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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딸아이 덕분에 대학교 입학식 구경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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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6-02-25 ㅣ No.95890

 

         딸아이 덕분에 대학교 입학식 구경을 하다





대학교 졸업식 구경을 해본 경험은 두 번 있다. 한 번은 고교 동창인 한 친구가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할 때였다. 시골 신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1967년) 공주사범대학 입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친구인데, 나는 그 친구와 가장 친했던 관계로 고교 졸업식에 빠진 그 친구를 대신하여 최고 우등상인 도지사상을 받기도 했고, 몇 년 후에는 대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해 주었고, 또 얼마 후에는 결혼식 사회도 해주었다.

생각하면 아련한 기억들이 재미있기도 하다. 고교 시절 오로지 공부 밖에 몰랐던 얌전한 친구와 그저 만날 운동이나 하며 깡패처럼 껄렁껄렁하게 놀았던 내가 가장 친한 사이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고교 졸업식에 나오지 못한 그 친구를 대신하여 내가 단상에 올라 최고 우등상인 도지사상을 받을 때의 부러움과 멋쩍음, 몇 년 후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여 검은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쓴 그 친구에게 꽃다발을 건네 줄 때의 그 부러움은 지금도 내 가슴에 홍건하게 남아 있다.

그날 그 친구의 애인도 함께 졸업을 했다. 영어교육과 동기생이라고 했다. 미인이었다. 그 친구로부터 소개를 받아 그의 애인을 처음 보던 순간에도 참 부러웠던 것 같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중학교 교사가 된 그들이 결혼을 할 때는 내가 사회를 보고 축시 낭송도 해주었는데, 결혼식 사회와 결혼 축시 낭송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가 1974년이었지 아마…. 그 친구는 1990년경부터는 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 서울을 가는 23일 아침 달리는 차 안에서 딸아이는 먼동 빛 속의 서해대교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지요하

처음 대학교 졸업식을 구경해 본 때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1987년, 이번에는 내 막내 동생 덕분에 또 한 번 대학교 졸업식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역시 공주사범대학이었다. 그해는 내가 결혼을 한 해여서, 동생의 대학 졸업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을 해서 내 기억이 더욱 명료하다.

이처럼 내겐 대학교 졸업식을 구경해 본 소중한 경험이 두 번 있다. 하지만 입학식을 구경해 본 경험은 없다. 거듭 내 머리에 '부팅'을 해보아도 입력된 기억이 없다. 그런 내가 드디어 어제(2006년 2월 23일) 난생 처음 대학교 입학식을 구경하는 행운을 누렸다. 나이 마흔에 결혼하여 얻은 딸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서 대학생이 되는 바람에, 어느덧 이순을 바라보는 시절에 처음으로 대학교 입학식을 구경하게 된 것이다.

지난 14일 서울 '강남성심병원'에 입원한 다음 '이소성 콩팥 요관내 협착' 진단에 따라 20일 수술을 받은 아들녀석의 병상을 지켜주다가 그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딸아이의 대학 입학 준비 관계로 21일 딸아이와 함께 집에 내려왔다.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아 무려 30여 장이나 프린트를 한 딸아이의 수강 신청 관련 자료들을 함께 살펴보고 녀석의 기숙사 입소 준비를 하는 것으로 22일 하루를 소비했다.

그리고 23일 새벽 6시 딸아이와 함께 출발했다. 차를 가지고 서울을 가본 경험은 일찍이 두 번 있다. 성산대교 근처와 용산의 동부이촌동을 간 적이 있는데, 두 번 모두 10여 년 전의 일이어서 어디로 해서 어떻게 가고 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청년 시절에 몇 년 동안 서울에서 노동자 생활을 해서(후에 드라마 작가로 대성을 한 이환경씨와 함께…) 서울 지리를 대충은 알고 있지만, 차를 가지고 간다는 것은 사실 겁나는 일이었다.


▲ 서울 마포 S대학교 안 성당에서 23일 오전 9시에 열린 ‘입학축복미사’의 한 장면
ⓒ 지요하

서울로 대학교 진학을 한 딸아이 때문에 참으로 오랜만에 차를 가지고 서울을 가게 되었고, 또 앞으로 종종 서울을 가야 하겠기에 서둘러 '네비게이션'을 하나 장만했다.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고 22일 택배로 받아서 전문가의 손을 빌려 장착을 했다.

30여 만원을 들여 마련한 네비게이션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었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전국 어디든지, 복잡한 서울 시내도 곳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도로 곳곳의 수많은 무인 카메라의 위치와 규정 속도를 알려주니, 나이와 걸맞게 비교적 규정 속도를 지켜 운전을 하면서도 종종 카메라에 찍혀 비싼 '수업료'를 물곤 한 처지에서는 실로 고마운 일이었다.

