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2일 (수)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자유게시판

지요하 선생님이 아주 조금 언급된 글인 것 같습니다.

스크랩 인쇄

홍세기 [hsg3303] 쪽지 캡슐

2010-09-30 ㅣ No.163656

내 글을 교회 주보에까지...황송했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3] 만대땅끝마을에서 만리포해수욕장까지
  성낙선 (solpurn) 기자
 
 
  
이원면의 농촌 풍경. 가을 냄새가 물씬 난다.
ⓒ 성낙선
가을

 

9월 26일(일)

 

꾸지나무골해수욕장에서 맞은 아침, 몸을 씻어야 하는데 민박집 화장실에 샴푸가 없다. 이러면 곤란한데. 성수기 때도 없었는지 궁금하다. 비누가 있기는 한데, 이놈의 비누가 물 먹은 건빵처럼 거무튀튀하다. 몸뚱이 중간 부분에 두 개 구멍이 뚫려 있는 것까지 똑같다. 때를 씻으라는 건지, 때를 묻히라는 건지 알 수 없다. 대체 무슨 용도로 쓰던 물건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세제 없이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다. 씻는 둥 마는 둥 한다.

 

아침부터 무릎이 뻐근하다. 관절이 부드럽게 구부러지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자전거 타는 자세가 잘못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요 며칠 계속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과한 운동을 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이유야 어떻든 몸에 무리가 오고 있는 건 분명하다. 언덕을 피해 다니든지, 그게 불가능하면 어디서든 쉬어가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선가 쉬어간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아직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그땐 또 몸이야 어떻든 자전거부터 타고 보자는 생각이 더 강하다. 어느새 내 몸뚱이마저 자전거 구르듯이 굴러가지 않으면 몇 발자국 못 가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그런 관성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움직이자,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해 보자고 하지만, 결론은 늘 끝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다. 도대체 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도 내 속을 모른다.

 

4만여 개의 손도장, 국보급

 

만대땅끝마을을 벗어나는 일은 덜 고생스럽다. 하루 저녁 자고 일어나면서 원기가 되살아난 까닭도 있고, 처음부터 과한 힘을 써서 언덕을 오르려 하지 않는 까닭도 있다. 만대땅끝마을을 벗어나서 이원방조제를 넘으면서부터는 대체로 곧고 평탄한 길이다. 한동안 꽉 막혔던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다.

 

앞선 길들이 시큼털털한 탁배기를 마시며 달려온 길이라면,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은 시원하고 달콤한 청량 음료수를 마시며 달리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묵은 피로가 가신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 참으로 가지각색의 길을 맛보고 있다. 이런 즐거움마저 없다면, 더 이상 이 여행을 지속하기도 힘들다.

 

이원방조제에 세계 최대 벽화가 있다고 해서 가던 길을 멈췄다. 무엇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그림은 기대 이하다. 조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벽화 위에 찍힌 4만여 개의 손도장만큼은 가히 국보급이다. 한 번 보고 말 예술이 아니다. 오래도록 보존해, 수만 명이 이 방조제에 손도장을 찍은 의미를 알게 해야 한다.

 

2007년 겨울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전례 없이 큰 기름유출사고가 발생했다. 검은 기름이 해안을 덮었다. 해수면은 물론, 파도를 타고 온 기름덩어리가 해변까지 오염시켰다. 앞서 몸으로 익혀 알고 있듯이 태안반도처럼 복잡한 해안이 없다. 해안 구석구석 스며든 기름을 제거하는 데 연 인원 120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다. 이 역시 전례 없이 큰 규모의 자원봉사였다. 그들 덕에, 기름때로 절망 상태에 놓여 있던 해안이 되살아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원방조제에 손도장을 찍기 시작한 건 그때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온몸에 기름때를 묻혀가며 자원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정신과 의지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벽화에 지금까지 약 4만여 개의 손도장이 찍혔다. 손도장 찍는 행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장에 가면, 물감과 손 씻을 물 등을 준비해 놓고 손도장 찍는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주말이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간다. 사실 벽화는 미완성 상태다. 그러니 '벽화가 조악하다'는 말은 사물을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만 말하는 섣부른 평가에 불과하다.

 

  
이원방조제, 손도장과 낙서.
ⓒ 성낙선
이원방조제

 

  
이원방조제 손도장들. 빈 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성낙선
이원방조제

 

 

괜찮은 해수욕장들, 꽤 많네  

 

이원방조제를 지나면 태안발전소 외곽을 빙 돌아가는 길이 나온다. 태안발전소 앞길을 벗어날 즈음해서 오른쪽 방향으로 학암포길 표지판이 보인다. 그 표지판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중간에 해안사구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치면 학암포해수욕장 입구 오토캠핑장이 나온다.

