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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한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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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균 [baeyoakim] 쪽지 캡슐

2006-05-29 ㅣ No.99994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한글) 2 - 신희상

 

 

 

제4장

정약용의 문헌에 나타난 천진암과 광암 이벽성조


19.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갖춘 이벽" - 정약용


조선 천주교회 시작에 대한 역사 기록들 중에서 비교적, 소상히, 수차례에 걸쳐 광암 이벽성조에 대해서 뿐 아니라 강학회가 열렸던 천진암에 대해 기록을 남겨주고 있는 분은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1777년 15세 때에, 당시 23세의 이벽 광암 선생을 가리켜,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함께 골고루 갖추셨으며(현호기상투)", 또 " 어려서 일찍부터 덕을 힘써 닦으신 어른(령덕면조수)으로" 완덕의 표본이라고 여기면서 이벽성조를 존경하였다. 이때 지었던 "증 이벽"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증 이벽

(이벽선생님께 드립니다)


二儀雖不改 (이의수불개) 음과 양은 비록 고치거나 바뀔 수 없는 것이지만,

七曜迭舒卷 (칠요불서권) 일곱 요일은 날짜와는 달리 번갈아 바뀌는 것이니,

嘉木敷春榮 (가목부춘영) 좋은 나무들도 봄이 되면 더욱 생장력이 넘쳐나지만,

華 易易變 (화자역리변) 무성하게 성장하고도 또 자라 늘 변하게 되는도다.

  被驅迫 (공총피구박) 광암공은 무모한 이들한테 핍박을 받게 되어도,

不能訴餘戀 (불능소여연) 끝내 동정심으로 차마 맞 비평조차 아니하시도다.

庶物無偏頗 (서물무편파) 무릇 모든 일에 있어 결코 편파적인 법이 없으시니,

貴達安所羨 (귀달안소선) 부귀와 영달 같은 것을 뭐 그리 부러워하시리오.

賢豪氣相投 (현호기상투) 광암공은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다 갖추시었고,

親篤欣情眄 (친독흔정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손수 살피시며 다독이시도다.

令德勉早修 (령덕면조수) 어려서부터 일찍이 학문과 덕행을 힘써 닦으시니,

慷慨常見面 (강개상견면) 대의와 박애의 강개하신 모습을 그 얼굴에서 늘 보옵니다.





20. "인간세계에 내려오신 신선나라의 학(鶴)과 같으신 광암 공에게서 우리는 신의 풍채를 보았었도다" -정약용


또한, 정약용의 시문 중 "우인이덕조 만사"는 1785년 이벽성조의 장례식에 가서 지은 것인데, 그 시에서 다산은 이벽성조를, "닭과 오리떼들이 시기 질투로 헐뜯는 인간세계에, 신선나라에서 내려오신 학과 같으신 어른(선학하인간, 계목생혐진)"이시니, 그 어른에게서 우리는 "신의 모습을 보았도다(헌연견풍신)"하였다. 23세의 정약용 선생이 지어 올린 이 만사에서 우리는 이벽성조의 학식과 성덕이 일반 성현군자의 수준이 아니라, 신성한 초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21. 가을을 타고 문득 훌쩍 날아가는(승추홀비거) 학처럼, 광암 공이 떠난 지 1주년, 전처럼 붉게 물든 천진암의 가을 단풍을 보러 가서. - 정약용


한편 다산은 강학회 장소였던 천진암을 매우 자주 수차례 걸쳐 방문하여 시를 짓고는 하였다. 이를테면, 어릴 때뿐 아니라, 이벽성조께서 순교하신 지 한해가 되던 1786년 초가을에도, 24세의 다산은 단풍 구경을 할 겸 모교와 같은 천진암을 찾아 천진암 상풍을 읊었다. 가을 단풍이야 다산의 고향 마재의 뒷동산과 앞의 검단산, 및 가까운 용문산 단풍도 훌륭한데, 구태여 단풍구경을 하려고 천진암을 찾는 다산의 허전한 심정은, 잊지 못하는 광암공에 대한 생각 때문이 아니랴? 조정에서 현직으로 분망한 중에도 정약용은 이하에서 보겠지만 마치 모교를 찾듯 천진암을 자주 찾는다. 또 종종 천진암의 "암"자없이, '천진'이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천진암상풍

買酒花郞坊裏(매주화랑방리) 화랑방 동네에 들어가 술을 사가지고,

停車 子峰陰(정차앵자봉음) 앵자봉 그늘에서 수레를 멈추니,

一夜纖纖白雨(일야섬섬백우) 하룻밤 부슬부슬 내린 실 이슬비에

雨厓  紅林(우안섭섭홍림) 양쪽 산 더욱 붉고 싱싱하게 물들었네.


다산이 천진암을 방문하고 지은 시문 중에서 상당수가 교회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다산은 천진암에서 광암공의 천학도장 활동 즉, 수도와 연구와 강학회 개최 등에 참여하였음을 전제로 하는 추억의 시문들을 여러 편 남기고 있다.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를 읽어보자.