정교한 그림으로, 갖가지 표시로, 또 낭랑한 젊은 여성의 음성으로 다양한 정보를 알려주는 네비게이션 덕택에 색다른 재미를 맛보며 즐겁게 운전을 했다. 서산(운산)에서 서해안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달릴 때는 지난 3년 동안 천안을 다녔던 일들을 딸과 함께 회억하기도 했다.

첫 새벽에 일어나서 딸아이를 천안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올 때면 아슴히 보게 되는 동쪽 하늘의 먼동 빛에 얼마나 감동을 했던가. 신선한 새벽 기운과 먼동 빛을 사랑하여 유난히 새벽 운전을 즐겼던 그 시절도 어느덧 끝났는가 했더니, 아직 그 세월이 남아 있음을 실감하는 기분도 적이 삼삼했다.


▲ 23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2006학년도 입학식’의 한 장면
ⓒ 지요하

딸아이가 대학 생활을 하게 된 서울 마포의 S대학교는 오전 10시에 입학식을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새벽 6시에 출발을 한 것은 학교에 9시 이전에 도착을 하기 위해서였다. 학교내 성당에서 9시에 시작되는 '입학축복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였다. 입학축복미사부터 지내고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 딸아이의 '신앙 의지'는 내게 또 다른 기쁨을 안겨주었다.

화성휴게소에 들러 우동으로 아침을 먹었다. 지난 3년 동안 서산휴게소에서 우동으로 이른 아침을 먹으며 묘한 낭만적인 기분을 즐긴 적은 수없이 많지만, 화성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기는 처음이었다.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우리가 오늘 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동으로 아침을 먹는구나. 장소는 달라졌지만…. 이른 아침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른 아침을 먹곤 한 그 세월이 어느덧 끝났는가 했더니, 그게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 사실이 아빠에게 묘한 즐거움과 다행스러움을 안겨주는 것 같다."

우동을 먹으며 내가 딸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니, 녀석은 웃으며 "저도 그게 다행스러워요. 여러 가지로…"하고 더욱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우리는 화성휴게소에서 7시 30분쯤 출발을 했고, 네비게이션은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이 52분임을 알려주었지만, 우리는 서울 금천교 지점에서 심한 정체를 겪어야 했고, 또 영등포 일대에서 시간이 많이 잡아먹혀서 9시가 넘어서야 S대학교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놓고 급히 성당으로 달려가니 이미 '말씀의 전례'가 중간을 넘어 '화답송'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미사에 참례한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입학식이 열리는 체육관 앞의 붐비는 모습
ⓒ 지요하

입학식은 체육관에서 10시 정각에 열렸다. 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교수진이 입장을 할 때는 신입생 학부모 모두 일어서서 박수로 환영했는데, 나도 앞으로 4년 동안(어쩌면 6년 동안) 내 딸아이를 가르쳐주실 교수님들께 힘껏 박수를 보내 드렸다.

입학식은 사회자의 '개식'과 '국민의례', 교목처장의 '기도', 입학처장의 '신입생학사보고', 손병두 총장의 '환영사', 박홍 이사장의 '축사'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얼마 전까지 총장이었던 박홍 이사장은 원고 없이 강연식으로 축사를 했다.

박홍 이사장은 인상과 덩치에 어울리는 굵은 목소리로 말을 재미있게 하는 분이었다. 우선 목소리부터 듣기가 좋았다. 구수한 입담으로 웃음을 많이 유발하면서 정말 재미있게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그의 얘기 중에는 S대학의 '교훈'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라틴 말로 '오베디레 베르따띠(Obedire Vertati)'가 교훈인데, '진리에 순종하라', 또는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열어라'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 교훈에 따라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S대학의 교육 목표라고 했다. 그러며 그는 1800여 명 신입생들로 하여금 "남을 위한 삶을 살자!"라는 자신의 선창을 큰소리로 복창하게 했다.

나는 과거 박홍 신부님과 지상(紙上)에서 충돌을 한 인연이 있는 처지였다. 1991년 김기설씨 사망 이후 벌어진 '분신 사태' 때 박홍 총장이 "재야에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한 후 1994년에는 "한국 학생 운동의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을 때 나는 <한겨레신문>에 반론의 글을 썼다.

박홍 총장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신부님에게서 냉전 세력 선봉장 느낌을…'이라는 그 글을 당시에 박홍 총장이 읽어보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과거에 박홍 총장에게 지상에서 반론으로 공격을 했던 이력이 있다.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터이다. 지금도 물론 그분과 나 사이에는 생각의 차이, 어떤 대립각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 입학식이 열린 체육관 앞마당의 한 풍경
ⓒ 지요하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내 딸아이도 박홍 신부님과 인연을 함께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학교 이사장과 학생의 관계라는 게 그렇게 각별한 것은 아닐 테지만, 그것 역시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이 세상에 인연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마는, 박홍 이사장이 우선은 성직자이고 내 딸아이는 가톨릭 가정에서 나고 자란 신자이니, 종교 차원에서는 더욱 각별한 사이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박홍 이사장의 강연식 축사를 듣다보니 박홍 이사장이 정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구수하게 말을 참 잘하는 분이라는 실감이 더욱 호감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교학처장이 소개하는 교수진 가운데는 내가 일찍이 지상에서 명쾌한 글을 많이 읽고 이름을 잘 기억하는 박호성 정외과 교수도 있었다. 그 분이 주로 <한겨레신문>에 진보 성향의 호쾌한 글을 많이 쓰다가 90년대 중반 이후 신문 칼럼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것은 혹 같은 학교에서 함께 일하게 된 박홍 총장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나름의 생각을 다시 해보게도 되었다.


