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성 루카 황석두 순교자 현양 미사 강론 유감

스크랩 인쇄

윤종관 [gabie] 쪽지 캡슐

2015-10-25 ㅣ No.909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루카 황석두 순교자 현양 미사 강론 유감

 

10월 24일은 하부내포성지의 ‘도앙골’에서 ‘삽티’에 이르는 산길 도보순례의 날이었습니다. 새벽잠을 떨치고 봉사자로 나선 홍산 본당의 교우님들께서 아침 일곱 시부터 도앙골 입구와 삽티 구간의 요소요소에서 순례자들을 안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꾸물꾸물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간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먼 데서 오시는 순례자들께서 도착하기 시작하고, 홍산 본당 봉사자들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순례자들께서 산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계획한 오전 아홉 시 보다 이른 시간에 벌써 순례자들은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불안한 안개 속의 산길에서 간혹 빗발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도보순례자들께서 산길 넘어 삽티 성지에 이르기 시작하여, 예정 시각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르게 순례미사 장소는 도착 순례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대략 400여 명 정도의 순례자들께서 도보 코스를 완주하고 미사성제를 준비하며 자리 잡았습니다. 예정된 11시보다도 한 시간 이른 10시에 거의 모든 도보순례자들께서 운집을 마쳤습니다. 그 시각의 삽티 성지 숲속 나무들 사이로 하늘은 불안스런 형국이었습니다.

 

주최 측은 이 불안한 일기에 예정 시각에 앞서 미사를 봉헌하도록 진행을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황석두 루카 성인의 안장지 ‘삽티’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봉헌하는 미사성제가 시작 되었습니다. 논산지구장 이원순 신부님의 주례와 지구내 참석 사제들의 공동집전으로 400여 명 순례자들의 황석두 성인 현양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도앙골에서부터 산 넘어 걸어오신 순례자들께서 너무도 수월하게 예정보다 1시간 이른 10시에 삽티에 도착한 그 시각에 불안한 하늘의 기상을 염려한 주최 측의 진행으로 미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안한 형국이었던 하늘은 미사 시작 후 말씀 전례의 시각에 샤워기처럼 순례자들에게 물세례를 퍼부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자신들이 깔고 앉아있던 비닐 조각들을 양팔로 모두 들고 일어서서 기도를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례자들 무리의 한 구석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양팔 기도로 미사 봉헌 합시다!" 아마도 꾸르실료 교육 이수자의 부르짖음인 것 같았습니다. 꾸르실료 교육 과정의 하이라이트가 양팔기도이지요. 그 순간 모든 순례자들은 비닐 깔개를 양팔로 들고 미사 진행의 응답 기도를 소리 높이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의 광경을 카메라로 촬영한 분이 계시다면 그걸 공개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빗속의 삽티 황석두 성인 현양미사는 봉헌 되었습니다.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천신만고로 여기 삽티에 모셔다 안장한 후 149년 만에 그 현장에서 순례자들은 이런 모습의 신심으로 황석두 성인과의 교감기도를 올렸습니다.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미사에서 강론을 해야 했던 하부내포성지 담당 사제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덮고 짤막한 몇 마디만 하겠다면서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준비했던 원고의 시간이라면 빗속에서 양팔기도하는 순례자들에게 고문을 가할 것이라면서 강론 사제는 원고 없이 간단하게 삽티 성지와 황석두 성인의 관련 사연을 말하겠다고 하고서는 스스로 흥분하여 장황하게 도앙골과 삽티 등 하부내포성지의 과거와 오늘에 대하여 즉흥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 글을 쓰는 본인입니다. 그러나 비를 피하여 비닐 깔개를 들고 서서 양팔 기도를 하는 순례자들은 그 지루한 연설을 끝까지 경청하였습니다. 그 장황한 연설 보다는 미리 준비했던 원고대로 강론하였다면 차라리 그 양팔 기도의 순례자들을 덜 괴롭혔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그 준비했던 원고의 강론을 아래에 실어 올리면서 참석했던 순례자들께 사죄를 청하는 바입니다. 용서해주시기를 빌며 그 준비했던 원고를 아래에 실어드립니다.

 

 

---------------------------

 

 

순례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부여군 내산면의 ‘금지리’라는 계곡의 마을에서 ‘도앙골 성지’를 들러, 산 넘어 걸어서 홍산면 ‘상천리’라는 마을 뒷산 계곡에 이르러, 여기서 순교자 황석두 루카 성인 현양미사를 봉헌하십니다. 산을 넘는 어려운 도보순례로써 여러분은 오늘 주님의 큰 은총을 체험하는 분들이십니다. 오시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장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미사를 봉헌하는 장소에서 내려가면 ‘삽티’라 일컫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삽티’라는 명칭은 고개를 뜻합니다. 다른 말로 ‘삽고개’라 하는 이 고개는 여기 홍산면 상천리에서 북쪽으로 내산면 금지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의 이름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큰 고개를 산길로 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오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아침에 걸으신 길은 100년 전 150년 전에 우리 신앙선조들이 자주 넘어 다니던 길입니다. 박해시대에 ‘도앙골’ 그리고 이곳 ‘삽티골’에 신자들끼리 모여 숨어살았습니다. 그리고 두 마을 사이에 비밀리에 신자들은 서로 연통하면서, 여러분이 오늘 걸으신 고개를 넘어 다녔습니다.