22. "천진암엔 아직도 이벽의 독서처가 그저 그대로 있는데."- 정약용


1797년, 정조 임금을 모시는 승지와 부호군 등의 현직을 역임하고 있을 때에, 35세의 다산은 형님들과 단오날 천진암에 와서 이틀 밤을 머물며 20수나 되는 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단오일배이형유천진암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단오일배이형유천진암기

단오날 두 형들과 천진암에 와서 노닐며 보니,


李檗讀書猶有處(이벽독서유유처) 이벽의 독서처는 아직도 저기 그저 그대로 있는데

苑公棲跡杳難尋(원공서적묘난심) 원공이 깃들던 발자취는 아득히 다시 찾기 어렵도다.

風流文采須靈境(풍류문채수영경) 풍류와 문채는 모름지기 신령한 경지에서라야 하리니,

半日行 半日吟(반일행배반일음) 그시절 그리며 한나절내 술마시고 한나절내 시를 읊노라.


이 시는 1797년 정사년에 쓴 것으로서, 이벽성조께서 순교(1785年 사)하신지 12년 후이고, 천진암에서 강학회가 개최되었다고 거론되는 첫번째 해(1777년)부터는 20년 후다. 이 시는 광암공이 천진암에서 독서할 때 다산이 이미 수차례 왔었거나 아니면 함께 거하며 독서를 함께 하였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만 쓸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이 독서라는 말인데, 조선시대에는 고위관리의 특수 전문연구기관이었던 독서당이 있었으니, 독서라는 말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대학원에서의 연구를 포함한 수덕적 차원을 의미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벽성조의 독서처가 천진암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원공이란 말은 원풍지인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뒤흔들고 가버린 큰 회오리바람같은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벽성조를 가리키고 있다.



23. 정조 임금이 낸 숙제 답안을 작성해주던 광암공의 문장이 적힌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던 정약용


다산공이 이벽성조를 흠모하던 마음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중용강의보』에도 절절히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다산공이 1784년 정조 임금 밑에서 태학생으로 있을 때 정조가 중용에 관하여 숙제로 내준 70조목의 질문에 대하여 작성했던 중용강의를 1814년에 전라남도 강진 유배생활 중에 54세의 나이로 보완 손질한 것으로서, 이때 옛날 태학생 시절의 그 원고뭉치를 다시 어루만지면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갑진년(1784년)에 중용에 대한 정조의 질의에 답론을 쓸 때 나는 당시 수표교에 거하던 광암공한테 물어서 했는데, 이제 광암공이 세상을 떠났으니 어디 누구한테도 물어볼 데가 없구나(질문무처)! 만일 광암 이벽이 살아있다면, 그의 학식과 덕에 나아감이 어찌 내게 비할 수가 있으랴(사광암이상존 기진덕박학기여비재)? 이제 나는 아직 살아있으나 광암공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광암공을 생각하며 옛 원고 책들을 움켜쥐고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도다(부금무권이읍체야)!"

특히 이벽성조 사후(1785) 거의 30여년 만에 첨삭보완하는 다산의 『중용강의보』문장들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몇 페이지마다 종종, "이 문장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광암의 문장이다(차광암지문)", "이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광암의 학설이다(차광암지설)", "이 뜻풀이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광암 이벽이 이렇게 뜻을 풀었다(차광암지의)", "중용을 잘 읽어봐라, 이하로는 광암 이벽의 문장이 아주 많으니라(관호중용이하다이광암지문)"하며, 그 어려운 중용강의보를 손질하며 토로하고 있다.

또 정약용 자신이 얼마나 광암공을 따랐었는 지는, 다산이 지은 녹암 권철신 공의 묘지명 중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다산)자신은 이벽을 추종하였고(종 이벽), 자기 형 정약전은 일찍이 어려서부터 이벽을 추종하였으며(상종이벽), 이벽이 제일 먼저 수령(수령)이 되어 천주교를 선전하고 다닐 때 권일신은 열성적으로 이벽을 추종하였다(이벽 수선서교 일신열심종벽)."

녹암 권철신의 묘지명을 쓰면서 다산이 밝힌 이와 같은 내용을 보충하는 의미로, 순암 안정복의 글을 살펴보자. 순암 안정복은 권철신과 권일신 두분 성현들에게 꽤 여러 편의 서간들을 보냈는데, 그 중에 광암 이벽성조께서, 수령이 되어 천주교를 처음 선포하고 다녔음을 방증하는 내용이 있다. 순암 안정복이 1784년에 권기명(=권철신)에게 보낸 서간 중에,

"제군들이 평소에는 불교를 배척하였었는데, 이제는 천주학에 빠져서 속수무책으로 꼼짝달삭을 못하는 것을 보면 그 천주학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군.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을 그렇게 감동을 시킬 수 있으리오. 그래서 내가 지난 번 편지에서 그 천주학 책들을 내게 좀 가져오라고 부탁을 했던 것일세. 그런데 최근에 이덕조가 다소간의 몇몇 천주학 책들을 가지고 자네한테 찾아 갔었다는데, 그 사람이 여기를 지나가면서 왜 나한테는 들리지 않았는지 그 연고를 모르겠네[…]."