▲ 딸아이 덕분에 난생 처음 대학교 입학식을 구경했는데 사진 한 장 안 찍을 수 있나. 카메라를 들고 서성이니 한 학생이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 지요하

입학식은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입학식 후에 입학식이 열린 체육관에서는 신입생들에게 '학사 안내' 행사가 베풀어졌고, 학부모들은 모두 '이냐시오 회관'으로 옮겨가서 '학부모와 총장과의 간담회' 행사를 가졌다. 입학식과 졸업식 등 학교 행사 때 '교가'를 부르는 대학교, 입학식 후 '학부모와 총장과의 간담회'를 갖는 대학교는 S대학 뿐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래서 서울의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그 대학교를 일컬어 '신촌고등학교'라고 한다는 말도….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희승 작사/안익태 작곡'으로 되어 있는 '교가'의 악보를 보며 성당 성가대원 실력을 발휘하여 함께 힘차게 불렀고, 입학식 후의 간담회 행사에도 참석을 했다. '학부모와 총장과의 간담회'는 아무래도 학부모들의 '기부금' 유도가 목적인 것 같았다. 그 분위기를 느끼면서 조금은 고민을 했지만, 그 문제는 나중에 심도 있게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 입학식 후 ‘이냐시오 회관’에서 열린 ‘학부모와 총장과의 간담회’에서 손병두 총장에 이어 박홍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지요하

'학사 안내' 후 같은 학부 선배들로부터 여러 가지 안내를 받은 딸아이가 오후 1시가 훨씬 넘어서야 내게로 왔다. 새내기 후배들 안내를 맡은 선배들과의 뒤풀이 행사를 슬쩍 외면하고 왔노라도 했다. 서둘러 차를 가지고 기숙사로 갔다. '벨라르미노 학사'라는 이름을 가진 기숙사의 2층 딸아이 방에 집에서 가져온 짐들을 옮겨 풀어놓고 정리하는 일을 했다.

4명이 함께 쓰는 방이었다. 각자의 책상 위에 침대가 있었다. 침대와 천장 사이가 좁아서 침대에서 일어설 수는 없고 겨우 앉을 수 있는 정도였다. 여러 가지로 불편함이 많을 것 같았다. 물론 값도 싸고(그래서 입소 경쟁도 없지 않은 듯하고), 원룸을 얻는 수고와 번거로움도 면하고 해서 기숙사 입소를 다행으로 여겼지만, 편하게 밥 먹는 것만 빼고는 전반적으로 운신이 불편할 것 같아 딸아이에게 미안해지는 마음도 컸다. 다음 학기나 내년에는 원룸을 얻는 일을 적극적으로 고려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S대학 기숙사의 방 모습. 다소 비좁고 불편할 듯한 느낌을 준다.
ⓒ 지요하


일을 마치고 우리는 2시 30분쯤 대림동 강남성심병원으로 향했다. 시간 절약을 위해 점심은 차 안에서 김밥으로 해결했다. 한 손으로는 김밥을 집어먹으랴, 네비게이션에 바삐 눈을 주랴, 서울 시내 운전이 재미있기도 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열리는 2박3일 동안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는 28일까지는 '자유 외박'이라고 해서 딸아이는 병원에서 동생을 돌보며 자겠다고 했다. 병원에서 인터넷으로 '수강 신청'도 할 겸….

딸아이가 서울로 대학교 진학을 한 덕분에, 또 S대학교의 입학식이 어제 23일에 있은 덕분에 우리 부부는 병상의 아들녀석 간병을 딸아이에게 맡기고 어제 오후 집에 내려올 수 있었다. 잠시나마 아들녀석의 병상을 딸아이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닌데, 그것을 자청하는 딸아이, 부모 사정과 병상의 동생을 생각하는 녀석의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다.

어제 입학식을 마치고 드디어 대학 생활을 시작한 딸아이가 앞으로 4년 동안의 대학 생활을 충실하고 알뜰하게 잘 가꾸어 가기를 충심으로 빈다.


▲ 앞으로 내 딸아이가 생활할 S대학 기숙사 '벨라르미노 학사' 전경
ⓒ 지요하



2006-02-24 13:57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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