 

‘도앙골’에는 한 때 40-50명의 신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 한 동안 머무시며 사목활동보고서를 작성하여 1850년 10월에 유럽으로 발송하신 곳이 ‘도앙골’입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 귀국하셔서 10개월 동안 전국 신자들을 찾아 순회하신 후 최초의 보고서를 ‘도앙골’의 교우들 집에서 작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 초기 ‘내포의 사도’라 일컫는 이존창 선생께서 홍산 지방으로 피신하여 계실 때 선교하셔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서 모여 살던 곳이 이 ‘삽티’ 계곡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홍산 지방에는 한국교회 초기인 1790년대에 이미 천주교신자들이 있었고, 아마도 박해를 당하게 되자 여기 ‘삽티’ 계곡에 들어와 숨어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추정을 하는 까닭은, 황석두 성인께서 1850년대에 고향인 충북 연풍에서 자기 가족들을 홍산으로 이주시키고 결국엔 이곳 ‘삽티’에 살도록 했는데, 이는 그 이전에 이곳이 박해를 피해서 신자들이 살던 곳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앙골’과 ‘삽티 마을’은 옛적에 홍산군의 산골이었습니다. 그러한 산골은 또 만수리의 ‘북두머니’라는 신자 마을, 내대마을, 그 산 넘어 고갈마을과 화성리 거칠마을, 성태산 계곡의 옥가실 등 외산면 지역의 오지산골이 홍산군의 교우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옥산면 내동과 부덕리에도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습니다. 이 모든 산골 마을들 가운데 삽티에는 황석두 성인의 조카이자 양아들 두 명이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와 살았고, 옥산 부덕리에는 황석두 성인의 여동생과 매제가 숨어살았습니다. 그 모든 교우촌의 신자들이 결국 병인박해 때 발각되어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그 모든 교우촌 가운데 ‘도앙골’과 이곳 ‘삽티’는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할 곳입니다. 병인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다섯 성인들의 시신을 모셔다 안장해드린 사람들이 ‘도앙골’의 신자들과 ‘삽티’의 신자들이었습니다.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들 가운데 황석두 성인의 시신은 그해 5월 29일에 여기 ‘삽티’에 살던 그분의 조카이자 양아들이 주동하여 모셔다 이 삽티 산골에 안장하여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했던 사람들 또한 나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또한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들 중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과 두 분 신부님과 장주기 성인의 시신을 도앙골의 김순장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앞장서서 서짓골의 신자들과 함께 모셔다 보령 미산의 서짓골에 안장하여 드렸습니다. 그해 7월 15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했던 신자들 또한 발각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순례자 여러분, 오늘 여러분께서는 그러한 ‘도앙골’과 ‘삽티’의 신자들이 숨어 살던 마을을 연결하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옛적의 그 신자들이 비밀리 내통하던 두 산골마을을 여러분은 오늘 비밀리에가 아니라 소리 내어 걸으셨습니다. 이걸 보고 느끼는 심정을 격세지감이라 하지요.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렇게 드러내놓고 이 산골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도앙골’에 살던 김순장 크리소스토모가 다블뤼 주교님 등 네 분의 순교성인 시신을 모셔오자고 서짓골 신자들을 부추겨서 그 일을 하러 다녔던 산길은 지금 부여군과 보령시 사이의 오늘날 신자들이 연결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 같은 대전교구인데도 보령지구다 논산지구다 하면서 그 경계선이 남북한 휴전선 비슷하게 넘나들기 어렵습니다. 그런 우리 오늘의 행태가 옛적 박해시대의 신앙선조들 이름 앞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논산시와 부여군의 시군계를 넘어 우리는 여기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본당과 본당 사이에도 경계선이 남북 휴전선을 닮았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금사리 본당 관할지역인 ‘도앙골’과 홍산 본당 관할지역인 ‘삽티’를 양 본당 교우님들이 함께 걸어 연결하신 오늘은 남북통일 비슷하게 일치를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논산지구 주최의 순례행사인데도 불구하고 지구의 경계선을 넘어서 타 지구에서 참석하신 교우님들의 모습이 간혹 보이시는군요. 그분들은 옛적의 박해시대 신자들의 모습을 닮은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요! 우리가 남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역을 넘을 수 있고, 더욱 시대를 넘을 수 있는 하나의 신앙을 여기 오늘 우리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황석두 루카 순교성인을 추앙하면서 그분과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세상의 명리보다 하느님 나라 백성의 삶이 더 먼저라는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걸 황석두 성인께서 두 세기 전에 증거 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과거 시험보다 천당의 과거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황석두 성인께서는 어렸을 적 너무 총명하여,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하면서 과거시험에 합격하하는 어른들의 성화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학규 라는 선비를 스승으로 만났는데, 그는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의 조카였습니다. 그 이학규는 천주교 신앙 때문에 유배형을 받았다가 풀려나서 충북 산골에서 몰래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서 천주교 교리책을 구하여 공부하게 된 황석두 성인은 신앙을 얻는 게 참다운 과거시험 합격이라 생각하고 드디어 복음사가 루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앙의 이유로 집안에서 배척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카들과 일부 식솔들을 여기 홍산 지방에 이주시키고, 인근 서천 편교의 사막골에 선교 거점을 삼은 페롱 신부를 보필하면서 이 일대 하부내포 지역의 신자들을 돌보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하던 황석두 성인은 신리에 거점을 두고 충청도 사목을 하시던 다블뤼 주교님께 발탁 되어 주교님의 활동을 보필하다가, 병인년에 주교님과 더불어 서울로 압송되어 끝내 보령 충청수영의 갈매못 사형장에서 주교님과 함께 치명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삽티’ 교우촌에 살던 양아들 황천일 요한과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가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이곳 산골에 모셔 안장하였습니다.