여기서 권철신은 권기명으로, 권일신은 권성오로, 이벽은 이덕조로 부르고 있으며, 덕조는 본래 덕조를 다산과 순암이 당시 그렇게 불렀었으니, 비록 성현의 학덕을 지니셨으나(현호기상투), 고집이 세고(다블뤼의 조선순교사 비망기), 또 지조가 굳세어(호걸의 기백), 덕조를 자타가 덕조로 불렀다. 즉 덕조는, 수덕을 정조를 지키듯 지조를 가지고 마음을 잡고 계속하여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770년 17세를 전후하여 독서에 열중하던 광암공은 당시 관습으로 15세 전후에 결혼을 하는데, 학문 연구와 수덕에 열중하기 위하여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천진암 산 속에서 천학연구에 전념하며 천주교 계명을 실천하는데 열중하였기에, 외아들 이현모가 태어나는 것이 1784년이니, 꼬마신랑시대의 조혼 풍습이 있던 당시로서는 양반 집에서, 더구나 병조판서 대감 권 의 딸과 결혼하였다면, 병판감의 딸을 30이 넘도록 출가를 시키지 않았을 리도 없거니와, 다산공이, 이벽성조께서는 "일찍 어려서부터 남달리 덕을 닦으셨도다(령덕면조수)"하신 것을 보면, "일찍 어려서(조)부터"의 "조"라는 한자의 용법이 당시 10세 전후를 가르키는 것이므로(예, 조실부모),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가족들과 살면서가 아니라, 남달리 특수하게 덕을 닦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시는 정약용선생이 15세 때 결혼하던 해에 당시 23세의 광암공에게 지어드린 헌시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벽성조의 부인 유한당 권씨가 일찍 사망하는 것도, 사위 이벽이 천주학에 미쳐서 20여세의 젊은 자기 딸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마치 생과부처럼 한맺힌 고통을 주어 생사람 죽였다하여, 장인 권 은, 1785년 을사박해 때부터 천주교 박해에 적극 앞장섰던 것이다. 죽은 딸의 한을 생각하며, 사위 이벽에 대한 증오심이 가중된 것이었다.


제5장

광암 이벽 성조 조선천주교회 창립



24. 천진암에서 천학을 연구하고 수도한 광암 이벽성조의 조선천주교회 창립활동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 기록들은 모두 한결같이 광암 이벽 성조가 조선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제 조선천주교회가 어떻게 창립되었는 지 좀더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볼 것인데 이에 앞서, 그 개요를 일목요연하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천진암 독서처를 천학도장으로 삼아 유·불·천을 합류시키셨다.

② 천주교 교리강학을 신앙실천의 수련회로 발전, 지속시켰다.

③ 선비들을 모아 신도단체를 결성하였다.

④ 이승훈선생을 조선천주교회 신도 대표자로 북경에 파견하였다.

⑤ 권철신대학자를 비롯한 이승훈, 정약종, 등 량반들을 입교시켰다.

⑥ 천진암에서 수표동으로 집회소를 옮겨, 기도회 및 교리 강좌를 주관하였다.

⑦ 이가환, 이기양 등 유학자들과의 공개토론회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⑧ 명례방으로 집회장소를 이전하여 기도회 및 교리 강좌를 주관하였다.

⑨ 천진암에서 수표동, 명례방, 마현, 양근 등지로 천학신앙을 전파하였다.

⑩ 금범우, 최창현, 등 중인들을 입교시켜 천주교회에 서민도 합류시켰다.

⑪ 을사박해때, 문중박해로 가내 연금, 아사벌 독살로 순교하였다.

⑫ 이벽성조께서 순교하신 후 약 60여년간(1785∼1845), 즉 김대건 신학생 때까지는 조선 유림들과 천주교 박해자들, 또 관료들과 천주교 신도들도 광암 이벽성조를 조선천주교회 창립자 즉 시조(일세)로 모두가 공지, 공인하고 있었다(이벽지최선익사일세지야공지야)


25. 천진암의 이벽독서처와 강학당은 젊은 선비들의 천학도장이었다


1770년 경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16세 때 천진암에 독서처를 정하고 천학을 연구하며 실천하자, 그의 사돈들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은 어린 나이에도 자주 천진암 독서처 도장에 와서, 수도하던 "이벽성조를 존경하고 추종하면서, 월력과 수학, 기하원본, 등, 아주 심오한 것까지 듣고 배웠다"고 정약용선생은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정약전은 12살, 정약종은 10살, 정약용은 8세였다. 이들은 10여년간 천진암의 이벽독서처에 자주 다니며, 천학도장의 기능을 겸하던 거기서 한 때 함께 수학하였음을 알리는 시들을 지었다.

훗날(1827년) 65세의 로인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 어린 시절 천진암에서 함께 수학하던 벗들, 곧 현계 령공과 석천 옹과 계임과 성구와 규백 및 3 가정의 아들들과 함께 폐허가 된 천진암을 찾아왔다. 스님들은 모두 떠난 지 오래되어 아무도 없었기에, 이들은 아랫 마을 이포의 안내로 3일을 머물렀다. 이때 정약용 일행은 40여수의 시를 지어 천진소요집을 남겼는데, 그 중에 몇 줄을 뽑아 읽어보자.


石徑細如線 바윗돌 사이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난 이 오솔길은,

昔我童時游 그 옛날 어린 시절 내가 와서 거닐며 노닐던 그 길인데,

紅葉題詩處 일찍이 "붉은 잎"을 제목으로 받아 시를 짖던 이곳을,

重來愴客心 이제는 나그네로 다시 찾아오니 내 마음 한없이 슬프기만 하도다.

豪士昔講讀 호걸(豪傑)과 명사(名士)들이 일찌기 강학하며 독서하던 이 곳에서,

尙書此燒鍊 우리는 상서를 한권씩 외운 후 불살라 물에 타서 마시며 익혔었지.

