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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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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균 [baeyoakim] 쪽지 캡슐

2006-05-29 ㅣ No.99993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원문) - 신희상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韓民族 朝鮮天主敎會 創立史
- 배달겨레가 우리나라천주교회를 세운 간추린 이야기 -
卞 基 榮 神 父
韓國天主敎發祥地天眞菴聖地


 

 

차 례

머리말 5
제 1 장 : 배달겨레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먼 준비
1. 韓民族의 由來 : 天山 산맥에서부터 槿域 三千里까지 7
2. 天祭敎 民俗信仰 生活時代 8
3. 外來宗敎文化의 收容 9

제 2 장 : 하느님을 찾는 배달겨레의 노력과 가까운 준비
4. 李 光이 소개한,『天主實義』와 『芝峯類說』은 우리겨레에게
最初로 天學을 認識하게 하고, 實學 精神을 胎動시켰다. 10
5. 許筠이 바치던 天主敎 祈禱文 12端과 洪吉童傳 11
6. 소현세자와 默菴 李慶相이 데리고 온 중국인 천주교신자들 5명 12
7. 황해도 서해안과 두만강 주변에 생겼던 天主敎信者들 13
8. 南京 敎區長 中國人 羅文藻 주교가 高麗 교구장서리 겸임 13
9. 相異한 시대와 장소에서 한 때 산발적으로 있었던 천주교신자들 14

제 3 장 : 曠菴 李檗聖祖의 天學硏究와 實踐 및 敎會創立 活動
10. 朝鮮天主敎會는 광암 이벽성조와 10代 後半, 20代 初半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하였다. 15
11. \"朝鮮天主敎會 創立者는 曠菴 李檗.\" - 聖 Daveluy 주교 17
12. \"李檗이 조선 信徒會代表로 李承薰을 북경에 파견\"-聖 Maubant신부 19
13. \"大聖賢 李檗이 저에게 天主敎를 가르쳐주셨습니다.\"- 李承薰 20
14. \"天學 硏究에 탁월한 李檗博士가 李承薰을 北京에\"- 金大建 神學生 21
15. \"朝鮮 天主學의 始祖는 李檗이니,\" - 朝鮮王朝實錄 22
16. \"李檗은 朝鮮天主敎의 始祖다\"- 李晩菜의 闢衛編 23
17. \"北京 天主堂에 가서 祈禱書를 求하고 領洗를 請하게.\"- 黃嗣永 帛書 23
18. \"李承薰, 若鏞 3兄弟, 權日身 父子, 等이 李檗을 모시고 앉아서\"
-闢衛編 24


제4장 : 丁若鏞의 文獻에 나타난 天眞菴과 曠菴 李檗聖祖
19.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 24
20. \"人間世界에 내려오신 神仙나라의 학(鶴)과 같으신 曠菴 公에게서
우리는 神의 風采를 보았었도다\" 26
21. 가을을 타고 문득 훌쩍 날아가는(乘秋忽飛去) 鶴처럼, 曠菴 公이 떠난 지
1주년, 전처럼 붉게 물든 천진암의 가을 단풍을 보러 가서. 26
22. \"天眞菴엔 아직도 李檗의 讀書處가 그저 그대로 있는데.\" 27
23. 正祖 임금이 낸 숙제 답안을 작성해주던 광암공의 문장이 적힌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던 丁若鏞 28


제5장 : 曠菴 李檗 聖祖 朝鮮天主敎會 創立
24. 天眞庵에서 天學을 硏究하고 修道한 曠菴 李檗聖祖의
朝鮮天主敎會 創立活動 31
25. 天眞菴의 李檗讀書處와 講學堂은 젊은 선비들의 天學道場이었다. 32
26. 嚴冬雪寒에도 天眞菴에서 10여일씩 講學會를 열던 젊은 先覺者들 34
27. 天眞菴에 道友가 衆徒하니, 曠菴公은 聖敎要旨를 下筆하였다.
- 1837년 丁學術의 李檗傳 35
28. 嚴冬雪寒 深夜에 廣州山脈을 넘던 李檗聖祖의
天眞菴 講學會 參席熱誠 - 聖다블뤼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36
29. 李檗聖祖께서는 1770년부터 1783년까지 산 속 隱遁處에서
天學 硏究와 實踐에 專念 39
30.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의 來歷 41
31. 洗禮로 天主敎信者가 되지 않고, 天主敎信者라야 洗禮를 받는다. 43
32. 韓國天主敎會의 創立者들은 平信徒들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46
33. 日本은 스페인의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신부가,
中國은 이태리의 마테오 리치신부가 宣敎 49


제6장 : 天眞菴에서 시작된 朝鮮天主敎會가 首都 서울로 發展

34. 天眞菴에서 서울 水標洞으로, 明禮坊으로, 馬峴으로, 楊根으로 傳播된
당시의 朝鮮天主敎會 50


제7장 : 朝鮮天主敎會가 최초로 겪는 乙巳年의 迫害와 殉敎詩
35. 朝鮮天主敎會 最初迫害인 乙巳迫害: 李檗聖祖 殉敎, 金範禹 譯官 流配
52
36. 제 살과 뼈를 태워 빛이 되어 남을 비추고, 天主께 祭物이 되는
한 토막의 초와같이(天彛地紀限西東,一炷心香書共火)- 李承薰 53
37. 權日身과 權哲身의 殉敎 57
38. 李承薰, 丁若鍾 聖賢들의 殉敎: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아도 못 속에 있느니라(月落在天水上池盡) - 李承薰聖賢 殞命詩 59
39. 曠菴 李檗聖祖의 殉敎 : 은하수 별자리에 둥근달 떠오르듯,
비단옷 곱게 차려 입고서 하늘나라 가노라.- 李檗聖祖殞命詩 62
40. 殞命을 앞두고 이벽성조께서 읊으신 聖詩 64
41. 李檗聖祖 欽慕詩 68
42. 1785년에 門中과 家庭의 迫害로 32세에 殉敎하신 李檗聖祖의
葬禮式에 와서 25세의 丁若鏞선생이 지은 輓詞 71
43. 韓國天主敎會 創立者 洗者 요한 曠菴 德祖 李檗 聖祖의 人的事項 72


제 8장 : 平信徒로서 善意와 熱誠으로 司祭職務까지 隨行하던
朝鮮天主敎會 創立先祖들

44. 韓國天主敎會창립선조들이 平信徒들이면서도 善意와 熱誠으로 結成한
自發的인 臨時準聖職者團의 聖務活動 76


제9장 : 韓國平信徒들의 自發的인 司祭 養成

45. 평신도들로서 임시 준성직자단의 결성과 활동은 사제양성의 첫걸음 81
46. 김대건, 최양업, 최방지거, 세 소년들 그 이전에도
조선천주교회가 파견한 신학생들이 마카오와 요동에 있었다. 82
47. 李承薰 聖賢의 孫子인 李在誼 토마스(1807∼1868)와 丁若鍾 聖賢의 아들 丁夏祥은 김대건(1821∼1846), 최양업(1821∼1861) 신학생들보다 앞선 국내 선배 大神學生으로서 大品(次副祭品) 직전이었다. 84

結 論
48. 自發的인 眞理探究와 實踐 및 眞理 守護와 證據의 資質을 타고난
民族精神 86



머리말



한뫼들이 솟기 전에 은하수가 흐르기 전에, 하늘나라님의 얼이 한가위겨레 품어,
별지는 샛녘 강산에 선동(仙童)이 빼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부러워 모셨네.
한겨레 한 스승 李檗聖祖, 한겨레 한 스승 李檗聖祖.




우리 배달겨레가 하느님을 섬기며 걸어온 길을, 까마득한 저 옛날까지 더듬어 올라가며, 오늘의 우리들 생활 속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 연구한 先人들의 각종 문헌과 자료들을 모으고 비교하며 종합하여, 좀 더 자세하고 길게 밝혀보는 일은 현재 준비중인, 『韓民族 天主 信仰史』에서 보다 상세히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주로 2세기 전 曠菴 李檗聖祖께서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 聖地를 本據地로 하여, 10대 후반의 청소년 선비들과 함께 선교사나 성직자없이 우리나라천주교회를 세우기 시작하던 이야기를 가급적 간결하게라도 우선 전하고자 한다.
특히 韓國天主敎會 創立史에 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대부분이 주로 프랑스 선교사 聖 다불뤼(A. Daveluy)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錄』자료를 국내 官廳記錄이나 迫害者들의 기록으로 立證, 확인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이 책에는 그러한 文獻 자료들 뿐 아니라 그 후손들과 장소에 아직까지 묻어 있는 흔적들과 깃들어 있는 선조들의 체취와, 또 새로 찾은 부수러기 자료들을 종합하고 분석하며 대조하여 정리하고 있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
앞으로 보다 상세한 내용들이 정리되어 발행될 것이며, 이를 토대로 後學들의 손에 의해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내용들과 다른 여러 부분이 많이 추가되어, 보다 완벽한 韓國天主敎會創立史가 밝혀지고 쓰여지게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한편, 200여년 전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던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이름을, \'朝鮮\'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 한 동안은, \'大韓帝國\'이라 하였었고, 또 \'日本國\'에 점령되어 韓日合邦으로 우리나라 이름자체가 없어진 적도 있었으며, 지금은, \'大韓民國\'이라고 부른다. 또한 북쪽에서는, \'朝鮮人民共和國\'이라고 부르며, 高句麗와 渤海와 古朝鮮의 옛 疆土의 대부분은 지금 중국 영토가 되었고, 그중 일부는 \'朝鮮族自治區\'로 불리우고 있는 지역도 있다. 앞으로는 또 어떻게 다르게 불리울지 모를 일이요, 걱정할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요즈음 중국의 高句麗史 언급을 보면서 과거 역사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디서나 어느 시대나 누구나, 배달겨레이면 부담감없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특히 한 시대의 국가조직 내에 있던 국민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라기보다도, 悠久한 역사를 가진 배달겨레 韓民族의 精神的인 資質에 시선을 더 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 준비중인 책을『배달겨레가 하느님을 섬기며 걸어온 길(韓民族天主信仰史)』이라고 제목을 붙였고, 그 중에서, 우선, \"배달겨레가 우리나라천주교회를 세운 특이하고 기적적인 이야기(韓民族의 天主敎會 創立史)\"를 발췌하고 간추려서 내놓는 것이다.