 

그분의 시신을 여기 삽티에 안장하여 드린 두 사람 역시 체포되어 사형 당한 후, 성인의 무덤을 지킨 사람 아무도 없이 세월만 흘렀습니다. 1922년에 병인순교자들 시복조사재판이 열렸을 때 황석두 성인의 종손녀 황 마르타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병인년의) 4월 16일(양력 5월 29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사피(즉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시복조사 재판 34회차 제23조목 황 마르타의 증언)

 

증언자 황 마르타는,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여기 ‘삽티’에 안장하고 발각 체포되어 또한 순교한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의 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을 여기 ‘삽티’에 묻어드린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언을 한 것입니다. 그 증언은 안장해드린 56년 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황 마르타의 증언 후 58년만인 1980년에 충북 연풍의 병방골 황씨 문중 묘역에서 이름 모르는 묘의 유골이 황석두 성인의 것이라며 발굴 됩니다. 이는 어이 된 일일까요?

 

성인의 황씨 가문이 그분의 유해를 ‘홍산 삽티’로부터 ‘충북 연풍’으로 옮겨 모셨다면, 1922년의 이 증언 이후에 그리 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 사실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입니다. 여하튼, 삽티에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를 안장한 1866년으로부터 1922년까지의 56년간 아무도 그 안장 지점을 알 수 없었고, 그 증언의 1922년으로부터 1980년까지의 58년간은 공백 그 자체입니다. 이에 대한 연구와 해명이 있어야 충북 연풍에 현재 조성된 황석두 루카 성인의 묘지에 대한 신빙성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연풍 병방골 황씨 문중묘역에서 발굴된 이름 없는 유해를 연풍 성지에 모셔다 성인의 묘라면서 교회가 공식화 한 1980년 이후 또 35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전교구의 우리는 여기 ‘삽티’에서 성인을 추앙하는 순례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순례자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 감회가 어떻습니까?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인 1964년 5월에 여기 ‘삽티’에서 산림개간을 하던 사람들의 연장 끝에 항아리가 캐어 나왔습니다. 그 항아리에는 삭은 묵주와 십자고상과 성모상 등 박해시대의 것이 확실한 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유물은 서울 절두산 순교기념박물관에 지금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 유물 발굴에 대한 1964년 5월 24일의 가톨릭시보 보도를 저 자신도 홍산 본당 출신의 신학생으로서 읽은 바 있습니다.

 

그 유물 발굴 지점은 오늘 우리가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 200m쯤 아래의 옛 즘터 입니다만, 지금은 15년 전에 타 지역 분들이 매입하여 문중묘역을 만든 곳입니다. 그 유물 발굴 지점에 대해서 교회사 전문가들은 황석두 성인 안장지점과 연관성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우리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진즉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관 책임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저 개인적으로 어찌 할 방도를 찾지 못 하고 있다가, 하부내포성지 책임을 맡게 된 3년 전부터 일을 꾸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유물 발굴지점으로부터 최단거리 위치의 땅을 교회 이름으로 확보하고 순례길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지구장 신부님을 모시고 여러분과 함께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순례자 여러분, 여러분께서 미사 후 식사하러 내려가시는 100여 미터 지점의 밤나무 밭 부근이 유물발굴지점과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그곳에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으로나마 황석두 루카 성인 묘역 상징을 세우고 순례지로 가꾸어야겠다는 심정이 간절합니다. 순례자 여러분, 저의 이러한 심정을 공감해주실 수 있습니까?

 

순례자 여러분, 저와 공감하시는 분들께서 내려가시면서 ‘하부내포성지후원회’의 현수막 앞의 봉사자께 후원회 신립서를 제출해주시면, 제가 여기서 소임을 다할 때까지 후원회원님들을 기억하여 열심히 기도하면서, 황석두 성인의 현양 작업에 분골쇄신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3,609 0

추천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