荒寮草色深 황폐한 요사체에는 잡풀만이 무성하게 덮혀 자라나고 있고,

禪燈廢少林 참선하던 이들은 사라져 선방엔 불이 꺼지고 아주 폐쇄되고 말았구나.

寅緣慙講德 이제 전처럼 새벽부터 덕목 외우기(강)는 부끄러워 차마 못해도

書帙見隨陰 산그늘지니 마음놓고 책(기도서,등)만은 전처럼 읽어본다오.

伊蒲容信宿 오늘밤 쉴 데없어 걱정했는데 이포가 들어오라니 믿고 자야지.

何事 輕陰 해지는 그늘이 짙어 어두워진들, 설마 무슨 일이 있기야 하랴.

[…]

前 凄迷不可求 옛날처럼 그대로 다시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으고나.

黃 啼斷綠陰幽 꾀꼬리들 그 시절처럼 녹음 속에서 울다가 그치는데,

朽筒引滴涓涓水 물 대던 홈통은 썩어 여기저기 졸졸졸 흘러내리고,

破瓦耕 壘壘丘 집터도 경작하려나 기와 조각은 모아다가 수북수북 쌓았는데,

禪房無處舊人求 선방 친구들은 다 죽어 어딜 가도 다시는 찾아올 곳이 없네.

樓前寮舍半墟丘 우리가 공부하던 누각 앞의 기숙사들은 무너져 절반이 빈터인데,

三十年來重到客 삼십년만에 지금 내가 나그네 신세가 되어 다시 찾아오니,

猶然苦海一孤舟 나는 아직도 괴로운 바다에 뜬 외로운 배 한 척의 신세로세.


26. 엄동설한에도 천진암에서 10여일씩 강학회를 열던 젊은 선각자들


1777년과 1778년 1779년에 당시 10대의 소년 선비들은 천진암에서 겨울에도 강학을 하였다. 당시에는 종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천주교도 천학이라고 불렀다. 기록자들에 따라 천진암에서의 겨울 강학회 개최년도를 다블뤼 주교는 정유년(1777년)이라 하고, 다산 정약용은 기해년(1779년)이라 하고, 정학술의 이벽전에서는 무술년(1778년)과 기해년(1779년)이라고 적고 있는데, 결국 천진암에서의 강학회는 수차례 자주 개최되었음이 분명하다. 정유년을 놓고 보면 당시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총억 14세, 이벽성조 23세, 이승훈선생 21세, 등이었다. 산너머 41세의 권철신 대학자도 관여하여,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부터 온종일 저녁까지 글을 읽고 토론을 하였으며 주자의 성리서 76권에 나오는 경제잠 사물잠 등의 글을 강학 자세 기강을 위하여 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학은 연수회 성격을 띤 강학회였다.

"일찍이 기해년(1779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었을 때, 주어사는 설중인데도 이벽이 밤중에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키고 경서를 담론하였다. 그후 7년(1785년), 이를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나서, 다시는 그러한 강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니, 이른 바, 성대한 잔치는 다시 하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 7년은 명례방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 즉 乙巳年의 추조적발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7. 천진암에 도우가 중도하니, 광암공은 성교요지를 하필하였다.

- 1837년 정학술의 이벽전


천진암 강학에 관한 내용이 『이벽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술(1778)년 이벽성조께서는 25세 되던 해에 성호 이익선생을 따르는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어진 선비들, 정씨 이씨네 자제분들과 함께 학문에 힘쓰셨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무관 홍군사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한 상자 받으시고 밤낮으로 열중하여 읽으신 후, 깊히 묵상하고 연구하므로써 의심나는 점을 터득하시고는 산수가 좋은 곳을 노닐으시며 다니시다가, 일단 광주에 이르러 원앙산 사, 일명 앵자산 천진암에 은거하시매, 도를 닦는 벗들(도우들=교우들)이 총림(=중도=승단), 곧 수도적 단체(중도=수도자들)를 이루게 되자, 이들에게 성교요지를 지어 부르시어, 마치 교과서처럼 받아 쓰게 하시었다".

여기서 도를 닦는 벗들(도우)이란 이벽성조께서 강의하는 천주교 도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 곧 천주교로 입교한 이들이다. 지금의 종교라는 말을 당시에는 도라 하였고, 지금의 교우라는 말도 도우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중도란 말은 중생과 좀 달리 승려들을 말하는데, 당시에는 수사 혹은 수도자들, 공동체라는 천주교 용어가 아직 없을 때였다. 결국 당시에 천진암에서는 마치 예수의 제자들이나 동학 초기의 수운 최제우의 문도들처럼 수도사적 신도 제자들의 단체가 형성되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단체가 바로 성 모방 신부의 문헌에 나오는, "이벽이 개종자들(pros lytes)과 일심단합(de concert)하여 또 다른 대표자(d l gu )를 북경에 파견하던" 주체인 것이다. 『니벽전』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적고 있다.