2004. 10. 14.
天眞菴 聖地 에서 卞基榮 神父
제 1 장
배달겨레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먼 준비


하느님은 배달겨레에게 天主信仰의 精神的 資質을 特恩으로 주셨다.
우리겨레는 하느님의 겨레다.
우리겨레는 먼 옛날부터 늘 하느님을 위하며 모시고 살아왔고,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겨레와 늘 함께 계시며, 우리겨레를 保佑하시었으니,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의 겨레이다.



1. 韓民族의 由來 : 天山 산맥에서부터 槿域 三千里까지

우리겨레는 天山 산맥에서부터 해돋는 나라 동쪽을 향하여 몇 만년 동안 오랜 세월을 두고 민족이동을 해왔다. 民族移動의 이유는 수렵하기 쉬운 곳을 찾아 나선 경제적인 것도 아니고, 다른 민족들이 사는 곳을 점령하고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것도 아니며, 하늘에 떠서 지나가는 해를 하느님으로 모시고 섬기며, 해가 거하며 다스리는 저 높은 하늘을 우러러 위하면서, 날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으로 가면, 해의 나라, 맑고 밝은 \'빛의 나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겨레는 밝은 빛을 숭상하며 흰옷을 즐겨 입던 겨레였다. 저 멀리 萬年雪로 덮여 있던 선조들의 고향 天山 山脈을 뒤로 하며 떠나온 우리겨레는 부족의 경사나 큰 날에 자기네 종족을 표시하는 흰옷을 입었으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로 여기던 산들을 神聖한 곳으로 믿고, 조상이 죽으면 쉽게 하늘에 오르도록 산에다 묘를 쓰기 시작하였다.
韓國學의 선구자들, 특히 『兒時朝鮮』등을 저술한 六堂 崔南善(1890∼1957)을 비롯한 學者들이 우리겨레의 古代史에 관하여 연구한 이러한 學說들은 우리겨레를 天神族으로 神聖視하는 거룩한 史話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대략 일만년 전후를 해서 배달겨레는 지금의 한반도에 이르렀고, 자기들이 자리잡는 마을 이름도 빛고을(光州), 별고을(星州), 볕고을(陽城), 밝은 고을(明州), 흰 고을(白城), 맑은 고을(淸州), 빛나는 고을(華城),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를 즐겨하였다.
따라서 이 先史 시대 우리겨레 種族 중에는 호랑이, 곰, 독수리 같은 동물을 위하는 部族들도 있었지만, 산이나 강, 바다나 별, 달이나 해나 하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부족들이 많았고, 특히 해(日)와 하늘(天)에 대한 정성은 큰 나무나 동물이나 지상의 산이나 강물 공경과는 한 차원 높은 것이었다.

2. 天祭敎 民俗信仰 生活時代
한울님을 위하던 우리겨레가 이 땅에 정착하면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그 정신은, 더욱 정리되고 발전되어 거룩하고 아름답게,
특히 純粹하고 素朴하고 眞率하고 敬虔하게 生活化하여 왔다

지금부터 약 반만년 전쯤, 檀君朝鮮 시대를 전후하여서는 하늘 공경과 어른 공경, 族長 공경이나 나라님 공경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고 풍습화할 정도로 발달하여, 하늘에 제사 드리는 예식이 지역을 따라 여기저기 발전하였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관습은 보편적이며 오랜 전통으로 이어오던 신앙으로서, 우리겨레의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소박하고 眞率한 한울님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고, 현대에 와서까지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 민족신앙이 愛國歌에서도 불려지고 있듯이, 우리겨레의 마음 속에는 늘 하느님의 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겨레는 排他的이지 않고 마음이 넓어, 다른 나라 겨레들이 걸어온 求道의 길도 쉽게 받아들여 우리의 것과 합쳐서 새로운 우리의 것을 만들어 土着化하여가며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도 하였다.


3. 外來宗敎文化의 收容

佛敎와 儒敎와 道敎와 그리스도敎, 등, 다른 나라에서 시작된 여러 종교도 우리 선조들은 폭넓고 관대하게 받아들여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 土着化하였다
네팔 룸비니에서 태어난 \'샤카무니 꿔타마 싣다르타 부다\'(B.C. 540∼480)의 가르침, 즉 佛敎가 三國時代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高麗에 이르는 佛敎文化의 찬란한 연꽃이 만발하게 되었고, 中國의 孔子와 孟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儒敎가 전해져서, 특히 高麗와 朝鮮時代에는 온 백성들의 생활관습에 이르기까지 三綱五倫으로 禮儀凡節이 확립되고, 祭祀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民俗化한 한울님 공경 思想의 터전 위에서 中國과 印度 지역에서 시작된 이러한 세계적인 종교들과, 특히 近代에서야 우리겨레에게 전해진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宗敎精神文化가 우리겨레 안에 뿌리를 내리며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며 풍요로운 결실을 내고 있다.





제 2 장
하느님을 찾는 배달겨레의 노력과 가까운 준비


4. 李 光이 소개한,『天主實義』와 『芝峯類說』은 우리겨레에게 最初로 天學을 認識하게 하고, 實學 精神을 胎動시켰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전파되어 있는 그리스도교가 모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선교사로 들어가 활동하므로써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 만이 선교사들의 발자욱이 나기 전에 우리겨레 스스로 천주교 책들을 外國에 나가서 가지고 들어와 읽고 연구한 후 시작하였다.
1592년에 일어난 壬辰倭亂 때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 神父와 일본인 修士가 日本軍을 위한 軍宗神父로 동행하여 남해안 지역 鎭海의 곰내(熊川)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兵營 내에서,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면서, 약 6개월 정도 미사를 드리고 洗禮聖事와 病者聖事 등을 거행하였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이 퇴각하면서 천주교신자들 대부분도 일본으로 이동되었고, 국내에는 천주교 신앙인들이 존속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전란 중에 3차에 걸쳐 芝峯 李 光(1563∼1628)이 明나라에 다녀오면서 『天主實錄正文』을 가지고 와서 전하므로, 조선 선비들은 천주교를 서적을 통하여 학문적으로 알기 시작하였고, 특히 芝峯類說을 통하여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얻기 시작하였으며, 나아가 實學精神을 싹틔우는 계기가 마련되게 하였다.
이 實學胎動의 계기를 16세기∼17세기로 대부분의 實學 硏究書에서 전문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은 불가피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결론이라고 하겠다.


5. 許筠이 바치던 天主敎 祈禱文 12端과 洪吉童傳

그 후, 儒敎의 교육을 받고, 佛敎와 道敎, 등 종교분야에 관심이 많던 許筠(1569∼1618)은 明나라에 다녀오면서 천주교 祈禱文集인 12端을 가지고 와서 실천한, 최초의 天主敎 祈禱文을 바친 신앙인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洪吉童傳』을 저술하여 조선사회 제도개혁에 대한 問題意識의 씨앗을 뿌렸으며, 훗날 우리나라 實學 形成에도 은연 중 밑거름이 되었으니, 儒敎의 現實 위에서 佛敎와 道敎와 天主敎의 영향을 받은 이 문학작품은 한민족의 고유한 민족사상인 弘益人間의 정신적 바탕 위에서 융합된 것이라 하겠다.


6. 소현세자와 默菴 李慶相이 데리고 온 중국인 천주교신자들 5명

또한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靑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昭顯世子와 그 秘書官 默菴 李慶相(李檗聖祖의 직계5대 祖父) 公이 북경의 東華門 가까이에 있던 東華館에 머물면서, 당시 북경에 와서 南堂 天主敎會를 짓고 거기에 주임신부로 있던 독일인 아담 샬 신부와 접촉하면서 천주교에 관하여 묻고 알아보며 親交를 맺었다. 그리고 1645년에 천주교 서적들과 특히 乾象崑與圖 등 기념품들을 선물로 받아가지고 귀국할 때 중국인 천주교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들어와, 한동안 대궐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 때 소현세자와 그 일행 중 일부가 天主敎에 입교하여 세례까지 받았는지, 혹은 받고도 비밀에 붙였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입국한 昭顯世子가 얼마 안가서 毒殺되므로써 함께 왔던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은 귀국조치되었다. 사실 소현세자 일행은 최초로 외국인 평신도 선교사 5명을 데리고 들어온 목적이 조선에 천주교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조정은 政敵들의 黨爭으로 이를 수용할 수 없는 思考方式과 鬪爭 속에 처해 있었다.



7. 황해도 서해안과 두만강 주변에 생겼던 天主敎信者들

광암 이벽성조의 天學 硏究와 실천 및 활약으로 朝鮮天主敎會가 창립되기 그 이전에도, 조선에는 이미 천주교신자들이 산발적으로 여기저기 약간 있었다는 기록이 일성록(日省錄)과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및 朝鮮王朝實錄 등에 단편적으로나마 조금씩 엿보이고 있다. 특히 李能和의 저서에서도 간결히 집약하였듯이, 仁祖, 孝宗, 肅宗, 英祖 시대에(1650∼1750) 이미 함경북도 두만강 주변과 황해도 서해안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없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天主\"라는 단어를 종종 \"天柱\"라고 표기한 곳들도 있으나, 그 종교의 내용을 보면 관리들이 \"天主\"를 잘못 쓰고 있을 뿐, 天主敎를 말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소현세자 때 일시적으로 중국인 천주교신자들이 잠깐 와서 있다가 돌아갔듯이, 한 때 산발적으로 있었던 각자 개인들의 일시적 신앙행위로 그쳤을 뿐, 團體的인 조직으로 敎會를 이루고, 대를 이어가는 신앙생활의 傳承은 없었고 불가능한 처지였다.


8. 南京 敎區長 中國人 羅文藻 주교가 高麗 교구장서리 겸임

1674년 1월 로마교황 클레멘스 10세가 中國인 최초의 司祭 나문조(Gregorio Lopez) 신부를 南京敎區長으로 임명하면서 高麗敎區長을 겸임토록 인사발령하였는데, 이렇게까지 될 정도로 조선은 이미 로마 교황청에까지 천주교 전교 면에서도 알려져 있었으니, 16세기말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우리겨레의 福音化가 먼 준비기간을 거쳐 온 결과였다. 나문조 주교는 로마교황청에 조선선교에 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할만큼 관심이 많았었다. 그런데 교황청이나 남경천주교회의 이러한 안목과 움직임을 낳게 한 것은 조선 사신들과 선비들의 관심과 노력이 해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수광, 허균, 소현세자 일행, 등이 북경에 출입하면서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등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조선이 로마교황청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경교구장의 이러한 위치와 자격과 노력은 교회의 宣敎活動上의 試圖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역시 그 동안 우리겨레가 애써온 노력에 대한 로마 천주교회의 관심과 사목적 조치였고, 은총의 응답일 뿐이었다.


