텍스트 안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모든 리스트가 다 나오는 것은 아니라, 주로 그들이 갈등 내지는 관계를

가졌던 그런 어떤 민족들의 명단이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다라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중에서 어떤 어떤 민족들은 동시대 민족들이라고 조금 볼 수

없는,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그들이 계속해서 좋은 관계였던 나쁜

관계였던 그런 관계를 한꺼번에 여기서 모려서 조금은 요약돼 있는 내용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9회 하느님의 부르심 1: 탈출 3,7-1/ 하느님의 자기 계시 2: 탈출 3,13-15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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