"기해(1779)년 이벽선생이 26세 되시던 해에는 어진 벗들과 학문에 힘쓰는 제자들이 웃어른으로 모시며(위상),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산사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 때 광암 이벽선생은 기묘한 학문에 아주 박식하여 천문학과 지리학 의학과 복술, 인간의 품성과 운명에 관한 학문에도 달통하였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서 답변하는데 있어서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고, 그 문하에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마치 총림(=승단)을 이루듯 하여 그 명성이 세간에 자자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젊은 선비들의 단체가 결성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28. 엄동설한 심야에 광주산맥을 넘던 이벽성조의

천진암 강학회 참석열성 - 성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사 비망기』


천진암 강학회를 기록하고 있는 또다른 역사 기록은 바로 다블뤼 주교의『조선순교사 비망기』인데, 그 번역원문을 직접 읽어보자.

"때는 1777년(정유년), 유명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를 위하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거기에만 몰두하고자 어떤 절(pagode)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벽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 뛰어난 사람들의 가르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꺼워하며 즉시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pagode)에 다다랐다. 그러나 자신이 절(pagode)을 잘못 찾아왔고, 산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벽은 다른 스님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기이한 도착은 첩첩 산 중의 한 중심(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서(isol ) 폐허가 되어 못쓰는(perdu) 건물( difice.:역주 천진암을 말함)에 거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때아닌 시각에 찾아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지자 기쁨과 환희가 두려움의 뒤를 이었으며,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하늘과 세상과 인간본성 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모든 의문점들과 선현들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들은 성교의 모든 계률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를 바랐겠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이 그들을 지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엎드려 묵상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天主께 바쳐진 날 주일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음려으로 7일, 14일, 21일, 28일에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령혼 수련에 대해 생각하면서 소재 즉 금육재를 지켰다."

여기서 'l' difice isol et perdu'란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흉가나 폐가옥을 의미하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후 천진암을 찾아와 지은 시에서, "사파무구관, 즉 천진암 절간은 그나마 다 무너져서 옛 모습이 없구나!"라고 하고 있다. 또, 당시에 저술된 홍경모(1774∼1851)의 『남한지』에서도, "천진암은 앵자산에 있는 오래된 헌 절인데 지금은 제지공장이 있어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천진암재앵자산 위고사 조지물 금속사옹원)"라고 말하고 있다. 거의 동시대에 다산도, 다블뤼 주교도, 홍경모도 모두 천진암은 폐허가 된 옛 헌 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강학 당시 천진암은 앵자산 서북쪽 한 중심 계곡에 하나뿐인 거의 쓰지 않아 폐허가 되어가는 시설물이었다.

정약용이 기록한 기해년(1779년)의 강학회나, 다블뤼주교가 기록한 정유년(1777년)의 강학회나 모두 한겨울에 폭설이 덮힌 앵자산을 이벽성조께서 힘들게 넘으셨다는 것을 보면, 강학은 폭설이 내리기 전에 시작했던 것이고, 또 폭설로 기간이 더 길어졌을 수도 있다. 또, 광암공이 도장을 차리고 있는 천진암에 광암이 으레 있으리라 믿고 모두 모였으나, 광암공이 뜻밖에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 보다는 이왕에 왔으니, 강학은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녹암 권철신에게 공부할 겸 무슨 가르침을 들으러 정약전 이승훈 등이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권철신 상어동월 우거주어사 […] 집지청교어녹암지문[…]) 광암공은 권철신이 잠시 우거하던 주어사로 갔다가 허탕을 치고, 다시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천학 공부와 천주교 신앙의 열성으로 엄동설한에 숨박꼭질을 하면서 광주산맥을 넘나들던 젊은 선비 광암공의 열의와 노력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9. 이벽성조께서는 1770년부터 1783년까지 산속 은둔처에서 천학 연구와 실천에 전념


천진암 강학회에 대한 기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자료에서도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1885년 Pullo-Pinang의 『천주교대신학교 력사 교과서』와 1911년에 영국 Longford 교수가 집필하여 발행한 『The Story of Korea(계림팔도지)』이다. 광암 이벽성조를 중심으로하는 자발적인 천주교 연구와 강학회 개최 및 신앙실천 시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Pullo-Pinang의 교과서는 이벽, 정약전, 권철신, 등의 천학 연구기간을, 1770년부터 10년간으로 밝히고 있다,

"그 당시 조선의 일부 박사들은 조용한 산골에 은둔생활을 하면서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고, 그 중에 널리 알려진 가장 저명한 학자 중에는 이벽이라고 부르던 이덕조와 권철신, 정씨네 형제들, 특히 정약전과 정약용,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인간본성과 하늘과 땅에 대한 갖가지 의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서적들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영혼과 덕행과 악습과 신의 섭리에 대한 천주교 교리가 매우 합리적이고 훌륭하다고 판단하고 나서, 즉시 자신들의 생활관습까지도 십계명 같은 하느님의 계명에 맞게 일치시켜 살아나가도록 결정하고 실천하였으니, 이는 1770년경부터였다."

Longford 교수는 이벽 정약전 등이 은둔처에서 천학연구와 수련에 몰두하였던 기간은 1770년부터 1783년까지 '13년'간으로 단정하여 기술하고 있다.