9. 相異한 시대와 장소에서 한 때 산발적으로 있었던 천주교신자들

그러나 壬辰倭亂을 계기로 스페인 선교사와 일본인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했었고, 丙子胡亂을 계기로 소현세자와 이경상 공이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隨行 入國시켜 잠시 중국신자들이 국내 대궐에 체류했었으며, 남경교구장 라문조 주교가 조선교구장서리로서 조선선교를 계획하고 시도했었고, 그 외에도 황해도 서해안과 두만강 주변에서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이 러시아 正敎會 신자들이나 중국 天主敎신자들과의 접촉으로 천주교를 알게 되고, 나아가 입교까지 했었다하더라도, 이런 일련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그 당시의 몇 않되는 조선인 천주교신자들의 신앙은 散發的이고 個人的인 것으로서, 入敎의 계기나 조건이 없어지면 후대로 계승되지 않고, 단절되었다가 回生하지 않고, 얼마 안가서 거의 당대에 사라졌다.
즉, 임진왜란의 일본 점령군 부대가 철수하였다든가, 또는 정부에서 황해도 해주 지역이나 함경도 회령지역에 牧使나 縣令을 통하여 천주교 신봉 금지령을 내리자 비조직적이며 개별적이던 천주교 신앙생활은 바로 중단되고 사라졌으며, 남경교구의 라문조 주교가 사망하자 역시 조선선교계획은 무산되었다. 즉, 조선인들이 이러저러한 계기로 중국이나 일본과의 접촉선상에서 천주교신자들을 만나고 사귀고 입교도 하였으나, 하느님의 백성인 조직적 단체를 이루지 못하였고,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천주교회로 계승되지 못하였으며, 당대에 없어지고 말았다.




제 3 장
曠菴 李檗聖祖의 天學硏究와 實踐 및 敎會創立 活動


10. 朝鮮天主敎會는 광암 이벽성조와 10代 後半, 20代 初半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벽성조를 중심으로 天眞菴에서 시작된 젊은 소년들의 天學 연구와 信仰 실천 및 전파운동은 갖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온갖 잔인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이루는 뿌리가 되었으며, 조선의 사회개혁과 근대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李檗(1754∼1785), 李承薰(1756∼1801), 丁若銓(1758∼1816), 丁若鍾(1760∼1801), 丁若鏞(1762∼1836), 權哲身(1736∼1801), 權日身(1742∼1792), 등 한국천주교회 創立에 身命을 같이한 주역들이 당시 南人係에 속한 선비들이고, 星湖 李瀷(1681∼1763), 順庵 安鼎福(1712∼1791), 등 實學者들과 선후배 관계라 하여, 實學者들이 한국천주교회를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당시 天學이라고 부르던 천주교 신앙운동의 조직적인 출발은, \"實學者\"라는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어린 10대 후반의 소년들과 20대 초반의 청년들의 활약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특히 조선의 實學者들이 朝鮮天主敎會를 세운 것이 아니라, 반대로 천주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서적구입, 기도문 암송, 등으로 入門에 기울어져 천주교를 學界에 알리고 연구하고 실천까지 시도하던 조선의 초기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인사들, 나아가서 정신적으로는 입교예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선의 實學이 胚胎되기 시작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봉 이수광이나 허균, 소현세자, 이경상 공, 등의 천주교 서적 구입과 보급, 연구와 실천시도 등은 서양세계를 알리면서, 꽉 막혀 있던 조선사회 개혁의 문제의식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뒤를 이어 중국에 다녀오면서 天學 서적들을 가지고 들어와 연구하던 鄭斗原이나 李 命, 또 이를 비판적으로 보던 申厚聃, 훗날의 성호 이익이나 순암 안정복, 권철신, 권일신,이벽, 이승훈, 정약전, 약종, 약용, 등의 연구와 활약은 모두가 천주교 서적에서 그 출발의 움을 틔우고 있으며, 활동의 영역을 贊反 어떤 방향이든지 간에 넓히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실학이 천주교를 낸 것이 아니라, 천주교가 조선실학을 태동시킨 것이며, 당시 실학의 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天學, 곧 천주교 진리 탐구와 실천에까지 노력한 선비가 바로 광암 이벽이다.
그리하여 1770년대에 들어와 天學 연구와 실천, 및 전파에 중심적인 지도자 역할을 한 선비가 바로 광암 이벽성조인데, 당시 조선사회를 직시한다면 조선천주교회 창립은, 마치 번역이 저술보다 더 힘들다는 말처럼, 새로운 신흥 종교를 시작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면들이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충분한 서적이나 지식이나 성물이나 전문인사, 즉 선교사들과 접촉하기도 힘들었고, 또, 접촉하기 위하여 출국하는 것도 정말 힘든 때였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예컨대, 훗날 한 때 평신도들이 마음대로 미사도 드리고 고백성사도 주었었지만, 곧 중단한 적도 있었다. 더욱이 국내에서는 天學에 대한 배타적인 沒理解와 迫害로 학습과 그 실천이 더더욱 어려웠던 조건하에서 생소한 朝鮮天主敎會를 創立하였던 것이다.


11. \"朝鮮天主敎會 創立者는 曠菴 李檗.\" - 聖 Daveluy 주교

聖다블뤼 주교(1818∼1866)는 1845년 김대건 신부(1821∼1846)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21년간 선교하면서 조선천주교 殉敎史의 原本 자료집인 備忘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집필한 프랑스인 선교사로서 조선교구5대교구장이었으며 1866년에 殉敎하였고, 聖人의 諡號를 받았다. 조선에 입국한 후 조선 천주교회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그는, 조선천주교회의 진정한 역사가 \'李檗(1754∼1785)의 위대한 講學會\'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자신의 저서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眞正한 意味의 朝鮮天主敎會의 歷史는 李檗의 저 偉大한 講學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왕국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시작하기 위하여 天主께서 간택하여 쓰신 道具는 李檗이라는 사람인데, 이름을 德祖라고 부르고, 호는 曠菴이었으며, 경주이씨 가문이었다.\"
\"이벽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주초로 삼고자 대학자 암브로시오 권철신을 선택하였다.
특히 1783년에 이벽성조께서 이승훈선생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면서 훈계하는 대목에 관한 다블뤼 주교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자네가 北京에 가게 되었음은 天主께서 우리나라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고자 하심을 나타내는 標識일세. 북경에 도착하거든 바로 天主堂을 찾아가 서양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 실천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아오며,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우리민족의 生死가 걸린 일일세. 즉 來世에 관한 莫重之事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가서도 가벼이 행동해서는 아니 되네.\' 이승훈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러한 말을 열심히 새겨들었고, 이를 大道師, 스승의 말씀(la parole du Ma tre)처럼 받아들였으며,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相互共同의 신념인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이승훈선생이 이벽성조의 말씀을 \"大道師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명심하였다(la parole du Ma tre)는 구절인데, 여기서 스승(ma tre)이라는 단어의 첫 글자 m을 大文字 M으로 쓰고 있다. 프랑스어나 이태리어에서 ma tre가 아닌, Ma tre로 쓰게 되면, 보통의 선생님이 아니라 인류의 대스승들이신 孔子, 釋迦牟尼, 예수, 마호메트, 같은 분들을 가리킨다. 이는 당시 이벽선생의 위치와 신망과 지위, 學德과 권위 등이 일반 聖賢 君子의 수준을 넘는 품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와같이 聖 Daveluy 주교는, 한국천주교회 創立史의 始作을 1784년 이승훈 선생의 북경 領洗에 두지 않고, 이벽성조의 \"저 위대한 講學會\"에 두고 있는 것이다(1777). 더군다나 \"權哲身의 講學會\"라는 말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권철신은 당시 신망있고 아주 점잖은 학자였지, 外國宗敎나 新興思想을 선전하고, 조직을 결성하는 推進力를 가진 革命家다운 인물은 아니었다.


12. \"李檗이 조선 信徒會代表로 李承薰을 북경에 파견\"- 聖 Maubant신부

聖 Maubant신부(1803∼1839)는 1836년에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프랑스선교사이며, 김대건(1821∼1846), 최양업, 최과출, 15세 조선소년들을 마카오 신학교로 보낼 때 추천서를 쓴 신부인데, 그가 입국한 지 2년 정도가 지난 후에 파리에 보낸 편지와 文獻에는 조선천주교회의 창립역사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1720년 경에 북경에 다녀간 사신 李公(역자 주. 李 命)이 서양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갔는데[…]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역자 주. 曠菴 李檗)은 후에 요한이라는 敎名을 가진 분이고,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심취한 나머지, 천주교를 全心으로 받아들였고,(embrassa la religion chr tien)[…]광이라는 (曠菴 公) 이 사람은 이 새 종교에 합류한 몇몇 改宗者들(pros lytes)과 함께 힘을 합하여(de concert) 1783년에 자기들의 또 다른 代表者(autre d l gu ) 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였는데, 이 대표자는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敎名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13. \"大聖賢 李檗이 저에게 天主敎를 가르쳐주셨습니다.\" - 李承薰

이벽성조에 의해 파견되어 1784년 봄에 북경에서 領洗하고 온 이승훈 선생은, 1789년에 북경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간을 보냈다.
\"제 일생에 聖賢을 한분 만났사온데, 이 어른은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이미 가지고 계셨고, 그 책 내용에 대하여 아주 여러 해 동안 전념하며 자신을 거기에 적응시켰습니다. 이 어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우리 종교의 여러 가지 점들, 특히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점들에 대해서까지도 아주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에 대한 이 어른의 信德과 열성은 교리지식보다 훨씬 더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바로 이 어른이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시고, 저에게 魂을 넣어주신 분이십니다. 저는 이 어른을 모시고 함께 천주를 섬기는데 있어 상부상조하였습니다\"
14. \"天學 硏究에 탁월한 李檗博士가 李承薰을 北京에\"- 金大建 神學生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기 전 神學生 시절, 1845년에 썼던 朝鮮天主敎會 略史 報告書 첫 머리도 광암 이벽성조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조선에는 많은 哲人들(philosophantes)이 자발적으로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참 天主가 계시다는 것(naturali lumine […] verum Deum […])을 자발적으로 연구하여 인식하고 섬기었는데, 그들 중에 뛰어나게 가장 유명한(inter eos celebrior) 사람은 李檗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아주 깊히 연구하여 참되신 천주를 공경하고자 노력한 나머지, 당시 북경에는 천주공경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북경에 보내어 천주교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승훈은 李檗 博士(doctor I Pieki)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 李東郁을 따라 北京에 간다는 말을 하였으며,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얻어오라고 하였습니다.\"
1785년 李檗聖祖 死後 60여년 후(1844년)에 海外 마카오에서 23세의 金大建 신학생에 의해서 쓰여진 이 내용은, 그가 충남 솔뫼에서 태어나, 7세 때 경기도 龍仁 산골로 피난와서 10여년을 살다가 15세의 소년으로 1836년 末 마카오로 떠났다는 것과, 더군다나 그 당시에 역사책도 없고, 박해 중이라서 교회 조직도 제대로 없었으며, 산골로 숨어 다니느라고 만나볼 수 있는 천주교신자들의 수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역사지식은 김대건 소년의 스승이었던 丁夏祥 바오로(1795 ∼1839)와 정하상 바오로보다 한 살 아래인 김제준 이냐시오, 즉 김대건 소년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벽성조 死後 60여년간은 조선의 어린 소년들까지도 \"조선천주교회는 탁월한 선비 이벽이 세웠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5. \"朝鮮 天主學의 始祖는 李檗이니,\" - 朝鮮王朝實錄