 

일요일 한낮, 오토캠핑장이 자동차와 대형 텐트로 가득 차 있다. 철 지난 해수욕장이 사람들로 붐비는 현상이 조금은 낯설다. 해수욕장을 사철 휴양지로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해수욕장이 전체적으로 성수기 때 못지않게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

 

학암포해수욕장은 그 자체 매우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일단 시야에 콘도니 리조트니 하는 이질적인 인공 건축물들이 거치적거리지 않아서 좋다. 백사장은 국내 3대 해수욕장이니 4대 해수욕장이니 하는 것들 못지않게 넓고 깨끗하다. 물빛은 동해안의 바다 빛이 무색할 만큼 맑고 푸르다. 학암포해수욕장이 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으면 하는 마음인데,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게 현상을 유지하는 데 그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학암포해수욕장 바로 옆에 '석갱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해변이 있다. 이 해변은 관리를 덜 받고 있는 까닭인지 무척 자유스러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사람들이 높고 짙은 소나무 그늘 아래 아무 데나 텐트를 치고 앉아 가스버너에 고기를 굽고 있다. 정돈된 분위기에 관리가 잘되고 있는 깔끔한 환경을 좋아한다면 학암포해수욕장으로, 그렇지 않고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석갱이 해변으로 가면 된다.

 

  
학암포해수욕장. 범생이 이미지.
ⓒ 성낙선
학암포해수욕장

 

  
석갱이 해변, 앞은 학암포 못지않게 드넓은 모래사장. 자유분방한 분위기.
ⓒ 성낙선
석갱이

 

꾸지나무골해수욕장도 그렇고, 태안반도의 서쪽에 있는 해변은 대체로 고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로림만을 에워싸고 있는 동쪽 해변이 검은 갯벌로 덮여 있는 것과 사뭇 다르다.

 

그곳이 어디든, 넓은 백사장에 모래가 많기로는 신두리해수욕장을 따라갈 수 없다. 신두리해수욕장은 모래로 다져진 해변으로 자동차가 들어갈 수도 있다. 모래사장이 그만큼 단단하다. 신두리해수욕장을 유명하게 만든 건, 모래사장 북쪽 언덕 위에 형성되어 있는 신두사구 덕이다. 한국 최대의 해안사구인 신두사구는 한때 사막을 연상시킬 정도로 넓은 모래 언덕이었다. 길이는 약 3㎞이고, 폭은 좁게는 0.2km에서 넓게는 1.3㎞까지다.

 

풍부한 모래가 바람에 날려 언덕을 만들고, 그 모래 언덕 위로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고 노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신두사구는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모래 언덕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던 아이들은 환영처럼 아스라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면서 더 이상 모래 언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이런 신두리사구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보전하자는 운동이 2000년대 초부터 펼쳐졌다. 신두리사구에 희귀한 동식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현재 지역에서는 이 신두사구를 '국내 최고'의 생태관광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신두사구는 지금 넓은 초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 초지에 멸종위기종인 갯방풍과 초종용 등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신두리해수욕장. 승용차 한 대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 성낙선
신두리해수욕장

 

  
아프리카 초원을 연상시키는 신두리 해안사구
ⓒ 성낙선
신두리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결국 일을 만들었다

 

신두리사구를 나와서는 의항리 좁은 땅으로 들어선다. 이 지역 역시 앞서 거쳐 온 '호리'나 '이원반도'와 마찬가지로 육지에서 바다로 불쑥 튀어나온 형태를 하고 있다. 바다를 향해 마치 뿔난 송아지 모양으로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참 다루기 힘들겠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의항리의 반도 끝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곳에서는 비포장 길로 들어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 언제나 철이 들는지. 기왕이면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자꾸 나를 충동질한다. 결과는 녹다운 직전까지 가고 만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산책로라는데, 내가 보기엔 완전한 등산로다. 자전거에 올라타는 건 일찌감치 포기한다.

 

그 길로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걸 보면, 자전거가 가지 못할 길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돌투성이에 한쪽 사면이 절벽에 가까운 산길을 능수능란하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다. 길이라고 다 같은 길이 아니다. 사람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나'라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데 더욱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백 번도 더하고 내려온다.

 

만리포해수욕장까지 가는 길에 구름포해수욕장과 의항리포해수욕장 등을 거쳐 간다. 예전엔 모두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해수욕장들이다. 이들 말고도 그냥 지나친 해수욕장이 여러 군데다. 서해안에 해수욕장이 이렇게까지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하긴 그게 어디 해수욕장뿐이랴. 포구, 항구는 왜 또 그렇게 많던지 벌써부터 이름과 위치를 헷갈리기 시작해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만리포해수욕장에 가기 전에 '야산'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독자와 통화를 했다. 서산에 계신 분인데, 내가 자전거를 타고 서산을 지나쳐 가고 있는 것을 알고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면서 꼭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내가 이미 서산을 지나쳐 태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고도, 서산과 태안이 멀지 않으니 별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분을 만리포해수욕장 근처 식당에서 만났다. 태안에 사시는 지 선생님과 함께다. 처음 만나는 분인데 낯설지가 않다. 그분이 자신이 만든 교회 주보에 실린 내 글을 보여준다. 나보다도 더 내 글을 아끼는 분 같아 황송하고 또 감사했다. 즐거운 저녁이었다. 오래간만에 겸상을 했고, 배불리 맛있는 식사를 했다. 몸조심하라는 당부 말씀, 잊지 않겠다. 오늘 달린 거리는 53km, 총 누적거리는 833km이다.

 

  
소원면 의항리 땅 끝. 신너루백사장.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
ⓒ 성낙선
신너루백사장

 

  
의항리 땅 끝에 있는 항구. 의항항.
ⓒ 성낙선
의항항
 
2010.09.29 22:26 ⓒ 2010 OhmyNews
 



291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