"1720년에 조선 사신이 북경에 와서 선교사들과 많은 대화와 토의를 하였고[…] 그들이 사가지고 간 책들을 50년간 조선의 양반 학자들이 단체별로 읽고 토론하게 되었으며, 그들 중에는 남은 일생을 그 교리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 중에 훌륭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조상대대로 벼슬에까지 올랐던 집안의 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벽이라는 분이고, 별명이 "돌로 된 담벼락"이라고 하였다. 이벽은 1783년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할 때까지 13년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며 실천하여 거기에 아주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

광암 이벽성조를 주축으로 이렇게 천주교 신앙실천운동을 하던 천진암의 공동체가 세례를 받아오도록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다블뤼주교의 기록, 모방신부의 편지 등에서 보았었다. 특히, 이 파견은 단 한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조선천주교회역사의 독특한 특징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즉, 다블뤼 주교는 "이벽이 여러 해동안 갖가지 시도와 노력을 하였으나, 모두 허사였고([…]plusieres annees[…]infructuoses[…]), 이승훈선생 파견의 경우 성공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모방신부도 "또 다른 대표자(un autre d l gu )로 이승훈을 보냈다"는 말, 특히 [다른 대표자]라는 문장의 앞뒤에서 "[…]autre(다른)[…]autre(또 다른)[…]autre(또 다른)를 3번씩이나 이어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번 사람들이 왕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리자(representant)"가 아니라, 한 조직적인 단체의 "대표자(d l gu )"라는 말은 외국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천주교신앙인들의 공동체가 있어서 이를 대표하는 자격을 주어 보내었다는 뜻이다. 이는 교회창립 면에서의 독특성과 함께, 세계 종교사에 없는 실로 감탄할만한 역사이다.



30.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의 래력


그러면 광암이벽성조의 독서처가 있었고, 젊은 선비들이 자주 모여서 약 10여년 간 수학하고 강학을 하던 천진암에 관하여 살펴보자.

천진암은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훗날 천진암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정약용 선생의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없다(사파무구관)"하였고, 1797년 정사年 당시 홍경모의 남한지에서는,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천진암위고사조지물금속사옹원)"고, 사찰로서의 기능을 言及하지 않고 있으며, 성다블뤼 주교는 젊은 선비들과 함께 이벽선생이 강학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폐가이었다(isol et perdu)고 1850년경에 기술하였다.

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5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3세, 이총억 15세, 권철신 43세, 등 주로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특이한 천주교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일반 유교 서당에서나 정상적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되어가는 천진암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pour s'y livrer ensemble des tudes profondes), 천주교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천진암은 바로 유·불·천이 합류한 곳이고, 조선천주교회가 시작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그런데 정약용 선생은 종종 [천진암]에서 [암]자를 빼고 그냥 "천진"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으니, "공예천진" 또는 "천진지유", "천진소요집"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신 광암 이벽 성조께서 천진암을 근거지로 활동하신 바가, 정약용 선생의 글에도 보이는데, "기해년(1779년)에 천진암에서 강학을 할 때(기해동강학우천진암), 이벽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으며(설중이벽야지장촉담경)", 그후 "정사년(1797) 단오날에 둘째 형님(정약전)과 천진암에 와보니, 이벽의 독서처, 곧 이벽의 수학 도장 건물이 아직도 그저 있구나(단오일배이형유천진암 이벽독서유유처)"하였고, 정학술의 이벽전에서는, "무술(1778) 기해(1779)년에 이벽 광암 선생이 광주 앵자산사 곧 천진암에 은거하시며 정씨 이씨네들과 어진 벗들(현우)과 학문에 열중하였으며(면학), 그 당시, 도우가 중도를 이루자 성교요지를 하필하시었다."고 밝히고 있다. 1827년 65세로 천진암을 찾은 다산은,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갖춘 이벽 성조께서 강학하시고 독서하시던 천진암의 강학당, 독서처, 기숙사 등이 암자와 함께 폐허가 되어 이미 농경지화함을 못내 서글퍼하였다(현호기상투/호사석강독/상서차소련/루전료사반처구/요원무유 /황요초색심/파와경 첩첩구).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께서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한국천주교 발상지일뿐더러, 음력주일제정과 실천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의 정기적인 휴식을 겸한 경신예절과 사회계급타파, 남녀평등 실천등이 교회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어, 훗날 민족개화와 조국근대화 및 조선 사회개혁 운동의 싹이 트기 시작한, 온 겨레의 정신문화 성지이기도 하다.

이 성지에 한국의 민족종교들과 유교, 불교, 천주교 등의 건축미 일부씩을 참고 하면서 한민족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을 세우고 있다. 천년세월을 두고 한겨레의 정신적 기둥이 될 이 대성당 건립에는 정권을 초월하여 각계 각층에서, 온 겨레가 자자손손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다같이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 또한 중앙정부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들과 모든 기관들도 행정적으로뿐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이 거룩한 사업에 한 몫을 해야 할 것이다.


31. 세례로 천주교신자가 되지 않고, 천주교신자라야 세례를 받는다.


혹자는 세례도 받지 않은 세례 예비자들의 이러한 활동을 천주교회의 창립으로 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성서의 기록을 보면, 사도바오로가 에페소교회에 세 번째 갔을 때 이미 많은 '신자들(multi credentes)'이 있었으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때에 이미 아폴로도 에페소에 와서 꽤 오랫동안 회당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는 않았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의 분열을 꾸짖으며 첫 번째 편지를 보내는데 첫머리에서 '나는 여러분 중에 크리스포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세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물로 세례받기 전이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천주교회의 신자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교회법이 가장 엄정하게 적용되던 중세기에 교회의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것은, 신자들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물로 세례받기 전 세례예비신자로 죽어도 세례받은 신자들과 동일한 특권을 주어, 교회공동묘지에 묻히게 하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예비신자가 사망하면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는 이들을 교회의 한 가족으로, 회원으로, 즉, 신자로 인정하고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린다.