조선천주교회를 광암 이벽성조가 시작하였다는 것은, 천주교회측의 자료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정약종을 문초한 결과, \"원래 처음으로 西洋學(天主敎)을 듣고 알게 된 것은 李檗이었고, 李檗은 이승훈을 몰래 변장시켜 꾸며서 아버지 이동욱 公을 따라가도록 북경에 보내었읍니다\"
더욱이 천주교를 박해했던 사람들이 당시 이벽성조의 두 형제에 대해 올렸던 다음의 상소문들은, 당시 광암이벽성조에 의해 조선천주교회가 시작되었음을 모든 이가 공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李檗은 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이니, 우선 그 형 李格이 아직 벼슬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매우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니, 그 형제들은 즉시 벌을 주어 내 쫓아야 한다
\"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로 말한다면 그것은 李檗이다.\"
16. \"李檗은 朝鮮天主敎의 始祖다\" - 李晩菜의 闢衛編
\"요사스러운 전 水使 李晳의 兄 李檗은 저 邪惡한 천주교를 가장 먼저 시작한 우두머리로서 천주교인들의 始祖(一世)라는 것을 萬人이 다 알고 있는 바(共知)가 아닌가?\"

17. \"北京 天主堂에 가서 祈禱書를 求하고 領洗를 請하게.\"- 黃嗣永 帛書

또한 李檗이 李承薰을 북경에 보내어 세례를 받아오게 하였음을, 앞에서 인용하였던 다블뤼주교의 서한, 丁若鍾의 증언,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편지 등에서 이미 보았는데, 黃嗣英(1775∼1801) 進士는 이를 자신의 帛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고 깨끗이 살던 선비 李檗이 기특히 여기며 크게 믿음직하게 여기던(大奇之) 선비였다. 계묘년(1783년)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갈 때, 李檗이 이승훈에게 가로사대(曰), 북경에 가면 天主堂이 있고, 천주당에는 傳敎者인 서양선비가 있을 터이니, 가서 信經祈禱書를 求하고, 아울러 領洗하기를 청하도록 하게(幷請領洗). 그러면 서양선비가 자네를 무척 사랑할 걸세. 그리고 여러 聖物을 많이 얻어가지고 와야지, 결코 빈손으로는 돌아오지 않도록 하게. 이승훈은 李檗의 이 말대로(承薰 如其言) 북경 천주당에 도착하여 洗禮받기를 청하였다.[…]\"


18. \"李承薰, 若鏞 3兄弟, 權日身 父子, 等이 李檗을 모시고 앉아서\" - 闢衛編

1784년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영세귀국한 지 1년 후에 일어난 1785년 乙巳迫害에 관한 闢衛編의 기록에도 광암 이벽성조와 당대의 다른 학자들과의 관계를 쉽게 엿볼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乙巳년(1785년) 봄에 掌禮院 앞에 있는 金範禹의 집에 李檗이라는 사람이 설교를 했었는데, 푸른 수건으로 머리와 어깨를 가리고 벽을 기대어 좌정하고 앉아 있었으며, 그 앞에는 李承薰, 丁若銓, 丁若鍾, 丁若鏞 3형제와 權日身 父子가 책을 손에 들고 李檗을 모시고 무릎을 꿇고 둘러앉아서 이벽의 설법을 듣고 있었으며, 모두가 스스로 다 자기들은 이벽의 제자들이라고 부르더라. 李檗이 저들을 가르치고 꾸짖고 하는 기품이 얼마나 엄격한지, 우리 儒敎에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禮儀보다도 훨씬 더 엄하게 하고 있었다.\"


제4장
丁若鏞의 文獻에 나타난 天眞菴과 曠菴 李檗聖祖

19.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 - 丁若鏞

조선 천주교회 시작에 대한 역사 기록들 중에서 비교적, 소상히, 수차례에 걸쳐 광암 이벽성조에 대해서 뿐 아니라 講學會가 열렸던 天眞菴에 대해 기록을 남겨주고 있는 분은 茶山 丁若鏞이다. 그는 1777년 15세 때에, 당시 23세의 李檗 曠菴 先生을 가리켜,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함께 골고루 갖추셨으며(賢豪氣相投)\", 또 \" 어려서 일찍부터 德을 힘써 닦으신 어른(令德勉早修)으로\" 完德의 標本이라고 여기면서 李檗聖祖를 존경하였다. 이때 지었던 \"贈 李檗\"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贈 李檗
(李檗선생님께 드립니다)

二儀雖不改 (이의수불개) 陰과 陽은 비록 고치거나 바뀔 수 없는 것이지만,
七曜迭舒卷 (칠요불서권) 일곱 요일은 날짜와는 달리 번갈아 바뀌는 것이니,
嘉木敷春榮 (가목부춘영) 좋은 나무들도 봄이 되면 더욱 생장력이 넘쳐나지만,
華 易易變 (화자역리변) 무성하게 성장하고도 또 자라 늘 변하게 되는도다.
  被驅迫 (공총피구박) 曠菴公은 무모한 이들한테 핍박을 받게 되어도,
不能訴餘戀 (불능소여연) 끝내 동정심으로 차마 맞 비평조차 아니하시도다.
庶物無偏頗 (서물무편파) 무릇 모든 일에 있어 결코 편파적인 법이 없으시니,
貴達安所羨 (귀달안소선) 부귀와 영달 같은 것을 뭐 그리 부러워하시리오.
賢豪氣相投 (현호기상투) 曠菴公은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다 갖추시었고,
親篤欣情眄 (친독흔정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손수 살피시며 다독이시도다.
令德勉早修 (령덕면조수) 어려서부터 일찍이 학문과 덕행을 힘써 닦으시니,
慷慨常見面 (강개상견면) 大義와 博愛의 慷慨하신 모습을 그 얼굴에서 늘 보옵니다.




20. \"人間世界에 내려오신 神仙나라의 학(鶴)과 같으신 曠菴 公에게서 우리는 神의 風采를 보았었도다\" -丁若鏞

또한, 丁若鏞의 詩文 중 \"友人李德祖 輓詞\"는 1785년 이벽성조의 장례식에 가서 지은 것인데, 그 詩에서 茶山은 李檗聖祖를, \"닭과 오리떼들이 시기 질투로 헐뜯는 인간세계에, 神仙나라에서 내려오신 학과 같으신 어른(仙鶴下人間, 鷄鶩生嫌嗔)\"이시니, 그 어른에게서 우리는 \"神의 모습을 보았도다(軒然見風神)\"하였다. 23세의 정약용 선생이 지어 올린 이 輓詞에서 우리는 이벽성조의 學識과 聖德이 일반 聖賢君子의 수준이 아니라, 神聖한 超人的이었음을 알 수 있다.


21. 가을을 타고 문득 훌쩍 날아가는(乘秋忽飛去) 鶴처럼, 曠菴 公이 떠난 지 1주년, 전처럼 붉게 물든 천진암의 가을 단풍을 보러 가서. - 丁若鏞

한편 다산은 강학회 장소였던 천진암을 매우 자주 수차례 걸쳐 방문하여 詩를 짓고는 하였다. 이를테면, 어릴 때뿐 아니라, 이벽성조께서 순교하신 지 한해가 되던 1786년 초가을에도, 24세의 다산은 단풍 구경을 할 겸 母校와 같은 천진암을 찾아 天眞菴 賞楓을 읊었다. 가을 단풍이야 다산의 고향 마재의 뒷동산과 앞의 검단산, 및 가까운 용문산 단풍도 훌륭한데, 구태여 단풍구경을 하려고 天眞菴을 찾는 다산의 허전한 심정은, 잊지 못하는 曠菴公에 대한 생각 때문이 아니랴? 조정에서 현직으로 분망한 중에도 정약용은 이하에서 보겠지만 마치 母校를 찾듯 天眞菴을 자주 찾는다. 또 종종 天眞菴의 \"菴\"字없이,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天眞菴賞楓
買酒花郞坊裏(매주화랑방리) 화랑방 동네에 들어가 술을 사가지고,
停車 子峰陰(정차앵자봉음) 앵자봉 그늘에서 수레를 멈추니,
一夜纖纖白雨(일야섬섬백우) 하룻밤 부슬부슬 내린 실 이슬비에
雨厓  紅林(우안섭섭홍림) 양쪽 산 더욱 붉고 싱싱하게 물들었네.

다산이 천진암을 방문하고 지은 시문 중에서 상당수가 교회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茶山은 천진암에서 광암공의 天學道場 활동 즉, 修道와 硏究와 講學會 개최 등에 참여하였음을 전제로 하는 추억의 詩文들을 여러 편 남기고 있다.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를 읽어보자.


