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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전 1, 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편

71230 신성구 [xhak59] 2004-09-15

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1821~1846, 9월16일 새남터 군문효수)

 

조선교회는 선교사없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드리는 놀라운 은총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양반과 상민의 계급사회로 주자가례 [朱子家禮]

 

실천 철학으로 삼는 시대였으므로 천주교의 새로운 교리는 기존 사회 제도를

 

위협하는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창립 초기부터 이어지는 박해의 회오리 바람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전 국토를 혈제의 제단이 되게 했다.

 

그러나 천주를 향한 믿음의 불꽃은 신앙 고백을 통해 곳곳에서

 

찬란한 빛으로 드러났고, 하느님의 자비는 초기 순교자들의 피로

 

써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실 섭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

김대건 안드레아는 1821년 8월 21일 충남내포(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

 

면천 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조부 택현 안드레아 등이 순교한 순교자 가문에서

 

태어난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이었고 세례명은 안드레아였다. 일찌기

 

'내포의 사도'이존창 에게 복음을 전해 들은 증조부는 열심한 신앙생활로

 

신해박해(1791)때 처음 체포되면서 수없이 옥문을 드나들었고 기약 없는

 

살이 끝에 해미에서 1816년 옥사함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가장인 김진후의 순교로 아들들은 박해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다.

 

김대건의 조부 택현은 1827년 정해 교난의 박해를 계기로 낯선 타향인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해서 살게 되니 이곳은 비록

 

험령대산은 아니어도 첩첩산중이어서그간의 박해를 피해 몰래 이주해 온

 

교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김대건의 나이 7세 때였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골배마실로 이주해 온 소년 김대건은 이 때부터

 

조부 택현의 지도로 한문을 익히기 시작했다.김대건의 부친 제준 이냐시오는

 

열심한 신앙으로 교회 일에 열심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분이다.

 

그러나 소년 김대건에게 깊은 신심을 키워 준 데에는 모친 고 우르술라의 힘이 컸다.

 

모범적인 신앙인 가정에서 자란 김대건이 첫영성체를 한것은 1836년 6월

 

모방 나 신부에 의해서였다. 1836년1월에 입국한 모방 나 신부는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 마음을 쓰며 각 방면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결심도 대견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놓는 부모의 결단 또한 놀라운일이었다. 7월에 소년 김대건은 서울로 올라와

 

최방제와 최양업을 만났으며, 마침내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세 소년도 함께 떠나게 되었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현석문,조신철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인 호송자와 작별하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세 소년 신학생은 1837년 6월 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의 경리부 책임자인 리브와 신부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마카오는 1557년 포르투갈이 점령한 이색적인 도시로서 그 당시 서양인의

 

극동 진출의 근거지가 되었다. 김대건과 최방제, 최양업 세소년은 얼마 후

 

마카오에서 청국인들에 의한 민란을 겪게 되어외방전교회 회원들과 같이 수개월간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신학생으로

 

면학이 계속되었으나 곧 동료신학생인 최방제가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고국산천 멀리 이역에서 동학도이자 동포를 잃은  김대건, 최양업 두 소년의 가슴은

 

얼마나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을까.그러나 그들은 슬픔과 낙담에 빠져 있을수 없었다.

 

또다시 일어난 민란으로 근교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머물면서 면학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때가 183 9년 4월이었다.그해 11월에야 다시 마카오롤 돌아오게

 

된다. 이해는 조선에서는기해박해가 벌어져 전국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는

 

수난의해였고, 신학생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 프란

 

치스코,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당고개 성지)등도 이때 순교했다. 마카오로 귀환한 후

 

철학 공부에 정진해 1841년에는 철학 과정을수료하고 신학 과정으로 진급했다.

 

그들이 전공한 것은 성직자가되기 위한 철학과 신학이었으나 그것을 익히기 위해

 

하부구조를 이루는 기초교양을 쌓는 서양 학문의 초.중등과정을 거쳐야 했다.

 

또한 면학 장소가 마카오,마닐라 등 국제 도시여서 학식과 견문이 넓어지고

 

문화와 교양을 갖춘 이른바 지식인으로 자란 신학생들은 쇄국 조선에서 벗어나

 

조선인 최초로 해박한 서구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두 신학생이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받고 있던 1840년, 프랑스의 루이 필립 황제는 세 척의 군함을

 

극동 해역으로 파견해 청국과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군함의 사령관인 세실은 마카오에 기착해 파리 외방전교회 지부를 찾아와

 

유익한 자문을 구하면서 보조자를 청했다. 이리하여 김대건과 조선교구 소속의

 

메스트로신부는 에리곤호에 최양업과 만주교구의 브뤼니에르 신부는 파보리트호에

 

올랐다.서품을 기다리던 두 조선 신학생은 이렇게 귀국길에 오르는 꿈에 부풀었다...

 

.....2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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