사실, 천주교회는 세례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세례를 성사로 설정하고, 베풀고 관리한다. 즉, 교회는 세례보다 선재하며 세례를 집행하고 관리하는 주체이니, 세례를 받아야 천주교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신자라야 세례를 받는 것이며, 천주교를 신앙하지 않는 미신자나 혹시 무신앙자나 비신앙자나 신앙 반대자는 세례를 받지도 않겠지만, 혹 받는다하여도 그것은 무효인 것이다. 그래서 세례를 베풀기 직전 사제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신앙하는지 질문하여 천주교신앙인임을 확인한 후 세례를 거행한다. 그래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신앙인들은 세례받기 전이라도 이미 천주교회의 회원이고, 가족이며, 구성원임을 천주교회는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 교의로 재확인 선언하였다.


또한 천주교회에는 세례가 3가지 있어서, 일반적으로 모든 성당에서 흔히 자주 물로 이마를 씻으며 거행하는 세례를 수세라 하고, 박해 중에 이러한 수세를 받지 않고 순교하는 경우를 혈세라 하며, 수세나 혈세를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세례를 못받고, 오직 마음으로 영세를 열망하면 받게 되는 세례를 화세라고 한다. 우리 한국천주교회창립선조들은 이 3가지 세례를 모두 받은 분들이다. 수세전 신자들의 자격과 위치에 관하여 천주교회는, 교회헌장, 교회법, 선교헌장, 교리서, 등 여러 문헌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성신의 감도를 받아 교회에 결합되려는 명백한 의사를 표명한 예비신자들(새 입교자들=catechumeni)은, 이 소원 자체로써 교회와 결합되는 것이므로, 자모이신 교회는 그들을 이미 자기 자녀로 삼아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품에 안아 감싸주고 있다"

"세례를 지원하는자들의 법적 지위가 새로운 교회법전에 명기되어야 한다. 그들은 교회와 결부되어 있으며, 이미 그리스도의 가족이고, 이미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것이다."

"예비신자들은 특수한 방식으로 교회와 연결된다. 즉 그들은 성령으로 감도되어 교회에 합체되기를 명백한 의지로 소망하고, 따라서 바로 이 원의와 함께 실행하는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삶으로써 교회와 결합되고, 교회는 이들을 이미 회원들로 애호한다. 예비신자들을 특별히 보살피는 교회는 복음적 삶을 살도록 그들을 초대하고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도록 그들을 인도하며 그리스도교인들의 고유한 여러 가지 특은을 그들에게도 베푼다."

이런 이유로 로마 교황 요한바울로2세는 1984년에 103위를 시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던 것이다.


"조선천주교회는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이 세웠으니. 이들은 마땅히 조선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32.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들은 평신도들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마 교황 요한바울로2세는 지난 1984년 10월 14일 낮 12시에 로마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순교자103위성인기념축일" 첫 미사 중에 한국천주교회 주교들 전원과 전 세계에서 모인 여러 추기경(김수환 추기경참석), 대주교, 주교, 사제들 앞에서 공식 강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는, 참 신앙 "고백"의 상징인 성 베드로의 제단을 중심으로 모여, 지난 부활절에 서울에서 시성된 한국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찬을 함께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우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따로 인사를 하겠습니다. 『찬미예수, 한국 순교성인들을 기리는 성찬을 교종과 함께 드리고자 이처럼 먼길을 와주셔서 참으로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성대한 전례를 통해 우리는 비단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을 증거할 뿐 아니라, 아울러 그 순교자들이 오늘의 세상과 교회에 들려주는 말씀, 곧 치명으로써 한 그 "고백"의 뜻을, 우리가 처한 현실 안에서 새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은 자신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로, 오늘의 세상에서 선조들의 표양을 더욱 빛내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22장 2절). 이 특별한 잔치에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땅 위에 있는 모든 겨레와 나라들을 초대하십니다. 한국 민족은 2세기 전에, 여기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지난 5월에, 본인은 한국에 가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제를 거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한국 민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 신비로운 잔치 초대에 비상한 관심과 최선의 건설적인 노력으로 응답하였으며, 그 상급으로 한국교회 신자 공동체의 오늘과 같은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된 것입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민족 구원의 이러한 역사는, 바로 진리탐구로 향하는 인간 이성의 본성적인 열망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fondatori)」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이하 생략)."


그런데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현 교황 요한바울로2세의 이러한 표현은 지난 150여년간 역대 교황들에 의해서 대동소이한 내용이 줄곧 선포되었다.


예를 들면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16세의 조선교구설정 칙서에서도, "조선교회 신도들의 요청에 따라[…]"라는 한국신도들의 상향적 자발성이 언급되고 있으며,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 시복 때 교황 비오11세의 강론에서와, 1968년 한국 순교복자 24위 시복 때도 교황 바오로6세의 강론에서, 그리고 1984년 한국103위 순교성인 시성식과 더욱이 그 해 103위 첫 축일미사 때의 현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강론에서도 항상 강론 첫 머리의 내용은 모두, 세계 교회 력사상 유일하게 선교사없이 한민족 스스로 교회를 세운 특성과 탁월성을 격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사회에서는 매우 생소하고 극난했던 천주교회 창립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리고 어떻게 완수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더욱이 일부 식자들 중에서까지 아직도 너무나 피상적으로만 대강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한국 근대사상사상의 이벽선생의 위치"역시 일찍이 홍이섭 교수가 1953년부터 몇차례 『연세춘추』와 1976년의 『한국교회사론문선집』 등에 논문으로 소개한 바는 있다. 그러나 그 후로 발굴된 여러 자료들을 볼 수 없던 제약이 불가피하였다. 그런데 한국천주교회사상에서 이벽성조의 위치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제시한 역사 자료에서 보듯이, 교회 초기부터 일찍이 교회내외에서 공인하여오던 상태였다.