22. \"天眞菴엔 아직도 李檗의 讀書處가 그저 그대로 있는데.\"- 丁若鏞

1797년, 正祖 임금을 모시는 承旨와 副護軍 등의 현직을 역임하고 있을 때에, 35세의 茶山은 형님들과 단오날 천진암에 와서 이틀 밤을 머물며 20首나 되는 詩를 지었는데, 그 중에,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단오일배이형유천진암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
단오날 두 형들과 천진암에 와서 노닐며 보니,

李檗讀書猶有處(이벽독서유유처) 이벽의 讀書處는 아직도 저기 그저 그대로 있는데
苑公棲跡杳難尋(원공서적묘난심) 苑公이 깃들던 발자취는 아득히 다시 찾기 어렵도다.
風流文采須靈境(풍류문채수영경) 風流와 文采는 모름지기 神靈한 境地에서라야 하리니,
半日行 半日吟(반일행배반일음) 그시절 그리며 한나절내 술마시고 한나절내 시를 읊노라.
이 시는 1797년 丁巳年에 쓴 것으로서, 이벽성조께서 순교(1785年 死)하신지 12년 후이고, 天眞菴에서 講學會가 개최되었다고 거론되는 첫번째 해(1777년)부터는 20년 후다. 이 詩는 광암공이 天眞菴에서 讀書할 때 茶山이 이미 수차례 왔었거나 아니면 함께 거하며 讀書를 함께 하였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만 쓸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이 讀書라는 말인데, 조선시대에는 고위관리의 특수 전문연구기관이었던 讀書堂이 있었으니, 讀書라는 말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대학원에서의 연구를 포함한 수덕적 차원을 의미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벽성조의 독서처가 천진암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苑公이란 말은 苑風之人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뒤흔들고 가버린 큰 회오리바람같은 巨人을 뜻하는 것으로 이벽성조를 가리키고 있다.


23. 正祖 임금이 낸 숙제 답안을 작성해주던 광암공의 문장이 적힌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던 丁若鏞

茶山公이 李檗聖祖를 흠모하던 마음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中庸講義補』에도 절절히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茶山公이 1784년 正祖 임금 밑에서 太學生으로 있을 때 正祖가 中庸에 관하여 숙제로 내준 70條目의 질문에 대하여 작성했던 中庸講義를 1814년에 전라남도 강진 유배생활 중에 54세의 나이로 補完 손질한 것으로서, 이때 옛날 태학생 시절의 그 원고뭉치를 다시 어루만지면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甲辰年(1784년)에 中庸에 대한 正祖의 질의에 답론을 쓸 때 나는 당시 水標橋에 거하던 曠菴公한테 물어서 했는데, 이제 광암공이 세상을 떠났으니 어디 누구한테도 물어볼 데가 없구나(質問無處)! 만일 광암 이벽이 살아있다면, 그의 學識과 德에 나아감이 어찌 내게 비할 수가 있으랴(使曠菴而尙存 其進德博學豈余比哉)? 이제 나는 아직 살아있으나 광암공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광암공을 생각하며 옛 원고 책들을 움켜쥐고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도다(不禁撫券而泣涕也)!\"
특히 이벽성조 사후(1785) 거의 30여년 만에 첨삭보완하는 다산의 『中庸講義補』문장들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몇 페이지마다 종종, \"이 文章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曠菴의 文章이다(此曠菴之文)\", \"이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曠菴의 學說이다(此曠菴之說)\", \"이 뜻풀이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曠菴 李檗이 이렇게 뜻을 풀었다(此曠菴之義)\", \"中庸을 잘 읽어봐라, 以下로는 曠菴 李檗의 文章이 아주 많으니라(觀乎中庸以下多李曠菴之文)\"하며, 그 어려운 中庸講義補를 손질하며 吐露하고 있다.
또 정약용 자신이 얼마나 광암공을 따랐었는 지는, 다산이 지은 녹암 權哲身 公의 묘지명 중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다산)자신은 李檗을 추종하였고(從 李檗), 자기 형 丁若銓은 일찍이 어려서부터 李檗을 추종하였으며(嘗從李檗), 李檗이 제일 먼저 수령(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宣傳하고 다닐 때 權日身은 熱誠的으로 李檗을 추종하였다(李檗 首宣西敎 日身熱心從檗).\"
鹿菴 權哲身의 墓地銘을 쓰면서 다산이 밝힌 이와 같은 내용을 보충하는 의미로, 順庵 安鼎福의 글을 살펴보자. 順庵 安鼎福은 權哲身과 權日身 두분 성현들에게 꽤 여러 편의 서간들을 보냈는데, 그 중에 曠菴 李檗聖祖께서, 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처음 宣布하고 다녔음을 傍證하는 내용이 있다. 順庵 安鼎福이 1784년에 權旣明(=權哲身)에게 보낸 書簡 중에,
\"諸君들이 평소에는 佛敎를 배척하였었는데, 이제는 天主學에 빠져서 속수무책으로 꼼짝달삭을 못하는 것을 보면 그 天主學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군.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을 그렇게 감동을 시킬 수 있으리오. 그래서 내가 지난 번 편지에서 그 천주학 책들을 내게 좀 가져오라고 부탁을 했던 것일세. 그런데 최근에 李德操가 多少間의 몇몇 天主學 책들을 가지고 자네한테 찾아 갔었다는데, 그 사람이 여기를 지나가면서 왜 나한테는 들리지 않았는지 그 연고를 모르겠네[…].\"
여기서 權哲身은 權旣明으로, 權日身은 權省悟로, 李檗은 李德操로 부르고 있으며, 德操는 본래 德祖를 茶山과 順庵이 당시 그렇게 불렀었으니, 비록 聖賢의 學德을 지니셨으나(賢豪氣相投), 고집이 세고(다블뤼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또 志操가 굳세어(豪傑의 氣魄), 德祖를 自他가 德操로 불렀다. 즉 德操는, 修德을 貞操를 지키듯 志操를 가지고 마음을 잡고 계속하여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770년 17세를 전후하여 讀書에 열중하던 광암공은 당시 관습으로 15세 전후에 결혼을 하는데, 학문 연구와 修德에 열중하기 위하여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천진암 산 속에서 天學硏究에 전념하며 천주교 계명을 실천하는데 열중하였기에, 외아들 李顯模가 태어나는 것이 1784년이니, 꼬마신랑시대의 早婚 풍습이 있던 당시로서는 양반 집에서, 더구나 병조판서 대감 權 의 딸과 결혼하였다면, 병판감의 딸을 30이 넘도록 출가를 시키지 않았을 리도 없거니와, 茶山公이, 이벽성조께서는 \"일찍 어려서부터 남달리 德을 닦으셨도다(令德勉早修)\"하신 것을 보면, \"일찍 어려서(早)부터\"의 \"早\"라는 漢字의 용법이 당시 10세 전후를 가르키는 것이므로(예, 早失父母),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가족들과 살면서가 아니라, 남달리 특수하게 덕을 닦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詩는 丁若鏞선생이 15세 때 결혼하던 해에 당시 23세의 광암공에게 지어드린 獻詩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李檗聖祖의 부인 柳閑堂 권씨가 일찍 사망하는 것도, 사위 이벽이 天主學에 미쳐서 20여세의 젊은 자기 딸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마치 생과부처럼 한맺힌 고통을 주어 생사람 죽였다하여, 장인 權 은, 1785년 乙巳迫害 때부터 천주교 박해에 적극 앞장섰던 것이다. 죽은 딸의 한을 생각하며, 사위 李檗에 대한 증오심이 가중된 것이었다.




제5장
曠菴 李檗 聖祖 朝鮮天主敎會 創立


24. 天眞庵에서 天學을 硏究하고 修道한 曠菴 李檗聖祖의 朝鮮天主敎會 創立活動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 기록들은 모두 한결같이 광암 이벽 성조가 조선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제 조선천주교회가 어떻게 창립되었는 지 좀더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볼 것인데 이에 앞서, 그 개요를 일목요연하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天眞菴 讀書處를 天學道場으로 삼아 儒·佛·天을 合流시키셨다.
② 天主敎 敎理講學을 信仰實踐의 修鍊會로 發展, 持續시켰다.
③ 선비들을 모아 信徒團體를 結成하였다.
④ 李承薰先生을 朝鮮天主敎會 信徒 代表者로 北京에 派遣하였다.
⑤ 權哲身大學者를 비롯한 李承薰, 丁若鍾, 등 兩班들을 入敎시켰다.
⑥ 天眞菴에서 水標洞으로 集會所를 옮겨, 祈禱會 및 敎理 講座를 主管하였다.
⑦ 李家煥, 李基讓 등 儒學者들과의 公開討論會에서 大勝을 거두었다.
⑧ 明禮坊으로 集會場所를 以前하여 祈禱會 및 敎理 講座를 주관하였다.
⑨ 天眞菴에서 水標洞, 明禮坊, 馬峴, 楊根 等地로 天學信仰을 傳播하였다.
⑩ 金範禹, 崔昌鉉, 등 中人들을 入敎시켜 天主敎會에 庶民도 合流시켰다.
⑪ 乙巳迫害때, 門中迫害로 家內 軟禁, 餓死罰 毒殺로 殉敎하였다.
⑫ 李檗聖祖께서 殉敎하신 후 약 60여년간(1785∼1845), 즉 김대건 신학생 때까지는 朝鮮 儒林들과 天主敎 迫害者들, 또 官僚들과 天主敎 信徒들도 曠菴 李檗聖祖를 朝鮮天主敎會 創立者 즉 始祖(一世)로 모두가 共知, 共認하고 있었다(李檗之最先溺邪一世之耶共知也)


25. 天眞菴의 李檗讀書處와 講學堂은 젊은 선비들의 天學道場이었다

1770년 경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16세 때 천진암에 讀書處를 정하고 天學을 연구하며 실천하자, 그의 사돈들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은 어린 나이에도 자주 천진암 讀書處 道場에 와서, 修道하던 \"이벽성조를 존경하고 추종하면서, 月曆과 數學, 幾何原本, 등, 아주 심오한 것까지 듣고 배웠다\"고 정약용선생은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정약전은 12살, 정약종은 10살, 정약용은 8세였다. 이들은 10여년간 천진암의 李檗讀書處에 자주 다니며, 天學道場의 기능을 겸하던 거기서 한 때 함께 修學하였음을 알리는 詩들을 지었다.
훗날(1827년) 65세의 老人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 어린 시절 天眞菴에서 함께 修學하던 벗들, 곧 玄谿 令公과 石泉 翁과 季林과 聖九와 規伯 및 3 가정의 아들들과 함께 폐허가 된 천진암을 찾아왔다. 스님들은 모두 떠난 지 오래되어 아무도 없었기에, 이들은 아랫 마을 伊蒲의 안내로 3일을 머물렀다. 이때 丁若鏞 一行은 40餘首의 詩를 지어 天眞消搖集을 남겼는데, 그 중에 몇 줄을 뽑아 읽어보자.

石徑細如線 바윗돌 사이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난 이 오솔길은,
昔我童時游 그 옛날 어린 시절 내가 와서 거닐며 노닐던 그 길인데,
紅葉題詩處 일찍이 \"붉은 잎\"을 題目으로 받아 詩를 짖던 이곳을,
重來愴客心 이제는 나그네로 다시 찾아오니 내 마음 한없이 슬프기만 하도다.
豪士昔講讀 호걸(豪傑)과 명사(名士)들이 일찌기 講學하며 讀書하던 이 곳에서,
尙書此燒鍊 우리는 尙書를 한권씩 외운 후 불살라 물에 타서 마시며 익혔었지.
荒寮草色深 황폐한 요사체에는 잡풀만이 무성하게 덮혀 자라나고 있고,
禪燈廢少林 참선하던 이들은 사라져 선방엔 불이 꺼지고 아주 폐쇄되고 말았구나.
寅緣慙講德 이제 전처럼 새벽부터 德目 외우기(講)는 부끄러워 차마 못해도
書帙見隨陰 산그늘지니 마음놓고 책(祈禱書,等)만은 전처럼 읽어본다오.
伊蒲容信宿 오늘밤 쉴 데없어 걱정했는데 伊蒲가 들어오라니 믿고 자야지.
何事 輕陰 해지는 그늘이 짙어 어두워진들, 설마 무슨 일이 있기야 하랴.
[…]
前 凄迷不可求 옛날처럼 그대로 다시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으고나.
黃 啼斷綠陰幽 꾀꼬리들 그 시절처럼 녹음 속에서 울다가 그치는데,
朽筒引滴涓涓水 물 대던 홈통은 썩어 여기저기 졸졸졸 흘러내리고,
破瓦耕 壘壘丘 집터도 耕作하려나 기와 조각은 모아다가 수북수북 쌓았는데,
禪房無處舊人求 禪房 親舊들은 다 죽어 어딜 가도 다시는 찾아올 곳이 없네.
樓前寮舍半墟丘 우리가 공부하던 누각 앞의 기숙사들은 무너져 절반이 빈터인데,
三十年來重到客 삼십년만에 지금 내가 나그네 신세가 되어 다시 찾아오니,
猶然苦海一孤舟 나는 아직도 괴로운 바다에 뜬 외로운 배 한 척의 신세로세.

26. 嚴冬雪寒에도 天眞菴에서 10여일씩 講學會를 열던 젊은 先覺者들

1777년과 1778년 1779년에 당시 10代의 少年 선비들은 천진암에서 겨울에도 講學을 하였다. 당시에는 宗敎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天主敎도 天學이라고 불렀다. 기록자들에 따라 天眞菴에서의 겨울 講學會 개최년도를 다블뤼 주교는 丁酉年(1777년)이라 하고, 다산 丁若鏞은 己亥年(1779년)이라 하고, 丁學術의 李檗傳에서는 戊戌年(1778년)과 己亥年(1779년)이라고 적고 있는데, 결국 천진암에서의 講學會는 수차례 자주 개최되었음이 분명하다. 丁酉年을 놓고 보면 당시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총억 14세, 이벽성조 23세, 이승훈선생 21세, 등이었다. 산너머 41세의 권철신 대학자도 관여하여,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부터 온종일 저녁까지 글을 읽고 토론을 하였으며 朱子의 性理書 76권에 나오는 敬齊箴 四勿箴 등의 글을 講學 자세 紀綱을 위하여 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학은 練修會 성격을 띤 講學會였다.
\"일찍이 기해년(1779년) 겨울에 天眞菴에서 講學이 있었을 때, 주어사는 雪中인데도 李檗이 밤중에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키고 經書를 談論하였다. 그후 7년(1785년), 이를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나서, 다시는 그러한 강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니, 이른 바, 성대한 잔치는 다시 하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 7년은 명례방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 즉 乙巳年의 秋曹摘發事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7. 天眞菴에 道友가 衆徒하니, 曠菴公은 聖敎要旨를 下筆하였다.
- 1837년 丁學術의 李檗傳

천진암 강학에 관한 내용이 『이벽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戊戌(1778)년 이벽성조께서는 25세 되던 해에 星湖 李瀷先生을 따르는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어진 선비들, 丁氏 李氏네 자제분들과 함께 학문에 힘쓰셨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武官 洪軍士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한 상자 받으시고 밤낮으로 열중하여 읽으신 후, 깊히 묵상하고 연구하므로써 의심나는 점을 터득하시고는 山水가 좋은 곳을 노닐으시며 다니시다가, 일단 廣州에 이르러 鴛鴦山 寺, 一名 앵자산 천진암에 隱居하시매, 道를 닦는 벗들(道友들=敎友들)이 叢林(=衆徒=僧團), 곧 修道的 團體(衆徒=修道者들)를 이루게 되자, 이들에게 聖敎要旨를 지어 부르시어, 마치 敎科書처럼 받아 쓰게 하시었다\".
여기서 道를 닦는 벗들(道友)이란 이벽성조께서 강의하는 천주교 도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 곧 천주교로 입교한 이들이다. 지금의 종교라는 말을 당시에는 道라 하였고, 지금의 敎友라는 말도 道友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衆徒란 말은 衆生과 좀 달리 승려들을 말하는데, 당시에는 修士 혹은 修道者들, 共同體라는 천주교 용어가 아직 없을 때였다. 결국 당시에 천진암에서는 마치 예수의 제자들이나 東學 초기의 水雲 崔濟愚의 門徒들처럼 修道士的 信徒 弟子들의 단체가 形成되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단체가 바로 聖 모방 신부의 문헌에 나오는, \"李檗이 改宗者들(pros lytes)과 一心團合(de concert)하여 또 다른 代表者(d l gu )를 북경에 파견하던\" 主體인 것이다. 『니벽전』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적고 있다.
\"己亥(1779)년 이벽선생이 26세 되시던 해에는 어진 벗들과 學文에 힘쓰는 제자들이 웃어른으로 모시며(爲上),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山寺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 때 광암 이벽선생은 기묘한 學文에 아주 博識하여 天文學과 地理學 醫學과 卜術, 인간의 품성과 운명에 관한 학문에도 達通하였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서 답변하는데 있어서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고, 그 門下에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마치 叢林(=僧團)을 이루듯 하여 그 名聲이 世間에 자자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젊은 선비들의 단체가 결성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28. 嚴冬雪寒 深夜에 廣州山脈을 넘던 李檗聖祖의
天眞菴 講學會 參席熱誠 - 聖다블뤼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천진암 강학회를 기록하고 있는 또다른 역사 기록은 바로 다블뤼 주교의『朝鮮殉敎史 備忘記』인데, 그 번역원문을 직접 읽어보자.
\"때는 1777년(丁酉年), 유명한 학자 權哲身이 丁若銓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를 위하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거기에만 몰두하고자 어떤 절(pagode)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李檗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 뛰어난 사람들의 가르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꺼워하며 즉시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pagode)에 다다랐다. 그러나 자신이 절(pagode)을 잘못 찾아왔고, 산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檗은 다른 스님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奇異한 도착은 첩첩 산 중의 한 중심(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서(isol ) 폐허가 되어 못쓰는(perdu) 건물( difice.:譯註 天眞菴을 말함)에 居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때아닌 시각에 찾아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지자 기쁨과 환희가 두려움의 뒤를 이었으며,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하늘과 세상과 人間本性 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모든 의문점들과 先賢들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들은 聖敎의 모든 戒律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를 바랐겠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이 그들을 지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엎드려 默想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天主께 바쳐진 날 主日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음려으로 7일, 14일, 21일, 28일에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靈魂 修練에 대해 생각하면서 小齋 즉 禁肉齋를 지켰다.\"
여기서 \'l\' difice isol et perdu\'란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凶家나 廢家屋을 의미하는데, 茶山 丁若鏞 先生은 그후 天眞菴을 찾아와 지은 詩에서, \"寺破無舊觀, 즉 천진암 절간은 그나마 다 무너져서 옛 모습이 없구나!\"라고 하고 있다. 또, 당시에 저술된 洪敬謨(1774∼1851)의 『南漢志』에서도, \"天眞菴은 鶯子山에 있는 오래된 헌 절인데 지금은 製紙工場이 있어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在鶯子山 爲古寺 造紙物 今屬司饔院)\"라고 말하고 있다. 거의 동시대에 茶山도, 다블뤼 주교도, 洪敬謨도 모두 天眞菴은 폐허가 된 옛 헌 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講學 당시 天眞菴은 鶯子山 서북쪽 한 중심 계곡에 하나뿐인 거의 쓰지 않아 폐허가 되어가는 시설물이었다.
정약용이 기록한 기해년(1779년)의 講學會나, 다블뤼주교가 기록한 정유년(1777년)의 講學會나 모두 한겨울에 폭설이 덮힌 앵자산을 이벽성조께서 힘들게 넘으셨다는 것을 보면, 講學은 폭설이 내리기 전에 시작했던 것이고, 또 폭설로 기간이 더 길어졌을 수도 있다. 또, 광암공이 道場을 차리고 있는 天眞菴에 曠菴이 으레 있으리라 믿고 모두 모였으나, 광암공이 뜻밖에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 보다는 이왕에 왔으니, 講學은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녹암 권철신에게 공부할 겸 무슨 가르침을 들으러 정약전 이승훈 등이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權哲身 嘗於冬月 寓居走魚寺 […] 執贄請敎於鹿菴之門[…]) 曠菴公은 權哲身이 잠시 寓居하던 주어사로 갔다가 허탕을 치고, 다시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天學 공부와 天主敎 신앙의 열성으로 嚴冬雪寒에 숨박꼭질을 하면서 廣州山脈을 넘나들던 젊은 선비 광암공의 열의와 노력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9. 李檗聖祖께서는 1770년부터 1783년까지 산속 隱遁處에서 天學 硏究와 實踐에 專念