아시아 이웃나라의 천주교회 창립사와 비교해본다면, 광암 이벽성조에 의한 조선천주교회가 창립이 지닌 특성을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다.


33. 일본은 스페인의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신부가, 중국은 이태리의 마테오 리치신부가 선교


우선 우리 주변의 다른 나라 천주교회창립사를 보면,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사의 특징을 쉽게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일본천주교회는 1549년 스페인 사람 프란치스꼬 하비에르(1506∼1552) 선교사가 일본 가고시마에 上陸하여 전교하면서 시작되었고, 중국천주교회는 1292년에 이태리 사람 몬떼코르비노가 와서 전교하였으나, 1582년부터 마테오 리치 선교사가 더욱 발전시켰으며, 심지어 로마의 천주교회도 서기 60년경 그리스도의 제자인 유태인 선교사 베드로와 바울로가 세웠다.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천주교회가 다른 나라 출신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우리나라 천주교회만이 1770년경부터 10여년간에 걸친 젊은 선비들의 천진암 강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이 자발적으로 신앙단체를 시작하여 출발함로써 세계교회 역사상 유일하게 외국인 선교사없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창립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특이하고 위대한 종교정신문화를 이루는 자질을 가진 민족임을 인류력사에 드러내 보였다.

중동 지역의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계시진리를 "받은 민족"이다. 예를 들어 귀를 막아도, "사무엘, 사무엘"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고,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보이는 상황, 곧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세상이 끝나는 광경을 요한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주성자의 강생역시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계시진리 자체이셨다. 로마 대제국의 여러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등의 전교로 하느님의 계시진리를 "들은 민족"이다.

그러나 우리 배달겨레는 빛을 따라서 샛녘(동쪽)으로 민족이동을 하면서 항상 하느님을 공경하며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된녘(북쪽)을 거쳐 하늬바람(서풍)에 묻어오는 계시진리를 "찾아나선 민족"이다.


제6장

천진암에서 시작된 조선천주교회가 수도 서울로 발전



34. 천진암에서 서울 수표동으로, 명례방으로, 마현으로, 양근으로 전파된 당시의 조선천주교회


천진암에서 순수하고 소박하고 진솔하고 열성적인 이벽성조와 함께 젊은 선비들이 시작한 조선천주교회는 1784년 봄 북경에 파견된 이승훈 선생이 영세, 귀국한 후, 1784년 여름부터 본거지를 천진암에서 서울 수표동에 마련된 이벽성조의 자택으로 옮겼다. 『추안급국안』이나 『벽위편』에 나오는 '수표교 이벽가'가 바로 그곳이다. 대학자 이가환과 이기양과의 천·유 토론회, 즉 천주교와 유교에 대한 대토론회가 열렸던 시기가 바로 이 때였고, 장소도 수표동 이벽성조 자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울 수표동에 있던 이벽성조의 집은 경주이씨 양반의 집이라서 량반네들은 자유로이 모일 수 있으나, 상민들에게는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더욱이, 수표동 이벽성조의 자택의 안채 즉 안 사랑에서는 진서라 부르던 한문을 사용하는 량반출신의 한문 기도서 사용 신도모임이 있었고, 행랑채 즉 바깥 사랑에서는 주로, 한문을 모르던 머슴꾼들이나 종들, 상민 출신의 신도들이 당시 언문이라 부르던 한글기도서를 사용하는 모임이 있었으므로, 신도들의 일치와 화목 면에서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명동대성당이 있는 명례방으로 옮기게 된다. 평소 량반 상민 인간차별을 하지 않으시던 이벽성조께서는, 정약용의 표현대로, "무릇 모든 일에 있어 결코 편파적인 법이 없으시고(서물무편파), 미운 정 고은 정 다 손수 살피시며 다독이시는(친독흔정면),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고루 갖추시었으니(현호기상투), 이벽성조을 따르던 중인들이 많았으므로, 그 중에 명례방, 지금의 명동대성당 터 바로 아래 살던 금범우 선생의 집으로 집회소를 옮기게 된 것이다. 금범우(1751∼1787)는 정식 통역관 국가고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당시의 역관들은 주로 중국어 역관으로서 대부분 한약재상들이나 한의사들과도 가깝게 지내곤 하였지만, 중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어학원이나 한의원, 약재상, 등을 직접 겸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금범우 역관은 정지라는 이름으로 당시 더 불렸고, 아버지는 금의서이며, 단독으로 종가의 족보 편찬을 할 만큼 부유하였다. 형제들은 금이우, 금형우, 금관우, 금적우, 금성우, 금근우, 등 모두 8형제였다.

 

 

 

 

최미정(NATALIA99) (2005/04/20) : 성가 61번~♬

신희상(shinada) (2006/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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