천진암 강학회에 대한 기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자료에서도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1885년 Pullo-Pinang의 『天主敎大神學校 歷史 敎科書』와 1911년에 英國 Longford 교수가 집필하여 발행한 『The Story of Korea(鷄林八道誌)』이다. 曠菴 李檗聖祖를 중심으로하는 自發的인 天主敎 硏究와 講學會 개최 및 信仰實踐 試圖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Pullo-Pinang의 교과서는 李檗, 丁若銓, 權哲身, 등의 天學 硏究期間을, 1770년부터 10년간으로 밝히고 있다,
\"그 당시 조선의 일부 博士들은 조용한 산골에 隱遁생활을 하면서 哲學 연구에 몰두하였고, 그 중에 널리 알려진 가장 저명한 학자 중에는 李檗이라고 부르던 李德祖와 權哲身, 丁氏네 형제들, 특히 丁若銓과 丁若鏞, 등이 있었다. 이들은 人間本性과 하늘과 땅에 대한 갖가지 의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서적들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영혼과 德行과 惡習과 神의 攝理에 대한 천주교 교리가 매우 합리적이고 훌륭하다고 판단하고 나서, 즉시 자신들의 생활관습까지도 십계명 같은 하느님의 계명에 맞게 일치시켜 살아나가도록 결정하고 실천하였으니, 이는 1770년경부터였다.\"
Longford 교수는 李檗 丁若銓 등이 隱遁處에서 天學硏究와 修練에 몰두하였던 기간은 1770년부터 1783년까지 \'13년\'간으로 斷定하여 記述하고 있다.
\"1720년에 朝鮮 使臣이 北京에 와서 선교사들과 많은 對話와 討議를 하였고[…] 그들이 사가지고 간 책들을 50년간 조선의 양반 학자들이 단체별로 읽고 토론하게 되었으며, 그들 중에는 남은 일생을 그 교리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 중에 훌륭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조상대대로 벼슬에까지 올랐던 집안의 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李檗이라는 분이고, 별명이 \"돌로 된 담벼락\"이라고 하였다. 李檗은 1783년 이승훈을 北京에 파견할 때까지 13년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며 실천하여 거기에 아주 깊이 深醉되어 있었다.\"
광암 이벽성조를 주축으로 이렇게 천주교 신앙실천운동을 하던 천진암의 공동체가 세례를 받아오도록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다블뤼주교의 기록, 모방신부의 편지 등에서 보았었다. 특히, 이 파견은 단 한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조선천주교회역사의 독특한 특징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즉, 다블뤼 주교는 \"李檗이 여러 해동안 갖가지 시도와 노력을 하였으나, 모두 虛事였고([…]plusieres annees[…]infructuoses[…]), 李承薰先生 파견의 경우 성공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聖 모방신부도 \"또 다른 代表者(un autre d l gu )로 이승훈을 보냈다\"는 말, 특히 [다른 代表者]라는 문장의 앞뒤에서 \"[…]autre(다른)[…]autre(또 다른)[…]autre(또 다른)를 3번씩이나 이어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번 사람들이 왕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代理者(representant)\"가 아니라, 한 組織的인 團體의 \"代表者(d l gu )\"라는 말은 외국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天主敎信仰人들의 共同體가 있어서 이를 代表하는 資格을 주어 보내었다는 뜻이다. 이는 교회창립 면에서의 독특성과 함께, 세계 宗敎史에 없는 실로 감탄할만한 역사이다.


30.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의 來歷

그러면 광암이벽성조의 讀書處가 있었고, 젊은 선비들이 자주 모여서 약 10여년 간 修學하고 講學을 하던 天眞菴에 관하여 살펴보자.
천진암은 本來 檀君影幀 天眞을 모시고 山祭祀, 堂山祭, 山神祭 등을 올리던 天眞閣 혹은 天眞堂이라는 작은 草家 堂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훗날 天眞菴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廢刹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丁若鏞 선생의 글에, \"天眞菴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없다(寺破無舊觀)\"하였고, 1797년 丁巳年 당시 洪敬謨의 南漢志에서는, \"天眞菴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爲古寺造紙物今屬寺饔院)\"고, 사찰로서의 기능을 言及하지 않고 있으며, 聖다블뤼 主敎는 젊은 선비들과 함께 李檗선생이 講學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廢家이었다(isol et perdu)고 1850년경에 기술하였다.
1779년 당시 李檗 聖祖 25세, 丁若鏞 17세, 丁若鍾 19세, 丁若銓 21세, 李承薰 23세, 李寵億 15세, 權哲身 43세, 등 주로 10代와 20代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특이한 天主敎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일반 儒敎 書堂에서나 正常的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되어가는 天眞菴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pour s\'y livrer ensemble des tudes profondes), 天主敎眞理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天眞菴은 바로 儒·佛·天이 合流한 곳이고, 朝鮮天主敎會가 시작된 韓國天主敎 發祥地이다. 그런데 丁若鏞 선생은 종종 [天眞菴]에서 [菴]子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으니, \"共詣天眞\" 또는 \"天眞之遊\", \"天眞消搖集\"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신 曠菴 李檗 聖祖께서 천진암을 根據地로 활동하신 바가, 丁若鏞 선생의 글에도 보이는데, \"己亥年(1779년)에 天眞菴에서 講學을 할 때(己亥冬講學于天眞菴), 李檗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經書를 談論하였으며(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그후 \"丁巳年(1797) 端午날에 둘째 형님(丁若銓)과 天眞菴에 와보니, 李檗의 讀書處, 곧 이벽의 修學 道場 건물이 아직도 그저 있구나(端午日陪二兄遊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하였고, 丁學術의 李檗傳에서는, \"戊戌(1778) 己亥(1779)년에 李檗 曠菴 선생이 廣州 鶯子山寺 곧 天眞菴에 隱居하시며 丁氏 李氏네들과 어진 벗들(賢友)과 학문에 열중하였으며(勉學), 그 당시, 道友가 衆徒를 이루자 聖敎要旨를 下筆하시었다.\"고 밝히고 있다. 1827년 65세로 천진암을 찾은 茶山은,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 聖祖께서 講學하시고 讀書하시던 天眞菴의 講學堂, 讀書處, 寄宿舍 등이 암자와 함께 폐허가 되어 이미 농경지화함을 못내 서글퍼하였다(賢豪氣相投/豪士昔講讀/尙書此燒鍊/樓前寮舍半處丘/寮院無逾 /荒寮草色深/破瓦耕 疊疊丘).
天眞菴 聖地는 韓國天主敎會 創立先祖들께서 선교사 없이 自發的으로 眞理를 探究하고 福音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韓國天主敎 發祥地일뿐더러, 陰曆主日제정과 실천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의 정기적인 휴식을 겸한 敬神禮節과 社會階級打破, 男女平等 實踐등이 敎會創立과 더불어 시작되어, 훗날 民族開化와 祖國近代化 및 조선 社會改革 運動의 싹이 트기 시작한, 온 겨레의 精神文化 聖地이기도 하다.
이 聖地에 한국의 民族宗敎들과 儒敎, 佛敎, 天主敎 등의 建築美 일부씩을 참고 하면서 韓民族 100年計劃 天眞菴大聖堂을 세우고 있다. 千年歲月을 두고 한겨레의 精神的 기둥이 될 이 대성당 건립에는 政權을 超越하여 各界 各層에서, 온 겨레가 子子孫孫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다같이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 또한 中央政府를 비롯한 地方自治團體들과 모든 기관들도 行政的으로뿐 아니라 物心兩面으로 이 거룩한 사업에 한 몫을 해야 할 것이다.


31. 洗禮로 天主敎信者가 되지 않고, 天主敎信者라야 洗禮를 받는다.

혹자는 洗禮도 받지 않은 洗禮 豫備者들의 이러한 활동을 천주교회의 創立으로 볼 수 있느냐고 反問한다.
그런데, 성서의 기록을 보면, 사도바오로가 에페소교회에 세 번째 갔을 때 이미 많은 \'신자들(multi credentes)\'이 있었으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때에 이미 아폴로도 에페소에 와서 꽤 오랫동안 회당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는 않았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의 분열을 꾸짖으며 첫 번째 편지를 보내는데 첫머리에서 \'나는 여러분 중에 크리스포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세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물로 세례받기 전이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천주교회의 신자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교회법이 가장 엄정하게 적용되던 중세기에 교회의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것은, 신자들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물로 세례받기 전 세례예비신자로 죽어도 세례받은 신자들과 동일한 특권을 주어, 교회공동묘지에 묻히게 하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예비신자가 사망하면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는 이들을 교회의 한 가족으로, 회원으로, 즉, 신자로 인정하고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린다.
사실, 천주교회는 洗禮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洗禮를 聖事로 설정하고, 베풀고 관리한다. 즉, 敎會는 洗禮보다 先在하며 세례를 執行하고 管理하는 主體이니, 세례를 받아야 天主敎信者가 되는 것이 아니라, 天主敎信者라야 세례를 받는 것이며, 천주교를 신앙하지 않는 未信者나 혹시 無信仰者나 非信仰者나 信仰 反對者는 洗禮를 받지도 않겠지만, 혹 받는다하여도 그것은 無效인 것이다. 그래서 세례를 베풀기 직전 司祭는 使徒信經의 내용을 信仰하는지 질문하여 天主敎信仰人임을 확인한 후 세례를 거행한다. 그래서 천주교 信仰을 가진 信仰人들은 洗禮받기 전이라도 이미 천주교회의 會員이고, 家族이며, 構成員임을 천주교회는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 敎義로 再確認 宣言하였다.

또한 천주교회에는 洗禮가 3가지 있어서, 일반적으로 모든 성당에서 흔히 자주 물로 이마를 씻으며 거행하는 洗禮를 水洗라 하고, 박해 중에 이러한 水洗를 받지 않고 殉敎하는 경우를 血洗라 하며, 水洗나 血洗를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洗禮를 못받고, 오직 마음으로 領洗를 熱望하면 받게 되는 세례를 火洗라고 한다. 우리 한국천주교회창립선조들은 이 3가지 세례를 모두 받은 분들이다. 水洗前 信者들의 資格과 위치에 관하여 천주교회는, 교회헌장, 교회법, 선교헌장, 敎理書, 등 여러 문헌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 몇 가지를 예로 들면,
\"聖神의 感導를 받아 교회에 結合되려는 명백한 意思를 表明한 豫備信者들(새 입교자들=catechumeni)은, 이 所願 자체로써 교회와 결합되는 것이므로, 慈母이신 교회는 그들을 이미 자기 자녀로 삼아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품에 안아 감싸주고 있다\"
\"세례를 志願하는자들의 법적 지위가 새로운 敎會法典에 明記되어야 한다. 그들은 교회와 결부되어 있으며, 이미 그리스도의 가족이고, 이미 信德과 望德과 愛德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것이다.\"
\"豫備信者들은 특수한 방식으로 교회와 연결된다. 즉 그들은 성령으로 감도되어 교회에 합체되기를 명백한 의지로 소망하고, 따라서 바로 이 願意와 함께 실행하는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삶으로써 교회와 결합되고, 교회는 이들을 이미 회원들로 愛護한다. 예비신자들을 특별히 보살피는 교회는 福音的 삶을 살도록 그들을 초대하고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도록 그들을 인도하며 그리스도교인들의 고유한 여러 가지 特恩을 그들에게도 베푼다.\"
이런 이유로 로마 교황 요한바울로2세는 1984년에 103위를 시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던 것이다.
\"조선천주교회는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이 세웠으니. 이들은 마땅히 조선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32. 韓國天主敎會의 創立者들은 平信徒들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마 교황 요한바울로2세는 지난 1984년 10월 14일 낮 12시에 로마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순교자103위성인기념축일\" 첫 미사 중에 한국천주교회 主敎들 全員과 전 세계에서 모인 여러 추기경(김수환 추기경참석), 大主敎, 主敎, 司祭들 앞에서 공식 강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는, 참 신앙 \"고백\"의 상징인 성 베드로의 제단을 중심으로 모여, 지난 부활절에 서울에서 시성된 한국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찬을 함께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우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따로 인사를 하겠습니다. 『찬미예수, 한국 순교성인들을 기리는 성찬을 교종과 함께 드리고자 이처럼 먼길을 와주셔서 참으로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성대한 전례를 통해 우리는 비단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을 증거할 뿐 아니라, 아울러 그 순교자들이 오늘의 세상과 교회에 들려주는 말씀, 곧 致命으로써 한 그 \"고백\"의 뜻을, 우리가 처한 현실 안에서 새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은 자신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로, 오늘의 세상에서 선조들의 표양을 더욱 빛내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22장 2절). 이 특별한 잔치에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땅 위에 있는 모든 겨레와 나라들을 초대하십니다. 한국 민족은 2세기 전에, 여기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지난 5월에, 본인은 한국에 가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제를 거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한국 민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 신비로운 잔치 초대에 비상한 관심과 최선의 건설적인 노력으로 응답하였으며, 그 상급으로 한국교회 신자 공동체의 오늘과 같은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된 것입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민족 구원의 이러한 역사는, 바로 진리탐구로 향하는 인간 이성의 본성적인 열망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fondatori)」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이하 생략).\"

그런데 한국천주교회 創立史에 관한 현 교황 요한바울로2세의 이러한 표현은 지난 150여년간 역대 교황들에 의해서 大同小異한 내용이 줄곧 선포되었다.

예를 들면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16세의 조선교구설정 칙서에서도, \"조선교회 신도들의 요청에 따라[…]\"라는 한국신도들의 上向的 自發性이 언급되고 있으며,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 諡福 때 교황 비오11세의 講論에서와, 1968년 한국 순교복자 24위 諡福 때도 교황 바오로6세의 講論에서, 그리고 1984년 한국103위 순교성인 諡聖式과 더욱이 그 해 103위 첫 축일미사 때의 현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강론에서도 항상 강론 첫 머리의 내용은 모두, 세계 교회 歷史上 유일하게 선교사없이 한민족 스스로 교회를 세운 특성과 卓越性을 격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사회에서는 매우 생소하고 극난했던 천주교회 창립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리고 어떻게 완수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더욱이 일부 識者들 중에서까지 아직도 너무나 피상적으로만 대강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韓國 近代思想史上의 李檗先生의 位置\"역시 일찍이 洪以燮 敎授가 1953년부터 몇차례 『연세춘추』와 1976년의 『韓國敎會史論文選集』 등에 논문으로 소개한 바는 있다. 그러나 그 후로 발굴된 여러 자료들을 볼 수 없던 제약이 불가피하였다. 그런데 韓國天主敎會史上에서 李檗聖祖의 위치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제시한 역사 자료에서 보듯이, 교회 初期부터 일찍이 교회내외에서 共認하여오던 상태였다.
아시아 이웃나라의 천주교회 創立史와 비교해본다면, 광암 이벽성조에 의한 조선천주교회가 창립이 지닌 특성을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다.



33. 日本은 스페인의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신부가, 中國은 이태리의 마테오 리치신부가 宣敎

우선 우리 주변의 다른 나라 天主敎會創立史를 보면, 우리나라 천주교회 創立史의 특징을 쉽게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일본천주교회는 1549년 스페인 사람 프란치스꼬 하비에르(1506∼1552) 선교사가 일본 가고시마에 上陸하여 傳敎하면서 시작되었고, 중국천주교회는 1292년에 이태리 사람 몬떼코르비노가 와서 傳敎하였으나, 1582년부터 마테오 리치 선교사가 더욱 발전시켰으며, 심지어 로마의 천주교회도 서기 60년경 그리스도의 제자인 유태인 선교사 베드로와 바울로가 세웠다.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천주교회가 다른 나라 출신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우리나라 천주교회만이 1770년경부터 10여년간에 걸친 젊은 선비들의 天眞菴 講學을 계기로, 우리 민족이 自發的으로 信仰團體를 시작하여 출발함로써 세계교회 역사상 유일하게 외국인 선교사없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창립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특이하고 위대한 宗敎精神文化를 이루는 자질을 가진 민족임을 人類歷史에 드러내 보였다.
中東 지역의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啓示眞理를 \"받은 민족\"이다. 예를 들어 귀를 막아도, \"사무엘, 사무엘\"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고,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보이는 狀況, 곧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세상이 끝나는 광경을 요한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天主聖子의 降生역시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계시진리 자체이셨다. 로마 대제국의 여러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使徒 聖 베드로와 聖 바오로 등의 전교로 하느님의 啓示眞理를 \"들은 민족\"이다.
그러나 우리 배달겨레는 빛을 따라서 샛녘(東쪽)으로 민족이동을 하면서 항상 하느님을 공경하며 자발적으로 眞理를 探究하고, 된녘(北쪽)을 거쳐 하늬바람(西風)에 묻어오는 啓示眞理를 \"찾아나선 민족\"이다.

제6장
天眞菴에서 시작된 朝鮮天主敎會가 首都 서울로 發展


34. 天眞菴에서 서울 水標洞으로, 明禮坊으로, 馬峴으로, 楊根으로 傳播된 당시의 朝鮮天主敎會

天眞菴에서 순수하고 소박하고 眞率하고 열성적인 李檗聖祖와 함께 젊은 선비들이 시작한 조선천주교회는 1784년 봄 北京에 파견된 이승훈 선생이 領洗, 歸國한 후, 1784년 여름부터 本據地를 天眞菴에서 서울 水標洞에 마련된 李檗聖祖의 자택으로 옮겼다. 『推案及鞫案』이나 『闢衛編』에 나오는 \'水標橋 李檗家\'가 바로 그곳이다. 大學者 李家煥과 李基讓과의 天·儒 討論會, 즉 天主敎와 儒敎에 대한 大討論會가 열렸던 시기가 바로 이 때였고, 장소도 水標洞 李檗聖祖 自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울 水標洞에 있던 李檗聖祖의 집은 慶州李氏 양반의 집이라서 兩班네들은 자유로이 모일 수 있으나, 常民들에게는 出入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더욱이, 水標洞 李檗聖祖의 자택의 안채 즉 안 사랑에서는 眞書라 부르던 漢文을 사용하는 兩班出身의 漢文 祈禱書 使用 信徒모임이 있었고, 행랑채 즉 바깥 사랑에서는 주로, 漢文을 모르던 머슴꾼들이나 종들, 常民 出身의 信徒들이 당시 諺文이라 부르던 한글기도서를 사용하는 모임이 있었으므로, 신도들의 一致와 和睦 면에서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明洞大聖堂이 있는 明禮坊으로 옮기게 된다. 평소 兩班 常民 人間差別을 하지 않으시던 李檗聖祖께서는, 정약용의 표현대로, \"무릇 모든 일에 있어 결코 편파적인 법이 없으시고(庶物無偏頗), 미운 정 고은 정 다 손수 살피시며 다독이시는(親篤欣情眄),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고루 갖추시었으니(賢豪氣相投), 李檗聖祖을 따르던 中人들이 많았으므로, 그 중에 明禮坊, 지금의 明洞大聖堂 터 바로 아래 살던 金範禹 선생의 집으로 集會所를 옮기게 된 것이다. 金範禹(1751∼1787)는 정식 通譯官 國家考試에 합격한 사람으로 당시의 역관들은 주로 中國語 譯官으로서 대부분 韓藥材商들이나 韓醫師들과도 가깝게 지내곤 하였지만, 中國語를 가르치는 外國語學院이나 韓醫院, 藥材商, 등을 직접 兼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金範禹 譯官은 正之라는 이름으로 당시 더 불렸고, 아버지는 金義瑞이며, 단독으로 宗家의 族譜 편찬을 할 만큼 富裕하였다. 형제들은 金履禹, 金亨禹, 金觀禹, 金積禹, 金聖禹, 金槿禹, 등 모두 8형제였다.
兩班, 常民, 男女, 老少, 貧富, 貴賤을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自由出入하는 中人 金範禹 譯官의 집에서 朝鮮天主敎會는 社會 階級打破와 男女差別 打破 운동이 曠菴 公의 주도로 저?

최미정(NATALIA99) (2005/04/20) : 성가 61번~♬
배봉균(baeyoakim) (2005/10/08) : 한문 아는 것이 힘이넹...이글 읽으려문...이글 볼 수 있는 사람은 低山 교수 빡엔 읎겠따~...험 험 촬리 모르는 한자 있으문 물어바바...다 모른다구...ㅉㅉ
곽주만(kjm0417) (2005/10/08) : 어려운 한자는 없는데 글씨가 작아 증말 눈 빠지네. ㅎㅎ
신희상(shinada) (2005/10/08) : 천주교 역사도 배우고 한문도 배우고...이거야 말로 일석이조...늦었다고 생각한 바로 이시간이 시작임...
이옥임(okim1066) (2005/10/08) : 난 앞,뒤 한글 살펴서 대충은 파악해요. 하지만 쓰기는 midnight^^ 에이 재미없다! 교수님 방학 언제해요??
신희상(shinada) (2005/10/08) :

내일은 한글날이라 한글로 보시게 됩니다.세종대왕님의 명령입니다...

배봉균(baeyoakim) (2005/10/09) : 니꼴라오 학생~ "어려운 한자는 없는데 글씨가 작아 증말 눈 빠지네. ㅎㅎ"...믿어두 되겠쥐...요?
배봉균(baeyoakim) (2005/10/09) : 요안나 학생 低山 교수 사전에는 "방학"이라는 단어는 읎어...유...ㅎㅎ...각자 알아서 쉬문 돼...유~
곽주만(kjm0417) (2005/10/09) : 교수님 수준에 이르려면 백년하청이지만 그래도 많이 배웁니다. 이것은 참말이에유우
신희상(shinada) (2006/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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